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화산 폭발로 멸망한 도시

79년 8월 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검은 구름이 분출되면서 화산이 분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산은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암을 뿜어내면서 인근 도시로 쏟아져내렸다.

나폴리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폼페이는 이 화산 폭발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소멸한 도시 중 하나다. 하늘에서 비오듯 쏟아져내리는 엄청난 양의 흙과 돌은 순식간에 폼페이를 뒤덮어버렸다. 운 좋게 도망친 사람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늦은 사람들은 지상을 뒤덮은 고온 가스와 열구름에 질식하거나 뜨거운 열에 타 죽었다. 이 폭발로 당시 폼페이 인구의 약 10퍼센트인 약 2,000명이 도시와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당시 폼페이는 B.C. 89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였으며, 로마의 상류계급이 별장을 건설했던 휴양지이기도 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인 63년 2월에 대지진이 일어났지만 도시는 착실하게 재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6년 뒤 도시 전체는 화산재 밑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폼페이 멸망의 참극에 대해서는 당시 로마의 정치가 소()플리니우스1)가 역사가 타키투스2)에서 보낸 편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소플리니우스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나폴리만 입구 미네눔에 머물고 있었다. 폭발 당일 소플리니우스의 어머니가 베수비오 화산 상공에 이상한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소플리니우스에게 알려주었다. 소플리니우스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재빨리 어머니와 함께 먼 곳으로 피난을 떠났다. 후에 그는 편지 속에서 그때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그의 숙부인 대플리니우스3)는 당시 함대의 선장으로 배를 타고 나가 구조 활동을 펼쳤지만 독성이 강한 화산 가스에 질식해 그만 죽고 말았다.

당시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 참극에 대해 보고를 받고 곧바로 구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피해가 너무나 커서 화산 분출물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로마 황제까지 나서서 폼페이의 몰락을 막아보려 했지만 폼페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폼페이

잠에서 깨어난 로마의 도시

역사에 퇴장했던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592년이었다.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우연한 계기로 폼페이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748년에는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4)가 독점 사업으로 폼페이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굴은 약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름다운 출토품만이 중요하게 취급될 뿐 나머지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또 모자이크나 벽화 같은 미술품들도 충분한 조사도 없이 모조리 프랑스 왕궁으로 실려가버렸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폼페이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유적에 대한 구획 정리와 함께 본격적인 수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굴단은 유적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넣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후에도 폼페이 발굴은 계속되어 현재는 도시의 약 5분의 4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이다. 이곳에서 많은 출토품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발굴조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폼페이는 당시 로마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유적이었다. 화산 폭발로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도시는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폼페이는 한 변이 약 2킬로미터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도시 서쪽에는 포럼이라 불리는 광장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신전과 시장, 시청 등이 모여 있었다. 조사를 통해 바로 이 지역이 폼페이의 종교·정치·경제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도시 곳곳을 이어주는 도로들은 모두 포장되어 있었으며, 차도와 보도로 구분되어 있었다. 또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사거리에서는 공동 수도와 각 가정으로 물을 보내기 위한 수도관 시설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밖에 공중 목욕탕과 체육관, 두 개의 극장, 1만 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도 발굴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발견한 빵집과 술집에서는 화산 폭발이 갑자기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남아 있었다. 화덕에 그대로 남아 있는 불에 구운 빵과 술집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잔 등이 바로 그 증거다. 한가로운 일상을 한순간에 참극으로 몰아넣은 급작스런 화산 폭발과 그로 인한 도시의 파괴가 단지 이야기만이 아니라 사실이었음을 폼페이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폼페이 [pompeii] (고대유적, 2007. 6. 4., 도서출판 들녘)

 

 

 

 

 

 

 

 

 

 

 

 

 

 

 

 

 

베수비오산

 

높이 1,281m. 나폴리 동쪽 12km 지점에 있는 현무암질의 2중식 활화산이다.

일반적으로 영어명의 베수비어스산(Vesuvius Mt.)으로 널리 알려졌다.

유럽대륙 유일의 활화산으로 산꼭대기에는 지름 500m, 깊이 250m의 화구가 있고, 그 안에 중앙화구구()가 있다.

소마산(1,132m)이라고 부르는 외륜산()과 중앙화구구와의 사이에는 아트리오라는 길이 약 5km, 너비 600m의 초승달 모양의 화구원()이 펼쳐진다.

베수비오산은 BC 8세기에 분화()했다고 하며, 63년의 지진으로 산기슭 일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79년 8월의 대분화로 폼페이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삽시간에 죽음의 도시로 변하고 지하에 매몰되는 대참사가 있었는데 이 참사는 영국의 작가 E.G.리턴이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 잘 묘사하였다.

그 대분화 이후에도 수십 회에 걸쳐 산꼭대기와 산허리에서 폭발하여 용암이 흘러내렸다.

1631년에는 약 반 년에 걸친 진동 후 폭발하여 주변의 주민 1만 8000명이 희생되었고,

그 후에도 끊임없이 진동이 계속되어 산의 모습이 달라지고 분화구의 중앙에서 좀 남쪽에 화산구()가 생겼다.

1944년에는 대용암류로 등산전차가 황폐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자동차 리프트로 산꼭대기에 오를 수 있고,

둘레 72km에 이르는 화산 기슭을 둘러싸고 관광철도가 달리고 있다.

높이 600m 이하의 비옥한 화산 비탈면에서는 포도 ·오렌지류 ·호두 등의 재배와, 가축 사육이 활발하다.

산중턱의 서쪽 높이 약 600m 지점에는 1845년 세계에서 최초로 건설된 화산관측소가 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분화는 1973 ·1979년이며, 베수비오산은 나폴리 풍경의 상징으로 많은 노래와 회화, 문학작품에 인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수비오산 [Vesuvio Mt., ─山] (두산백과)

 

 

 

 

 

 

 

 

 

 

 

 

 

 

 

 

 

 

 

 

 

 

 

 

 

 

 

 

 

 

 

 

 

 

 

 

 

 

 

 

 

 

 

 

 

 

 

 

 

 

 

 

 

 

 

 

 

 

 

 

 

 

 

 

 

 

 

 

 

 

 

 

 

 

 

 

 

 

 

 

 

 

 

 

 

 

 

 

 

 

 

 

 

 

 

Posted by land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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