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동유럽_폴란드외 4'에 해당되는 글 23건

  1. 2006.09.21 동유럽_이삭줍기
  2. 2006.09.17 동유럽_여행에서 만난 사람 사람들
  3. 2006.09.15 체코_프라하 소경 -The end-
  4. 2006.09.14 체코_프라하 카를교
  5. 2006.09.13 체코_프라하성, 황금소로 등
  6. 2006.09.10 체코_프라하 야경 1

기존의 연작에서 빠진 사진

그러나 버리기에는 아까운 사진 중에서 고른 몇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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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짤즈부르그 - 카라얀의 생가는 보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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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812-6426

폴란드크라코프 바벨성 주변

크라코프 보러가기 http://blog.paran.com/landartpa/11239820



060812-6450

폴란드 크라코프 중앙광장

- 그들의 과감하면서도 자연스런 애정행각(?)은 우리 눈에는 낯설지만..



060815-6890

오스트리아 비엔나

- 빨간 조각 같은 것은 사람이다.

비엔나 보러가기 http://blog.paran.com/landartpa/12001117



060815-7004

오스트리아 비엔나 '호이리게' 저녁 식사

- 귀에 익은 서양음악으로 시작하여 먼 이국에서 듣는 우리 음악

일행은 박수에서 노래, 이어 자연스럽게 언제부터 그렇게 놀았던것 처럼 땐스까지 춰가며

놀았다. 그렇게 아껴쓰는 외화도 띺으로 팡팡 줘가며...



060816-7340

오스트리아 짤즈부르그

- 거리의 음악가들, 우리가 말하는 딴따라 하기에는 너무도 진지하고도 듣기 좋은 선율은 그렇게 바쁜 걸음도 잠깐씩

잡아 놓았다.

짤즈부르그 보러가기 http://blog.paran.com/landartpa/12101337



060816-7348

짤즈부르그 - 300년이 되었다는 카페

- 저기서 한잔을 해야 여기 온 기념이 되고 한격은 오른다는 가이드의 단언(?)에 기웃 거려는 보지만

거리쪽 좌석은 택도 없도 처마 밑 구석에만 앉아도 그저 좋아서...

그 피같은 외화를 과감히 내밀고 커피 한잔을 시켜 보지만...마음은 바쁘고 맛은 왜 또 그런 지...



060816-7366

짤쯔부르그- 모차르트 생가 앞

-왜 그리 사람이 많은 지, 평일 인데도 넘쳐 나는 사람 사람들...

그래도 그안에 낭만이 녹아 있고 저절로 흥이 나는 것은...



060817-7593

체스키크롬로프

- 바로 옆을 흐르는 블타강가에서의 물놀이, 그런 깨끗함과 함께하는 그들이 부러웠다.

폐수, 똥물은 다 어디 간것이여..도대체...

블타강 보러가기 http://blog.paran.com/landartpa/12136592



060818-7991
프라하-크롤교를 거니는 사람들

- 사람들로 꽉 찾다. 보이는 모든 것이 재미고 낭만이다.

하루 한나절쯤 그들과 함께 놀고 싶었는 데...

크롤교 보러가기 http://blog.paran.com/landartpa/1225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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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18일




가운데 빨간 지붕이 유대인 영결식장이다. 그 뒤에 아래의 공동묘지가 있다.

제한된 공간속에 매장을 해야했던 관계상 20-30층씩 중복해서 매장하다 보니, 이렇게 지금은 미석들만 조밀하게 서있다. 슬픈 모습이다. 이해가 안되는 분은 영화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짜르트가 매장되는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것이다.



유태인 지구

이 곳은 8세기부터 프라하에서 시작되는 유태인들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대표적 장소이다. 프라하 유태인 지구의 역사는 8세기 국왕 호스티비트가 유랑하는 유태인들에게 거주지를 내주면서 시작되었다. 공식적 자치를 허용한 것은 1650년대로 30년 전쟁 때 클레멘티눔의 예수회 수사와 연합하여 스웨덴 군대를 물리친 공로로 자치가 허용되었다. 몇 개의 시나고그Sinagoga와 유태인 묘지, 그리고 유태인 민가 등이 남아 있다. 1541년과 1744년 보헤미아 지역으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유태인들은 곧 프라하로 모여들게 되었고, 시나고그를 중심으로 그들의 생활권이 집중되었다. 6만 명이나 되던 유태인들이 히틀러 점령 이후 겨우 2,500여 명밖에 살아 남지 못했다고 한다.
이 곳에 지금 극소수의 유태인만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 곳 유태인 협회 건물에 시계가 두 개 있는데 한 개의 시계는 로마 숫자, 다른 것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어 비교하며 보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유태인의 대부분은 이 지구의 다른 사람들과는 격리되어 살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이 지역은 유럽 최대의 유태인 주거지로 유명했다. 구 시가지의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목조나 석조 건물이 대부분이며 생활 습관에도 프라하 시민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듯 싶다. 그러나 비 위생적이면서도 인구 밀도가 높았던 유태인 지구는 20세기 초엽에 정비되어 지금은 다른 지역과 별다른 위화감이 없는 거리로 탈바꿈하였다. 재미있는 볼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유태인의 수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여행자이거나 종교적인 믿음을 가진 여행자라면 들러 볼 만 하다.



카를교 다리 밑



카를교 주변 카페

사진을 찍어달라고 제스춰를 취해주는 그들의 여유가 보기 좋았다.



카를교 주변







쌍둥이 첨탑이 인상적인 틴 교회(Tynsky Chram)
고딕 양식의 교회로 세 개의 측면 복도가 있으며 쌍둥이 첨탑의 높이는 80m이다. 교회안에는 16~17C에 프라하의 황제 루돌프 2세의 레지덴스에 머물렀던 덴마크 천문학자 Tycho de Brahe의 무덤이 있다.



프라하 구시가의 상징과도 같은 구시청사의 천문시계
블타바 강 오른쪽 지구인 '구시가광장'에 있는 구시청사는 전형적인 고딕양식의 건물로, 건물벽에 붙어 있는 천문시계가 유명하다. 현재는 건물이 2차 세계대전때 파손되고 천문시계가 있는 70m의 탑만 남아있는데, 매 시간마다 정확히 울리는 천문시계는 천동설에 기초한 두개의 원이 나란히 돌아간다. 또 이곳 안에는 프라하시민들이 결혼식장으로 이용하는 작은 예배당과 탑내부에 후스파 사람들이 수용된 적이 있는 감옥도 있다.


매시각마다 한번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시간을 알리는 이 시계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끊이지 않고 몰리는데, 두개의 원반위에 있는 천사의 조각상 양 옆으로 창문이 열리고, 죽음의 신이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12제자가 창 안쪽으로 천천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시계의 위쪽에 있는 닭이 운다. 이 시계의 제작자에 대해서는 시계 제작의 거장이었던 미쿨라슈가 만들었다는 것과 15세기경 프라하의 천문학자이자 수학교수였던 하누슈가 만들었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누슈가 만들었다는 설에 대해서는 또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의 손재주를 시샘한 누군가가 그의 한쪽눈을 멀게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계를 지키다 쓸쓸히 병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한때 이 시계도 움직임을 멈췄는데, 이후 몇번의 수리와 1948년에 설치된 전동장치에 의해 지금까지 그 아름답고 신기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18세기의 바로크식 건축물, 성 미쿨라셰 교회(Sv. Mikulase Chram; 영어로는 성 니콜라스 성당)
이 교회는 구시가광장에 위치한 1732-1735년에 건축된 바로크식 건물이다. 얀 후스 동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구시가지 광장에는 이 성 미쿨라셰 교회와 틴 교회, 각종 레스토랑과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곳은 1920년에 탄생한 후스파 교회로 현재 사용되고 있으며 고전 음악회도 열린다.




프라하의 심장부, 구시가지 광장
구시가지 광장은 10세기 이래 늘 프라하의 심장부와 같았던 곳으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이자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각종 건축양식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장이기도 하다. 이 곳은 특히 낮과 밤 가릴 것없이 계속되는 활기찬 분위기와 프라하 역사에 길이 남을 주요사건들의 발생지로써 더욱 잘 알려져 있다. 1422년에 행해진 성직자 Zelivsky의 처형장소이자 1918년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 등을 벌인 애환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집들에 반쯤 가려 광장 쪽을 바라보고 있는 건물이 구시가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는 틴교회이다. 또한 광장의 중앙에는 보헤미아 독립운동의 투사인 보얀 후스(Jan Hus)의 동상이 서 있는데 동상에는 나찌에 의해 만자 십자상이 새겨져 있고 "프라하의 봄"이 끝나가는 것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검은색 휘장이 둘러져 있다.








해그림/김명희 작

구시가지의 상징, 천문시계
카를 다리에서 화약탑 까지의 블타바 강 오른쪽 지구인 '구시가광장'에 있는 구시청사는 전형적인 고딕양식의 건물로, 건물벽에 붙어 있는 천문시계가 유명하다. 1437년에 제작된 이 천문시계는천동설에 기초한 두개의 원이 나란히 돌아간다.

매시각마다 한번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시간을 알리는 이 시계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끊이지 않고 몰리는데, 두개의 원반위에 있는 천사의 조각상 양 옆으로 창문이 열리고, 죽음의 신이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12제자가 창 안쪽으로 천천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시계의 위쪽에 있는 닭이 운다. 이 시계의 제작자에 대해서는 시계 제작의 거장이었던 미쿨라슈가 만들었다는 것과 15세기경 프라하의 천문학자이자 수학교수였던 하누슈가 만들었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누슈가 만들었다는 설에 대해서는 또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의 손재주를 시샘한 누군가가 그의 한쪽눈을 멀게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계를 지키다 쓸쓸히 병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한때 이 시계도 움직임을 멈췄는데, 이후 몇번의 수리와 1948년에 설치된 전동장치에 의해 지금까지 그 아름답고 신기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귀국

체코 프라하 공항

동유럽 여행기 일자별 기록은 여기까지 입니다.

다음 부터는 주제별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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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87GfE07QZdc

 

 

2006년 8월 18일

아름다운 프라하의 휴식처, 카를교(Karluv most)
 
프라하에 오는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유명 관광지로 12세기에 이미 목제교가 같은 위치에 있었으나 강이 번람할 때 붕괴되어 12세기 중엽에 석재교로 대체되었다.이 석재교 또한 강물로인해 붕괴되어 1357년 카를4세 때 교회 건축가인 피터 팔레지(Petr Parler)가 다시 건축하여 1402년 완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16m의 길이에 16개의 기둥과 3개의 브릿지 타워가 있다. 구시가지 브릿지 타워는 많은 조각상으로 인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브릿지 타워로 꼽히고 있다. 바로크 시대(18C)에 만들어진 30개의 조각상이 다리를 장식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가치있는 조각상은 Matyas Braun과 E. M. Brokoff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카를교 (-橋 Karl Bridge)

요약

체코 프라하에 있는 다리. 길이 500m.
 

설명

체코 프라하에 있는 다리. 길이 500m. 블타바강에 걸려 있는 돌다리로 보헤미아왕 카를 4세 때 가설되어 이 이름이 붙여졌다. 난간에는 상인들의 석상이 세워져 있고 다리 양끝에 탑이 있다. 강을 중심으로 서쪽의 왕성(王城)과 동쪽 상업지역을 잇는 다리이며 관광명소이다.
 

 

강 서쪽의 왕성(王城)과 동쪽의 상인거주지를 잇는 최초의 다리로 보헤미아왕 카를 4세 때(1346∼1378)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겼다. 후에 양쪽 난간부에 상인들의 석상을 세웠고, 다리 양쪽에는 탑이 있는데 그 사이의 다리 길이는 약 500m이다.
 
다리 서쪽은 칸파라고 하는 작은 운하가 있는 지구로 소(小)베네치아라고도 한다. 프라하의 관광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김미연 작

 

베스트샷http://landart.tistory.com/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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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18일


호텔에서 본 프라하 일출

프라하의 봄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 이 운동을 막기 위하여 불법침략한 소련군의 군사개입사건을 포함하여 ‘체코사태’라고도 한다. 1956년 소련 내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있은 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주의자 노보트니 정권의 보수정책이 계속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의 민주 ·자유화의 열망이 점차 고조되어 갔으나, 노보트니 정권은 이를 외면한 채 소련만을 추종하였다.

1960년대 이에 반발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식층이 중심이 되어 민주·자유화의 실현을 위한 조직적인 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 물결에 밀려 마침내, 1968년 1월 노보트니 당 제1서기가 물러나고, 개혁파의 둡체크가 당 제1서기를, 체르니크가 수상을, 온건파 스보보다가 대통령직을 각각 맡았다.

이들 개혁파는 1968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중앙위 총회에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즉 민주·자유화노선을 제창하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 내용은 재판의 독립, 견고한 의회제도의 확립, 사전검열제의 폐지, 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언론 ·출판·집회의 자유보장, 국외여행 및 이주의 자유보장, 경찰정치의 부활저지, 경제계획의 추진,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동등한 권리에서의 연방제로의 이행, 자주독립에 대한 대외정책 추진 등이다.

따라서 사실상 검열제가 폐지되고 많은 정당 ·정치단체가 부활되었으며, 의회는 활발한 논의와 비판의 광장이 되었다.

이러한 자유화를 위한 정책적 변화가 있자 온 국민은 ‘프라하의 봄’이라 하여 공산체제로부터의 탈바꿈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체코사태가 동유럽 공산국가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이 체제변화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불법으로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1968년 8월 20일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조약기구 5개국군 약 20만 명을 동원하여 침공함으로써, 이 자유화운동을 일시에 저지하고, 개혁파 주도자들을 숙청하였다. 1969년 4월 소련은 둡체크를 강제 해임시키고 후임 서기장에 후사크를 임명하였으며, 개혁파를 추종한 50여만 명의 당원을 제명 또는 숙청하였다.




요즘 출타중이신 각하도 그러시지만
외국에 나가면 가끔 으쓱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먼 이국에서 보는 우리 기업의 광고입니다.
이제는 구석, 한쪽이 아니라..
쎈터, 전면으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
광고을 전혀 허용치 않는 덴마크 여왕광장에도 유일하게 *성의 광고는 버티고 있고,
러시아에 중요 교량을 건설하고 광고로 활용 후 기부키로 한 *G...

여기는 프라하성을 오르는 길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오르는 길...
그길의 광고판 전부를 1년간 계약했다 합니다.
얼마전까지는 '세계의 *성'이라고 광고하는 통에 한국기업인 줄을 몰랐는 데
올립픽,월드컵을 거치며 '한국 *성'이라고 광고를 하여 이제는 많이 한국기업임을 안다 하더군요.
전자제품을 잘만드는 첨단을 걷는 나라 한국으로 이미지 매겨지고 있고
우리의 휴대폰은 고급이고 모두가 가지고 싶은 제품이라 합니다.

이제는 물건 하나만 좋으면 시장이 세계인 거 같습니다.
순식간에 '왕대박 !' 그런 가능성을 보고 조국의 희망이 보여 좋았습니다.



해그림/김명희 작




해그림/김명희작





프라하성

체코를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이자,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성이다. 9세기 말부터 건설되기 시작해 카를 4세 때인 14세기에 지금과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고, 이후에도 계속 여러 양식이 가미되면서복잡하고 정교한 모습으로 변화하다가 18세기 말에야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프라하 구시가지의 블타바강(江) 맞은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길이는 570m, 너비는 128m이며, 9세기 이후 통치자들의 궁전으로 사용된 로브코위츠 궁전 외에 성(聖)비투스대성당·성조지바실리카·성십자가교회 등 3개의 교회와 성조지수도원 등 다양한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건설될 당시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3세 중엽에 초기 고딕 양식이 첨가되고, 이어 14세기에는 프라하 출신인 카를 4세에 의해 왕궁과 성십자가교회 등이 고딕 양식으로 새롭게 건축되면서 이 때부터 체코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그 뒤 블라디슬라프 2세 때 후기 고딕 양식이 가미되고, 1526년 합스부르크왕가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다시 르네상스 양식이 도입되었다. 그러다 바로크시대인 1753년부터 1775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는데, 시작에서 완성될 때까지 900년이나 걸렸다.

1918년부터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면서 내부 장식과 정원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왕궁뿐 아니라 성 안에 있는 모든 건축물들이 정교한 조각과 높이 솟은 첨탑, 화려하고 다채로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어 유럽에서도 중요한 역사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프라하뿐 아니라 체코·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명소이며, 특히 성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성 비투스 성당(St Vitus Cathedral)

총길이 124m, 폭 60m, 천장 높이 33m, 탑높이 100m의 프라하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건축물중 하나로 현재 대통령궁으로 쓰이고 있는 프라하성곽안에 위치해 있다. 교회의 건축이 시작된 것은 600여년전인 1344년이나 증개축이 계속되어 체코 역사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29년이다. 또 성당이 완성되었을 때는 초기 비투스 성당의 최초 설립자이자 보헤미아의 수호성인인 웬체슬라스 왕자 사망 1,000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성당의 서쪽입구 청동문에 이 교회의 역사에 대해 묘사되어 있고, 오랜 세월에 걸쳐 건축되어서인지 건물은 중세의 고딕양식을 바탕으로 여러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며 점차적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것을 볼 수 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내부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천부적 재능의 체코 예술가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황금소로(Zlata ulicka)
16세기의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거리로 후기 고딕으로 지어진 프라하 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있는 좁은 길이다. 동화에 나올법한, 허리를 굽혀야 겨우 들어 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길인데, 원래 이곳은 성에서 일하던 집사와 하인들이 살던 곳이었으나 이후 연금술사들이 모여 살면서 황금 소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하지만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그 집들 사이에 있는 22번지가 실존주의의 대표적 작가인 카프카가 작품을 집필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벌써 500년 이상이 지났지만 이곳은 여전히 16C 옛날 모습 그대로의 거리 모습을 보전하고 있고, 이제는 서점, 레코드 가게, 기념품점과 같은 상점들이 들어서 있어 손님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프란츠 카프카

체코의 수도 프라하 출생. 부유한 유대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폐결핵으로 41세의 생애를 마쳤다. 평범한 지방 보험국 직원으로 근무하였으며, 카프카문학의 독자적인 세계도, 그가 죽기 직전 2개월간의 요양기간과 짧은 국외 여행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떠나지 않았던 프라하의 유대계 독일인이라는 특이한 환경의 소산이다. 독일계 고등학교를 거쳐 프라하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그 사이 훗날 카프카 전집의 편집자가 된 M.브로트를 알게 되어 문학에 대한 정열이 더욱 뜨거워져 단편 《어떤 싸움의 기록 Beschreibung eines Kampfs》(1905) 《시골의 결혼 준비 Hochzeitsvorbereitungen auf dem Lande》(1906) 등을 썼다.

1906년에 법학박사의 학위를 받았고 법률 실습 등을 거쳐, 1908년부터 노동자재해보험국에서 1922년 7월까지 근무하면서, 잡지 《휴페리온》에 8편의 산문을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1912년 초에 《실종자》(후에 《아메리카》로 改題, 1927년 간행)를 착수하였고, 9월에 《심판 Der Prozess》(1925년 간행), 연말에 《변신(變身) Die Verwandlung》(1916년 간행)을 써서, 이 해는 최초의 중요한 결실기가 되었다.

1914년에 《유형지에서 In der Strafkolonie》(1919년 간행)와 《실종자》를 완성하였고, 1916년에는 단편집 《시골 의사 Ein Landarzt》(1924년 간행)를 탈고하였다.

1917년 9월,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아, 여러 곳으로 정양을 겸하여 전전하였고, 그 동안에 장편소설 《성(城) Das Schloss》(1926년 간행) 《배고픈 예술가 Hunger Künstler》(1924년 간행)를 비롯한 단편을 많이 썼다. 1924년 4월 빈 교외의 킬링 요양원에 들어가, 6월 3일 그곳에서 죽었고, 1주일 후 프라하의 유대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은 카프카 문학의 의의 ·문제성은, 무엇보다도 인간 운명의 부조리성, 인간 존재의 불안과 무근저성을 날카롭게 통찰하여,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한 점이다

카프카가 집필했던 22번가









프라하성에서 내려 본 프라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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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17일


동유럽의 파리, 프라하

체코의 수도이며, 수많은 역사를 간직한 신비스러운 고도이며, 작은 골목하나에도

중세의 향기가 배어있다. 또 시내 곳곳에는 로마네스크 양식, 고딕양식, 르네상스양식,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남아있다. 프라하에는 시대를 망라한 수많은 중요한 건축물들이

즐비할 뿐만 아니라 1992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과학 유산으로 지정된 역사적 유산이

있는 역사의 중심지이다. 프라하는 EU가 지정한 2000년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명명된

9개의 도시중 하나이기도 하다.


체코에는 또한 카프카와 쿤데라를 비롯한 위대한 작가들도 많이있다. 문화유산을 볼 때에도

드보르작과 스메타나를 비롯하여 수많은 작곡가를 낳은 나라 체코에는 지금도 음악이 번창

하여 체코인이라면 눈구나 음악가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다. 체코를 직접 여행하게 되면

한 번 정도는 직접 콘서트를 감상하면서 체코인들의 음악열기를 느껴보자.









프라하의 야경의 상징, 프라하 성(Prazsky Hrad)
프라하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프라하성은 9세기에 이미 교회가 있던 자리였다. 11-12세기에는 로마네스크 바실리카 교회가 성 비타 로툰다를 대체하기 위해세워졌고 이어 성 조지 교회가 재건되었다. 특히 같은 시기에 외각의 돌담이 축성되어 성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예전에 체코 왕이 살았던 곳으로 1918년 체코 대통령의 거주지가 되었다. 로얄 정원과 남쪽 정원, 갤러리, 앤 여왕의 여름 별장은 여름에 개방한다.










김미연 작


해그림/김명희 작



아름다운 프라하의 휴식처, 카를교(Karluv most)

프라하에 오는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유명 관광지로 12세기에 이미 목제교가 같은 위치에 있었으나 강이 번람할 때 붕괴되어 12세기 중엽에 석재교로 대체되었다.이 석재교 또한 강물로인해 붕괴되어 1357년 카를4세 때 교회 건축가인 피터 팔레지(Petr Parler)가 다시 건축하여 1402년 완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16m의 길이에 16개의 기둥과 3개의 브릿지 타워가 있다. 구시가지 브릿지 타워는 많은 조각상으로 인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브릿지 타워로 꼽히고 있다. 바로크 시대(18C)에 만들어진 30개의 조각상이 다리를 장식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가치있는 조각상은 Matyas Braun과 E. M. Brokoff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프라하 구시가의 상징과도 같은 구시청사의 천문시계
블타바 강 오른쪽 지구인 '구시가광장'에 있는 구시청사는 전형적인 고딕양식의 건물로, 건물벽에 붙어 있는 천문시계가 유명하다. 현재는 건물이 2차 세계대전때 파손되고 천문시계가 있는 70m의 탑만 남아있는데, 매 시간마다 정확히 울리는 천문시계는 천동설에 기초한 두개의 원이 나란히 돌아간다. 또 이곳 안에는 프라하시민들이 결혼식장으로 이용하는 작은 예배당과 탑내부에 후스파 사람들이 수용된 적이 있는 감옥도 있다.


매시각마다 한번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시간을 알리는 이 시계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끊이지 않고 몰리는데, 두개의 원반위에 있는 천사의 조각상 양 옆으로 창문이 열리고, 죽음의 신이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12제자가 창 안쪽으로 천천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시계의 위쪽에 있는 닭이 운다. 이 시계의 제작자에 대해서는 시계 제작의 거장이었던 미쿨라슈가 만들었다는 것과 15세기경 프라하의 천문학자이자 수학교수였던 하누슈가 만들었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누슈가 만들었다는 설에 대해서는 또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의 손재주를 시샘한 누군가가 그의 한쪽눈을 멀게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계를 지키다 쓸쓸히 병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한때 이 시계도 움직임을 멈췄는데, 이후 몇번의 수리와 1948년에 설치된 전동장치에 의해 지금까지 그 아름답고 신기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쌍둥이 첨탑이 인상적인 틴 교회(Tynsky Chram)
고딕 양식의 교회로 세 개의 측면 복도가 있으며 쌍둥이 첨탑의 높이는 80m이다. 교회안에는 16~17C에 프라하의 황제 루돌프 2세의 레지덴스에 머물렀던 덴마크 천문학자 Tycho de Brahe의 무덤이 있다.







김미연 작







체코

중세 유럽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 프라하에 대한 찬사는 무척 화려하다. ‘북방의 로마’·’유럽의 심장’·’흰 탑의 황금 도시’·’유럽의 음악원’ 등이 프라하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모차르트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다는 도시, 프란츠 카프카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는 마력의 도시 프라하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어느 시점에 시간이 멈춘 것 같다.

프라하는 천 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도시다. 역사가 길면 사연도 많은 법이다. 12세기에 이미 중부유럽 최대 도시의 하나로 성장했고,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된 14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15세기에는 후스전쟁의 싸움터가 되었고, 17세기에는 최대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이 이어졌다. 2차에 걸친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혁명,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1968년 자유주의운동과 구 소련군의 탱크 공세까지, 프라하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런 굴곡 많은 역사를 생각할 때 도시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들 한다. 오랜 세파를 이겨낸 프라하는 1989년 무혈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동유럽이 개방되자 유럽 최대의 관광도시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1992년에는 구시가를 중심으로 프라하 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프라하는 음악의 도시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음악가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이 프라하 출신이며, 모차르트는 자기 음악을 가장 잘 이해하는 곳이 프라하라고 말했다. 지금도 프라하 사람들의 음악사랑은 남다르다. 유명한 ‘프라하의 봄’은 사실 매년 5월~6월 사이에 열리는 체코 최대의 음악축제 이름이었다. 1968년 체코의 자유주의정권 시대를 이 음악축제에 빗대어 쓴 신문기사 덕분에 지금은 체코 자유주의 운동의 대명사가 되었다.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군이 수백 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진격해왔기 때문에 자유주의 정권은 불과 8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지금도 ‘프라하의 봄’ 축제는 계속되고 있으며, 봄이면 많은 이들이 이 축제를 보려고 프라하를 찾는다.

천년 고도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채워져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부터 초·중·후기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아르누보 양식까지 그야말로 건축양식의 역사를 보는 듯하다. 카프카의 소설 《성》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프라하 성은 궁과 교회, 성당 등이 어우러진 건물들의 집합체로 9세기경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매일 낮 12시에 열리는 위병 교대식과 장엄한 성 비투스 성당이 특히 시선을 끈다. 구시가 광장은 11세기 이래 시장이 들어섰던 삶의 터전이면서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화형, 1948년 공산주의 혁명의 발발 등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광장 주변에는 중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주거지와 구 시청, 틴 교회, 킨스키 궁전 등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많다. 특히 구 시청 건물의 천문시계가 유명한데, 매 시 정각이 되면 시계 위의 조그만 창문에서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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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and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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