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내전을 안정 시키기 위해 UN군으로 나가있는 동명부대의 수비 지역을 넘어 티레로...

 

레바논에 파병되는 한국군이 남부 해안도시 티레에서 3㎞ 떨어진 구릉지대에 주둔할 것으로 보인다.

1일 유엔에 따르면 레바논에서 유엔평화유지군(UNIFIL)으로 활약하게 될 한국군 350명이 수도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80㎞ 정도 떨어진 해안도시 티레 인근 구릉지대에 주둔하는 것으로 최근 확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올초 남부 국경도시 나쿠라 소재 UNFIL 사령부로 파견된 한주성, 정선태 중령과 정재수, 정병환 소령이 지난달 29일부터 진지구축 작업을 시작하는 등 사전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은 오는 6월 선발대를 시작으로 7월까지 레바논에 병력 350명을 파병할 예정으로, 이들은 주로 감시·정찰 임무를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 중령 등은 이날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티레는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국경인 블루라인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데다, 지난해 7월 분쟁 당시에도 거의 피해가 없었던 지역”이라면서 “유엔 관할지역 중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스페인, 프랑스 등 3개국의 7000명을 비롯해 29개국에서 파견된 총 1만3000여명의 병력이 현재 레바논 남부의 완충지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중해와 접해 있는 고대 페니키아의 해안도시인 티레는 인구 11만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레바논에서 4번째로 큰 도시로, 197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로마 경기장 등 고대 유적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이 도시는 18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당시 이스라엘군 본부로 활용되면서 전쟁의 참화에 휩쓸렸고, 지난해 7월에는 이스라엘과 레바논 남부의 무장세력 헤즈볼라로부터 여러차례 폭격을 맞기도 했다.

신보영기자 boyoung22@munhwa.com

 

 

 

티레

 

티레(Tyre)는 베이루트 남부 70km, 시돈 항구에서 약 40km 지점, 레바논과 이스라엘에서 약 24km 북쪽에 위치해 있다. 고대 티레는 레바논 남쪽 연안에 있었으며 BC 3000년경 페니키아에 의해 세워졌다. 원래는 육지 지역과 섬 도시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the Great)이 정복을 위해 매립으로 육지와 연결했다.

페니키아 시대에 티레는 자줏빛 염색과 유리 산업으로 유명했으며 로마시대의 유적을 통해 현재에 알려졌다. 티레의 구 시가지는 반도에 있으며 신도시는 조금 내륙에 위치해 있다. 더 남쪽으로 가면 로마시대의 티레 유적에 다다르게 된다.

로마시대의 유적에는 기념비적인 아치 길을 따라 이어진 잘 보존된 도로가 나온다. 도로 한편은 수로 옆에 이어져 있으며 양쪽에는 정교하고 복잡하게 조각된 돌과 대리석 석관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다. 유적의 경마장은 AD 2세기에 세워졌다. 이곳의 경마장은 로마시대의 가장 큰 것 중 하나로 2만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매년 여름이면 이곳에서 축제가 벌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티레 (레바논 개황, 2009.4, 외교부)

 

 

 

기원전 5세기부터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의 역사가였던 헤로도토스(Herodotos)가 이곳을 방문하면서, 티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주요 도시 중의 하나로 생각되었다. 인류 역사의 중요한 단계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사건들을 돌이켜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이 도시의 명성을 증명할 수가 있다.

알파벳의 발명(이것을 모방하여 개조한 그리스인들이 카드모스(Cadmos)에게 영광을 돌렸다), 자주색 염료의 발견(전설에는 페니키아의 헤라클레스에 해당하는 멜카르트(Melkart)가 발명했다고 함), 티레의 왕인 히람(Hiram)이 벌인 전쟁 때문에 솔로몬 신전을 예루살렘에 건설하게 된 일, 그리고 솔로몬 신전의 건설, 서부 지중해까지 항해하던 강인한 항해자들의 해상 개척, 우티카(Utica), 카디스, 중요한 해양 상업을 거의 독점했던 카르타고 같은 무역 중심지 건설 등이 이곳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이다.

예언자 에제키엘(Ezekiel)의 예언에 따라 바다로 향하는 입구에 있는 난공불락의 섬에 건설된 티레는 332년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지막 공격이 벌어지기 전, 제방 옆의 해협을 봉쇄하는 공격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역사적 격전지였던 이곳에 처음에는 그리스의 도시가, 기원전 64년에는 로마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티레는 여러 차례 예전의 위풍당당함을 되찾으려고 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14개 주교 관할권을 통합하는 위치에 있었다. 636년, 아랍의 지배 아래 놓였다가 다시 1124년에는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 함대의 도움으로 도시를 탈환하였다. 1124년부터 군대가 철수한 1294년까지 이 도시는 기독교인들의 중심지가 되어 성에 부속된 예배실을 제외하고도 18개의 교회를 지었고, 원래 성당의 요소를 재활용하여 대성당을 다시 건설하였다.

십자군전쟁이 끝난 후, 이 도시의 역사적 기능은 쇠퇴하였다. 13세기 말에 맘루크(Mamluk) 왕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난 뒤에는 18세기에 약간 재건되었을 뿐이다. 최근에 인구가 증가하긴 했지만, 아직도 티레의 인구는 60,000명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시장이 들어선 고고 유적에는 로마의 도시와 중세의 십자군의 건축물이 있다. 이 유적지는 아래와 같은 두 지역으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 전설에 의하면 히람이 만들었다고 하는 몇 개의 섬이 모여 하나의 섬을 이루는 군도가 있는데, 바로 이곳에 유적 도시가 있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황제 통치의 식민지가 되었다. 팔라에스트라(palaestra)와 공중목욕탕인 서미(thermae), 경기장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1127년에 베네치아인들이 건설한 성당 유적, 십자군 원정 당시에 건설된 성채의 벽도 아직 남아 있는 곳이다.

• 내륙에는, 대로 한편에서 발견된 엘 바스(El Bass)의 공동묘지에 개선문(2세기)이 우뚝 솟아 있다. 이 고고 유적에 남아 있는 다른 중요한 유산의 흔적으로는 송수로(aqueduct)가 있고, 특히 로마 세계에서 가장 컸던 전차 경주장(hippodrome, 2세기)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티레 [Tyre] (유네스코, 유네스코한국위원회(번역 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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