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 15일
부다페스트의 일출
- 호텔 비상 탈출로를 이용하여 옥상에 올라
빈 (Wien) 현지 가이드 : 일명 부루스 리(이용일)
요약
오스트리아의 수도. 면적 414. |
설명
빈 시가
빈의 생활·문화
빈의 산업
빈의 역사
고대·중세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빈회의 이후
제1차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여행정보 http://www.hanatour.com/asp/travelinfo/if-12000.asp?country_code=AT
성 슈테판 성당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로서, 1147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을 시작하였고, 1258년 빈을 휩쓸었던 대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263년 보헤미아 왕에 의해 재건되었다. 1359년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헐어버리고 고딕 양식으로 개축하였고, 1683년에는 터키군, 1945년에는 독일군에 의해 많이 파괴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복구를 시작하여 대부분 옛 모습을 찾았다. 성당 이름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성인(聖人) 슈테판에서 딴 것이다.
옛 건물이 가득 들어찬 구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다. ‘빈의 혼(魂)’이라고 부를 정도로 빈의 상징으로 꼽힌다. 공사기간이 65년이나 걸렸으며 건물의 길이가 107m, 천정 높이가 39m에 이르는 거대한 사원이다. 높이 137m에 달하는 첨탑과 25만 개의 청색과 금색 벽돌로 만든 화려한 모자이크 지붕이 눈에 띈다. 보헤미아 왕이 세웠던 '거인의 문'과 '이교도의 탑'도 남아 있다.
건물 내부에는 16세기의 조각가 안톤 필그람이 만든 석조 부조의 설교대와 15세기 말에 만들어진 프리드리히 3세의 대리석 석관이 있다. 그밖에 마리아와 예수상이 있고,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매우 아름답다. 지하에는 1450년에 만든 지하유골 안치소 카타콤이 있는데, 페스트로 죽은 사람의 유골 약 2,000구와 합스부르크 왕가 황제들의 유해 가운데 심장 등의 내장을 담은 항아리 및 백골이 쌓여 있다. 모차르트의 결혼식(1782)과 장례식(1791)이 치러진 곳이며, 빈 시민들은 매년 12월 31일 슈테판대성당 광장에 모여 새해를 맞는다.
비엔나의 중심지, 케른트너 거리(Kerntner Strasse) |
비엔나 관광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거리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립 오페라 하우스에서 시작하여 슈테판 대성당 광장에 이르는 비엔나의 중심가로 고품질의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상점들이 즐비하며 보행자 전용 거리인 그라벤과 콜마르크트로 이어진다. 쇼핑의 파라다이스라고 할 수 있는 거리로 세계 유명 디자이너의 상품, 가치있는 골동품 또는 재미있고 앙증스러운 기념품 등이 사람들의 시선을 멈출 수 없게 한다. |
오스트리아 (Republic of Austria)
요약
유럽 중남부에 있는, 산이 많고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 정식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Resrepublik Österreich). |
설명
면적 8만 3855㎢. 인구 818만 8000명(2003). 동쪽은 헝가리·슬로바키아, 서쪽은 스위스·리히텐슈타인, 남쪽은 슬로베니아·이탈리아, 북쪽은 독일·체코와 접하고 있다. 수도는 빈.
오스트리아의 자연
북동부를 흐르는 다뉴브강 이북은 보헤미아숲의 연장이며 고기(古期)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완만한 구릉과 넓은 평지는 빈분지로부터 노이지들러호(湖) 부근에만 있을 뿐이다. 다뉴브강은 독일의 파사우로부터 오스트리아 북동부를 지나 빈 동쪽에서 헝가리로 들어간다. 멜크로부터 하류 쪽으로는 단구가 있는 넓은 계곡이 있고, 상류는 협곡 사이로 흐른다. 주요 지류는 인·잘차흐·엔스·트라운·무르 등이며, 상류에는 아터호를 비롯한 많은 아름다운 호소(湖沼)가 있다. 산지에는 U자곡·빙퇴석(氷堆石) 등의 빙하지형이 남아 있고, 질브레타산군에는 빙하가 있다.
서유럽의 해양성기후와 동유럽의 대륙성기후의 점이지대(隷移地帶)를 이루고 있다. 동부에 있는 빈(해발고도 202m)의 1월평균기온 -1.4℃, 7월평균기온 19.9℃, 연평균기온 9.8℃, 연강수량 660㎜이다. 서쪽으로 가면서 기온이 낮아지고 비가 많아지며 중앙부인 잘츠부르크(430m)는 연평균기온 8.3℃, 연강수량 1359㎜이다. 산악지대는 알프스기후이며, 아를베르크(1220m)에서는 연평균기온 5.4℃, 연강수량 1957㎜이다. 고산지대는 기온이 더 낮고 강수량은 일반적으로 많으나, 인강 상류 계곡은 강수량 600㎜ 이하이다. 남동부는 스텝성 푄기후로 안다우에서는 연평균기온 9.7℃이나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우며 강수량 576㎜로 적다.
기후와 해발고도에 따라 1000m 미만에서는 너도밤나무를 주로 하는 활엽수림지대를 이루고, 1000m 이상에서는 가문비나무를 주로 하는 침엽수림대로 되어 있다. 그보다 위쪽은 소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수목한계는 설선보다 약 900m 낮고, 한계 부근에는 눈잣나무가 있다. 동부는 헝가리 초원의 연속으로 스텝황야를 이룬다. 숲은 광범위하게 벌채되었으나 아직도 국토의 44%를 차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지지
알프스산맥 끝부분이 그 남쪽에 이르고 있는 오버외스터라이히주는 알프스와 비슷한 지형의 경승지가 많다. 다뉴브강 사이로 북부는 보헤미아숲 남단이 체코와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주도 린츠(인구 약 22만)는 다뉴브강의 하항(河港)으로, 이 시를 중심으로 철강업·화학공업이 발달해 있다.
부르겐란트·슈타이어마르크·케른텐·니더외스터라이히의 4개 주는 농림업지역이다. 헝가리와의 국경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은 부르겐란트주에서는 밀·옥수수·야채·과일이 풍부하게 생산된다. 작곡가 F.J. 하이든이 활동한 주도 아이젠슈타트에는 그의 묘지가 있다. 슈타이어마르크주는 임업이 성하고 또 에르츠베르거의 철광석과 마그네사이트를 원료로 하는 제철업, 기계공업, 종이·셀룰로오스공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도 그라츠는 인구 약 25만의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로 상공업 중심지이다. 케른텐주 서부는 알프스지역으로 산과 호수가 많고 주도 클라겐푸르트(인구 약 8만)에서는 국제재목박람회가 열린다. 납·아연·마그네사이트도 산출된다. 수도 빈(인구 159만, 1996)에는 총 인구의 22%가 모여 있고, 니더외스터라이히주와 더불어 공업이 활발하다. 빈분지 북부에는 천연가스와 석유자원이 있으며, 다뉴브강과 그 지류로부터의 전력공급도 풍부하다.
오스트리아의 역사
고대
오스트마르크의 성립
바벤베르크가의 지배
합스부르크가 지배의 성립
결혼정책과 세계제국의 성립
종교개혁과 오스트리아
봉건반동과 계몽전제주의
1756년 프랑스와의 동맹에 성공했으나 7년전쟁(1756~1763)에서도 슐레지엔을 수복하지 못했고, 오히려 헝가리귀족과 타협해 동방에서의 러시아진출과 독일에서의 프로이센 발흥을 도운 셈이 되었다. 전중·전후의 부흥을 위해 행정·재정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 요제프 2세(재위 1765~1790) 치하인 1781년 <농노해방령>과 <관용령>을 발포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1790년 요제프 2세의 죽음으로 개혁정책도 좌절되었다.
나폴레옹전쟁과 메테르니히체제
3월혁명과 반혁명의 승리
이중제국과 그 붕괴
제1·2차세계대전과 전후(戰後)
오스트리아의 정치·외교
1999년 10월 총선에서 자유당이 급부상, 2000년 2월 극우파 자유당과 보수파 인민당의 연립정부가 국내외 비난에도 불구하고 정식 출범하였다. 새 내각 총리로 W. 쉬셀 인민당 당수가 취임했다. 최근 환경문제가 대두되면서 녹색당의 활동이 눈에 띄고 있다. 1999년 선거결과 사회민주당 65석, 인민당 52석, 자유당 52석, 녹색당 14석을 차지했다. 연방의회 의원은 빈과 8개 주에서 인구수에 비례하여 각 지방의회가 간접선거로 선출하며, 정원 64명이다. 국민의회와 연방의회 모두 법안제출권이 있고, 법안은 양원을 모두 통과해야 하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국민의회에 우선권이 있다. 선전포고 등 중대안건의 결정에는 양원 의원으로 구성되는 연방회의가 소집된다. 헌법 개정은 국민투표에 의한다.
내각은 총리·부총리 외에 대통령의 임명을 받은 국무위원으로 구성된다. 국민에게는 기본권과 자유의 권리가 있다. 그 기초는 1867년 <국가기본법>에 근거하고 있으며, 1948년 제2공화국시대에 입법화되었다. 성(性)·출생·인종·언어·신분·계급·신앙 등의 차별은 인정되지 않으며 언론·집회·결사는 법률 내에서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 각주와 빈은 역사적으로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서, 주민이 선출한 주의회가 있고 의회가 선출한 주의 장관이 행정을 집행한다.
사법권은 연방에 속해 있고, 4단계로 나뉜 보통재판소가 설치되어 있다. 그 밖에 헌법재판소와 행정재판소가 있어 위헌심사와 행정권 감독을 담당하고 있다. 외교의 기본방침은 모든 나라와의 평화적 공존을 추구하는 영세중립을 표방하고 있다. 1955년 5월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체결된 <오스트리아국가조약>으로 주권·독립을 회복하면서, 독일과의 합방과 나치즘 및 군국주의를 금지하고 인권을 존중할 것을 서약하였다. 국민의회는 1955년 10월 26일 <영세중립에 관한 법률>을 채택, <스스로의 의지로 영세중립을 지키고 어떠한 군사동맹에도 가입하지 않으며 또한 영내에 외국군의 기지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에 의거하여 정부 및 국민은 동·서의 인접국과 우호를 증진하고, 국제연합(UN)의 임무에 협력하고 있다. UN사무총장으로 발트하임이 취임하기도 하여 사무국에 요원을 보내거나 UN군에 감시단이나 구호반을 파견하는 등 분쟁해결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빈은 동·서 수뇌회담이나 각종 국제회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원자력기구(IAEA)·국제연합공업개발기구(UNIDO) 등의 본부가 있어서 1979년 국제센터를 건설하려는 도시계획이 수립되었다. 이같은 선린외교를 추진하고는 있으나 남티롤지방은 이탈리아와의 분쟁지역이다. 제1차세계대전 뒤인 1919년 이 지역은 이탈리아에 할양되었으나, 주민의 90%를 차지하는 오스트리아인에 대한 탄압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의 원인이 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뒤에는 독일어가 공용어로 되고 자치권이 부여되었으나 아직 이탈리아령으로 남아 있어, 분쟁은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군사
오스트리아의 경제·산업
이후 계속된 경제성장으로 2002년에는 국내총생산 2277억 달러, 1인당 국내총생산 2만 7900달러를 기록했다. 그 원동력은 옛 독일제국 자산의 반환에 따른 공업의 국유화와 기술혁신, 수출증대 등이었으며 그것을 뒷받침한 것은 국내의 자원과 에너지의 공급, 안정된 정치, 사회조건 등이었다.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를 취하는 한편, 기간산업은 국유화되고 있다. 국영기업은 철강, 비철금속, 기계·조선 및 전기, 석유·화학, 석탄의 6분야로 되어 있고, 오스트리아산업관리주식회사(ÖIAG)가 관리한다. 국영공업종사자는 11만 5000명, 매출액 1200억 실링이며 32%가 수출되었다(1978).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제조업은 비율은 전체 산업에서 25.7%를 나타냈으며, 농업 3.5%, 3차산업 70.9%를 나타내었다(2004). 산업별 인구 구성에서는 2001년 현재 1차산업 4%, 2차산업 29%, 3차산업 67%를 나타내고 있다. 2004년 경제활동인구는 총 342만 5000명이었고, 2004년 실업률은 4.4%를 나타내었다.
농림업
국토의 39%에 해당되는 328만 ㏊가 임야이며, 임업은 높은생산액을 올리는 중요한 산업이다. 보안림을 제외한 317만㏊가 벌채·제재의 대상이 되어, 각주에서 임업이 성하다. 그 가운데서도 슈타이어마르크주(45%)·케른텐주·포어아를베르크주는 삼림면적 비율이 매우 높다. 삼림면적의 약 1/2이 농가 소유이고, 약 1/3이 대지주 소유, 나머지가 국·공유림이다. 삼림의 84%가 침엽수림으로 가문비나무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낙엽송·젓나무·북가시나무 등이다. 임산물은 땔감으로도 쓰이나 펄프와 제지공업의 원료로 중요하다.
광업·에너지
공업
상업·무역·금융
관광업
오스트리아의 사회
독일문화와 로마가톨릭의 정신적 지주 위에 1920년에 이루어진 헌법에 의한 민주주의의 세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다. 그것은 서유럽사회가 지니고 있는 특색과 거의 같지만 사회복지·사회보장 등에서는 진보한 나라의 하나이다. 이같은 제도는 19세기 후반 제정시대에 시작되어 제1차세계대전 뒤의 변혁으로 진보하였다가 제2차세계대전 뒤에 마무리되었다. 노동관계에서는 노동기본법이 제정되어, 주 40시간 노동을 법제화한 데 따르는 임금, 유급휴가, 소년·여성의 노동 등이 법률로 규정되어 있다. 국민은 또 건강·재해·실업·연금의 각 보험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다. 신체장애자와 전쟁희생자에 대한 배려, 아동양육을 위한 가족수당 지급, 지방자치단체가 세운 연금생활자 숙소, 긴급아동보호소 설치, 보건위생센터, 병원, 온천요양소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국가의 보조를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회복지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1972년 연방보건환경보호부가 설치되었다.
교육제도는 6~15살까지 총 9년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그 뒤에는 중학교나 공과과정(工科過程)의 상급학교에 진학하며, 그 위에 2~4년의 직업학교·중급교원양성소가 있다. 또, 기초학교 4년에 이어 일반교육을 실시하는 중·고등학교 9년제가 설치되어 있다. 종합대학·단과대학은 이들 위에 있으나,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처럼 직업선택과 학습능력에 따라 교육은 복선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스포츠는 겨울철의 스키와 회원 20만이 넘는 축구가 가장 인기 있으며, 스키·스케이트·등산은 국민스포츠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주민의 98%가 독일계로,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어는 부르겐란트주에서, 슬로베니아어는 케른텐주 남부에서, 마자르어는 부르겐란트 및 빈에서, 체크어는 빈에서 각각 조금씩 사용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인은 게르만민족에 속하지만 빈이 유럽의 정치·문화의 중심도시였기 때문에 현재 독일 게르만민족들과는 다른 국제성과 낭만적 정서를 지니고 있다.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가톨릭교는 연중행사·풍속·습관에 뿌리박고 있다. 몸짓이나 예의범절, 인간관계에도 가톨릭적인 것이 남아 있으며, 지방풍속에는 보수성이 짙다. 로마가톨릭 신자가 전인구의 90%를 차지하며 프로테스탄트나 유대교 신자가 약간 있다.
음악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예술로서, 독일음악을 기초로 슬라브와 헝가리의 민속음악적 요소를 가미한 밝은 선율을 특징으로 한다. 빈을 중심으로 활동한 음악가로는 C.W. 글루크·하이든·W.A. 모차르트를 비롯해 L. 베토벤·F.P. 슈베르트·J. 브람스·G. 말러·A. 쇤베르크·A. 베베른 등 서양음악사의 대표적인 음악가들을 들 수 있다. 특히 빈왈츠를 완성시킨 J. 슈트라우스 2세의 곡은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빈국립오페라극장은 오페라 역사를 장식하는 수많은 무대를 탄생시켰다. 그것을 지탱한 것은 궁정과 귀족의 후원과 시민들의 참여였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1786 초연)》은 부르크극장에서 초연되었으나, 19세기 후반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창조적 연주를 보인 것은 말러·R. 슈트라우스 등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해서 파괴된 오페라극장은 2억 6500만 실링을 들여 재건하여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상연하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그 연주는 K. 뵘·H. 카라얀·힐베르트 등으로 계승되었다. 빈에는 수많은 음악학교가 있고 그 정점에 음악·연극아카데미가 있다. 여러 음악제·예술제 가운데서도 1920년 시작된 잘츠부르크예술제와 헤르부른축제가 유명하다. 새로 시작된 것으로는 브레겐츠예술제가 있는데, 호수 위에 무대를 꾸며 오페라나 발레를 상연하고 있다.
국토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각지에 로마시대의 유적이나 교회·수도원·왕궁·성채 등 역사적 기념물이 많아 박물관으로 이용되거나 순례지나 관광지로 되어 있다. 건축양식으로는 로마네스크·고딕·르네상스·바로크 등이 있다. 고딕건축의 대표적인 거물은 빈에 있는 성(聖) 슈테판대성당으로 1304년 건축되었는데, 제2차세계대전으로 피해를 입었으나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보수되었다. 바로크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는 빈 교외에 있는 쇤브룬궁전과 다뉴브강변 단구 위에 있는 멜크수도원이다. 잘츠부르크 구릉에 우뚝 솟아 있는 호엔잘츠부르크성은 11세기에 착공된 성채이다. 이러한 건축물과 함께 회화·조각·가구·조원(造園) 등의 예술·기예(技藝)가 발달하였고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근대미술 및 건축의 새로운 경향을 시도한 사람들도 나타났다. G. 클림트·E. 실레·O. 코코슈카 등의 현대화가들은 독특한 화면을 이루어내었다. 빈의 서민적 희극을 토대로 극작을 한 F. 그릴파르처, 오페라 《장미의 기사》 등을 슈트라우스와 합작한 H. 호프만슈탈을 비롯해 A. 슈니츨러·F. 카프카 등은 세기말과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학술 수준도 높아서, 평화상을 받은 2명은 별도로 치더라도 생리학·의학·물리학·화학·경제학에 걸쳐 14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유전학 G.J. 멘델, 심리학 S. 프로이트, 인류학 W. 슈미트, 지질학 E. 쥐스, 경제학 A. 멩거 등은 큰 공헌을 한 학자들이다. 빈대학을 비롯해 12개 종합·단과대학이 있으며, 6개 예술대학이 있다. 박사과정 수료자의 연구기관으로는 빈고등학술연구소(사회과학), 빈외교아카데미가 있다. 학술의 최고결집체는 1847년 창립된 오스트리아학사원과 1960년 창립된 루트비히볼츠만협회가 대표적이다. 또, 동·서 13개국이 국제기관으로 설립한 국제응용시스템연구기관 등 수많은 연구·정보센터가 있다.
오스트리아와 한국과의 관계
연표
750 | 초기철기시대, 할슈타트문화(~BC 400) | |||
150 | 켈트인, 노리쿰왕국 창건 | |||
BC | 15 | 로마, 노리쿰을 속주로 삼음 | ||
AD | 100 | 로마의 성채로 빈도보나 건설. 빈의 기원 | ||
435 | 훈족의 왕 아틸라의 지배(~453) | |||
791 | 카를 1세 아바르족 정벌. 오스트마르크 설치(~796) | |||
955 | 오토 1세, 마자르인 격퇴 | |||
962 | 신성로마제국 성립 | |||
976 | 오스트마르크를 변경백(邊境伯) 영지로 삼아 바벤베르크가에 봉토로 줌 | |||
1077 | 성직서임권 투쟁(~1122) | |||
1156 | 황제 프르드리히 1세, 오스트리아를 세습공령으로 승격시킴 | |||
1192 | 오스트리아공령에 슈타이어마르크공령을 합병 | |||
1246 | 오스트리아 대공위시대(~73) | |||
1251 | 보헤미아왕 오토카르 2세, 빈 점령 | |||
1273 | 합스부르크백작 루돌프 1세, 독일황제로 선출됨 | |||
1278 | 루돌프 1세, 오토카르 2세를 패사시킴 | |||
1282 | 루돌프 1세, 아들들에게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를 다스리게 함.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 지배가 시작됨 | |||
1291 | 스위스독립전쟁 시작됨 | |||
1356 | 룩셈부르크가 황제 카를 4세, 금인칙서(金印勅書) 내림 | |||
1438 | 합스부르크가 알브레히트 2세, 황제가 됨 | |||
1477 | 합스부르크가 막시밀리안 1세, 부르군트 공주와 결혼 | |||
1496 |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필립, 에스파냐왕녀와 결혼 | |||
1515 |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페르디난트 1세, 보헤미아-헝가리왕녀인 안나와 결혼 | |||
1519 | 황제 카를 5세(~56), 합스부르크제국 실현 | |||
1521 | 합스부르크가, 에스파냐계와 오스트리아계로 분립 | |||
1526 | 모하치 싸움에서 보헤미아-헝가리왕 라요시 2세 패사.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헝가리 두 왕국 상속 | |||
1529 | 오스만투르크(제국), 제1차 빈 포위 | |||
1555 |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和議) | |||
1556 | 페르디난트 1세, 황제 등극 | |||
1618 | 30년 전쟁(~48) | |||
1667 | 루이 14세 침략전쟁(67~68 플랑드르, 72~78 네덜란드, 88~97 프팔츠) | |||
1683 | 오스만투르크(제국), 제2차 빈 포위 | |||
1699 | 카를로바츠 화약(和約), 오스트리아·헝가리 전토 확보 | |||
1701 | 에스파냐계승전쟁(~14) | |||
1713 | 카를6세,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 제정 | |||
1740 | 마리아 테레지아 즉위, 오스트리아계승전쟁(~48) | |||
1756 |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동맹에 성공. 7년 전쟁(~63) | |||
1781 | 요제프 2세, 농노제폐지령과 관용령 발표 | |||
1789 | 프랑스혁명 일어남 | |||
1804 | 나폴레옹, 황제에 추대됨. 프란츠 1세, 오스트리아황제가 됨 | |||
1806 | 독일 황제 프란츠 2세, 신성로마제국 붕괴 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남 | |||
1810 | 나폴레옹, 합스부르크가 마리아 루이자와 결혼 | |||
1814 | 빈회의(~15). 그뒤로 K.W.N.L 메테르니히 반동체제 이어짐 | |||
1848 | 프랑스 2월 혁명. 독일·오스트리아 3월 혁명 | |||
1851 | 반혁명 승리로 신절대주의 바흐체제 출범 | |||
1859 | 이탈리아통일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패전 | |||
1860 | 10월칙서 | |||
1861 | 2월헌법 | |||
1866 |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참패 | |||
1867 |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제국 성립 | |||
1871 | 포로이센-프랑스전쟁 끝남. 독일제국 성립 | |||
1879 | 독일-오스트리아동맹, 82년 이탈리아를 가입시켜 3국동맹 성립 | |||
1888 | 오스트리아사회민주당 결성 | |||
1891 | 러시아-프랑스 동맹 | |||
1904 | 영국-프랑스협상 | |||
1907 | 보통선거제 실지 | |||
1909 | 영국-러시아협상, 그 뒤 3국협상 결성됨. 오스트리아사회민주당에서 체코슬로바키아사회민주당 분당 | |||
1914 | 사라예보사건, 제1차세계대전 일어남(~18) | |||
1918 | 합스부르크가 황제 카를 1세 퇴위. 오스트리아공화국 성립 | |||
1919 | 생 제르맹조약에 따라 합스부르크제국 해체 | |||
1932 | 기독교사회당 C.E. 돌푸스내각 성립 | |||
1938 | 독일-오스트리아 합방 | |||
1939 | 제2차세계대전 일어남(~45) | |||
1945 | 소련군, 빈 점령. 4개국점령시대 이어짐 | |||
1955 | 오스트리아국가조약 조인. 영세중립국으로 주권회복 | |||
1972 | 유럽공동체(EC)와의 자유무역협정 조인 | |||
1983 | 총선거에서 사회당 단독과반수 얻음 | |||
1986 | 사회당 K. 발트하임내각 성립. | |||
1989 | EC 가입 | |||
1992 | T. 클레스틸 대통령 취임 | |||
1995 | EU 가입 | |||
1998 | T. 클레스틸 대통령 재선 | |||
2000 | 극우파 자유당과 보수파 인민당 연립정부 공식 출범 |
'여행 > 동유럽_폴란드외 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스트리아_슈타트파크(비엔나) (0) | 2006.09.01 |
---|---|
오스트리아_쉔부른 궁전(비엔나) (11) | 2006.09.01 |
헝가리_부다페스트 야경 (2) | 2006.08.29 |
헝가리_어부의 요새에서(부다페스트) (1) | 2006.08.28 |
헝가리_영웅광장과 겔레르뜨 언덕 (0) | 2006.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