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안자르 유적 [ Ruins of Anjar ]

  • 대륙

    아시아

  • 위치

    레바논>베카아 계곡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984년

  • 저자

    루신다 혹슬리

우마이야 왕조가 세운 도시가 남긴 훌륭한 자취

태양이 비치는 레바논 하늘을 배경으로 헐벗은 해골처럼 서 있는 이 웅장한 유적은 이 지역의 역사를 돌이켜 보게 해 주는 흥미진진한 흔적이다. 오늘날 안자르의 인구는 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가 데려온 아르메니아 이민자로 이루어져 있다. 아르메니아인이 도착했을 때, 도시는 인적 없고 황량한 사막과도 같았다. 피난민은 텐트 안에서 살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 이후 그들은 안자르를 고향으로 삼아 다시 녹색이 감도는 경작 지역으로 바꾸어 놓았다.

안자르의 전성기는 우마이야 왕조 시대(660~750)였다. 칼리프 왈리드 1세가 이 도시를 지었으며 곧 번영하는 떠들썩한 도시가 되었고, 6천 개 이상의 상점이 들어선 극히 중요한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안자르를 사냥 별장이자 여름의 가장 더운 몇 달을 보내기 위한 휴양처로 이용했다.

우마이야 왕조가 세운 이 도시의–주민들에게는 '게르하'라 알려져 있었다–최초 발굴 작업은 1949년에 시작되었으며 아직도 진행 중이다. 상점의 우아한 아케이드를 형성했던 높은 기둥과 늘씬한 아치 길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목욕탕, 주택, 궁전, 모스크, 수크(무슬림 국가의 야외 시장), 잘 포장된 도로의 유적도 남아 있다. 도시는 강력한 요새 설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아직도 웅장한 관문들과 탄탄하게 지어진 감시탑들을 볼 수 있다. 안자르는 시냇물 근처에 건설되었고, 물을 끌어오기 위해 홈통과 파이프가 설치되었다.

안자르의 건축 양식에는 토착 양식과 외부에서 들여온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며, 성벽의 석조 세공에서는 그리스, 로마, 초기 기독교 건물이 지닌 요소를 종종 찾아볼 수 있어 옛 건축물의 자재를 재활용했으며 전리품들을 건축 양식에 통합해 넣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지금은 머리가 사라졌으며, 풍성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조각된 커다란 조각상이 황폐해진 유적 위로 망을 보고 있다. 가까운 곳에는 이보다 더 오래된 문명의 규모가 크게 줄어든 유적인, 로마 시대 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자르 유적 [Ruins of Anjar]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1.20, 마로니에북스)

 

 

 

 

 

 

우마이야 왕조 [ Umayyad dynasty , ─王朝 ]

요약
무아위야 1세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여 세운 이슬람 칼리프조(661∼750).
 

우마이야 왕조는 정통칼리프 시대에 이어 아랍-이슬람 제국의 2번째 칼리프조로서, 우마이야 가문에 무아위야에 의해 세워졌다. 우마이야 가문은 예언자 무함마드와 같은 쿠라이쉬 부족에 속해있으며, 전승에 따르면 같은 조상인 압두 무나프(Abu Munaf)의 후손들이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압두 무나프의 아들 중 하쉼(Hashim)의 혈통을 이은 하쉼 가문에 속했으며, 우마이야 가문은 압두 샴스(Abd Shans)의 혈통을 이은 가문이었다. 하쉼 가문과 우마이야 가문은 메카의 정치, 경제적 주도권을 두고 경쟁관계에 있었으며, 특히 우마이야조의 제 1대 칼리프 무아위야(Mu'awiyah)의 부친 아부 소피얀(Abu Sufyan)은 무함마드의 이슬람 포교 초기에 가장 대표적인 반대인물이었다. 아부 소피얀을 비롯한 우마이야 가문은 여러 차례의 전투를 거친 끝에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며, 빠르게 팽창하는 이슬람 제국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정치적, 외교적 기술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면서 이슬람 공동체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이은 정통 칼리프조 말기, 이슬람 신앙의 동요와 잇따른 음모로 혼란이 거듭되었다. 제 3대 칼리프 오스만이 새벽기도 중 암살당하고, 그 암살의 배후가 밝혀지기 전에 알리가 제 4대 칼리프로 선출되었다. 그러자 오스만의 6촌 동생이자 당시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있던 우마이야(Umayyah) 가문의 무아위야(Mu'awiyah)가 오스만의 복수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며 알리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알리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아위야군과의 첫 전투인 낙타전투(A.D. 656년)에서 승리했으며, 두번째 전투인 십핀전투(A.D.657년)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자 불리해진 무아위야군은 협상을 요구했으며, 협상 과정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했다. A.D. 661년, 이라크 지역으로 돌아간 알리가 카와리지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힘의 균형은 우마위야에게 기울었으며, 그는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는 한편 칼리프위에 올라 우마이야 왕조를 세웠다. 후에 안달루스 지방에 성립한 ‘후기 우마이야조(757-1031)’와 구별하여 이것을 ‘전기 우마이야 왕조’라고도 한다.

우마이야 왕조의 제 1대 칼리프 무아위야(A.D.661-680년 재위)는 선출로 칼리프를 뽑는 전통을 무시하고 아들 야지드(Yazid)에게 칼리프위를 세습했다. 이로서 칼리프제는 선출에 의해 지도자를 뽑던 전통적 관행을 깨고 세습제로 전환되었다. 그는 또 군사조직도 비잔틴 양식에 따른 새 편제로 바꾸었다. 이것은 강력한 중앙정권의 수립과 제국이 계속 영토확장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무아위야는 668년 비잔틴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섰다가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아랍-이슬람 제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무슬림의 단결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전성기는 제 5대 칼리프 압둘 말리크와 그의 아들인 왈리드 1세 때이다. 특히 칼리프 왈리드 1세(705-715 재위) 때에는 아랍의 정복사업이 매우 활발하게 펼쳐졌다. 첫째, 이라크 동북쪽 중앙아시아 방향으로 꾸타이바 빈 무슬림 장군의 주도 하에 진행된 정복활동으로서, 705년에서 712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 결과 메르브, 발크, 부카라,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여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방과 옥수스 강 건너편까지 제국이 확장되었고, 이 지역이 이슬람화되었다. 둘째, 이라크 동남쪽 인도 방향으로의 원정으로, 무함마드 빈 알 까심이 맡아 하였다. 710년에서 712년 사이에 진행되었으며, 발루치스탄과 펀자브 지방까지 제국이 확장되었다. 셋째는 북아프리카 서쪽과 유럽 지역으로의 정복활동으로, 무사 빈 누사이르와 그의 부하 따리크 빈 지야드에 의해 이루어졌다. 710년에는 북아프리카 전역이 아랍-이슬람화 되었으며, 711년에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 아랍군에 의해 서 고트 왕국이 멸망하고 스페인 전역이 우마이야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그동안 완비된 역체제도(驛遞制度) ·밀정사찰(密偵査察)제도는 칼리프의 독재군주권을 강화하였고, 종래의 잡다한 통화(通貨)는 중앙정부가 발행한 순수한 아라비아풍의 디나르 금화(金貨)와 디르함 은화로 통일하였다. 무거운 지조(地租)의 부담을 면하기 위하여, 다수의 비(非)아라비아계 주민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마왈리[被護民]가 됨으로써 국가에 대한 세수입(稅收入)이 대폭 감소하였다. 때문에 이라크 총독 하자지는 그들을 농지로 되돌려 보내고, 당초 부담한 지조와 인두세(人頭稅:Jizyah)에 해당하는 고액의 공조(貢租)를 부과하였으므로 마왈리의 불만이 증대하였다. 특히 우마르 때 지조의무를 지닌 토지소유자가 개종할 때 그 토지는 이슬람공동체의 공유재산으로 하고 원래 소유주는 차지인(借地人)의 입장에서 경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정책은 성공하지 못하였고 뒤에 수정된 하자지의 제도로 복귀하였다. 결국 징세(徵稅) 때문에 궁핍화한 피정복민의 울분과 호라산의 반란을 이용한 압바스가(家)의 흥기(興起)로 마침내 멸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마이야 왕조 [Umayyad dynasty, ─王朝] (두산백과)

 

 

 

 

 

 

 

 

 

 

 

 

 

 

 

 

 

 

 

 

 

 

 

 

 

 

 

 

 

 

 

 

 

시리아가 내전 중이라 이스라엘을 돌아 시나이 반도를 거쳐 요르단 암만 공항으로 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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