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 15일




요한스트라우스 황금동상







호이리게 저녁식사

귀에 익은 서양음악에서 시작하여 이어지는 우리 음악으로 순식간에 열광의 도가니...

정말 모처럼 맛있는 식사와 함께 신나게 놀았다.

Heurige

호이리게

빈에서 햇포도주를 마시며 여유로운 휴식 즐기기
'호이리게(Heurige)'라는 말의 어원은 호이리크(heurig 올해의)이며,
heuriger Wein(올해 만든 포도주)를 의미한다. 빈에서는 '그해의 햇포도로 담근 포도주'라는 뜻과 함께 '그해 새로 탄생한 포도주를 마시며 식사를 하는 레스토랑'을 동시에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호이리게 전통식 레스토랑은 비엔나 근교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해 마지막에 수확한 포도로 담은 술을 주로 소다수와 섞어 마시며, 거기에 뷔페식 음식이 준비되어 나온다. 뷔페식 음식은 쏘세지, 고기류, 야채 등이 포함된다. 식사도중에 아코디언과 기타로 연주되는 슈라멜(Schrammel) 음악이 연주되어 편안하고 흥겨운 분위기가 만들어지곤 한다.

호이리게 레스토랑이 밀접되어 있는 그린칭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오스트리아의 멋이 물씬 풍기는 곳으로 시내 전차 38번이 그곳까지 운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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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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쉔브룬 궁전

'아름다운 샘'이란 의미의 화려한 쉔브룬 궁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전으로 매우 화려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쉔브룬이라는 이름은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도중 아름다운 샘(Schoenner Brunnen)을 발견한데서 유래하고 있다.


외부 건물은 크림색이며 내부는 18C 후반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수집한 동양의 자기나 칠기, 페르시아의 세밀화 등으로 우아하고 호화롭게 로코코식으로 꾸며져 있다. 왕궁정원은 약 1.7㎢에 달하는 바로크 양식으로 단장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다수의 분수와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44개의 대리석상들이 있다.
그외에도 그리스 신전 양식의 글로리에테, 궁정마차 박물관, 온실 등이 있다.





글로리에테(Gloriette)
1775년 마리아테레지아 여제가 프러시아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고 전몰자 위령을 목적으로 정원 끝언덕에 세웠다.








 

베스트 샷

http://landart.tistory.com/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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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15일



부다페스트의 일출

- 호텔 비상 탈출로를 이용하여 옥상에 올라



(Wien) 현지 가이드 : 일명 부루스 리(이용일)

요약

오스트리아의 수도. 면적 414.

설명

오스트리아의 수도. 면적 414.09㎢. 인구 160만 9631명(1998). 하나의 주를 이루기도 한다. 도나우강을 따라서 발달한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이며, 오랫동안 유럽 및 세계 정치·문화의 중심지의 하나였다. 그 중심지적 역할은 제2차세계대전 후부터 약화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국제회의의 개최지 및 음악의 도시이다. 빈의 발전은 그 지리적 위치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알프스와 카르파티아산맥 사이의 빈분지를 지나는 고대의 <호박(琥珀)의 길>이라는 남북교통과, 도나우강 동서교통의 교점에 위치한다는 것이 그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시의 중심부는 홍적세의 빙기에 형성된 몇 단의 단구 위에 있다. 평균기온은 1월 -1.4℃, 7월 19.9℃, 적설일수 41일, 연강수량 660㎜이며, 내륙지에 비해 기후가 온화하다. 시는 일찍이 켈트인 촌락으로 성립됐는데, 1세기 말무렵에 로마제국 북방에 대한 수비대사령부와 병영이 설치되었다. 이 도시는 1282년 이후 합스부르크가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1533년에는 합스부르크가의 수도가 되어 이후 400년 동안 유럽대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역할을 수행하였다. 2차례에 걸친 투르크의 공격으로 파손된 시가는 합스부르크가에 의하여 재건되었고 현재의 도시 기초가 형성되었다.

빈 시가
오스트리아공화국 정부·의회·최고법원 등의 주요 국가기관 외에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주청사 등도 있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시가는 23구로 나뉜다. 링로(路)는 1857년에 구시가를 둘러싸고 있었던 성벽·포대 등을 제거하여 만든 나비 57m, 길이 4㎞의 환상도로이며, 구시가와 이 가로에 따르는 지구는 빈의 중추부에 해당한다. 국회의사당·정부청사·시청사·증권거래소·빈대학·국립도서관 등의 시설 외에 시의 상징이라고도 할 성슈테판대성당·왕궁·미술사박물관·자연사박물관·국립오페라극장·부르크극장 등이 있다. 그 바깥쪽 환상도로와의 사이는 주택·상업지구이고, 남부와 도나우 대안부는 공장지구와 근로자의 주택지구이다.

빈의 생활·문화
빈은 숲의 도시로서, 도심부에 폴크스공원을 비롯하여 여러 공원이 있어 시민에게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며, 빈의 숲과 자연보호구, 누스도르프 등의 포도재배취락은 시민의 휴일 산책지이다. 인구는 제1차세계대전 이후 줄어들었다. 성(姓)에 외국계가 많은 사실로써 시민들의 출신지의 다양함을 알 수 있다. 빈시민은 특히 음악적 예술성이 뛰어나며 유머감각이 풍부하다. F.J. 하이든·W.A. 모차르트·L. 베토벤·F.P. 슈베르트·J. 브람스·J. 슈트라우스같은 작곡가들이 살았던 도시이다. 관광객은 연간 132만 정도이다.

빈의 산업
상업과 소비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도매업·소매업·금융업·서비스업이 성행한다. 오스트리아 제1의 공업도시이기도 하나 중소규모의 것이 많다. 주요 업종은 정밀기계·전자·금속가공·유리·도자기·의료품(衣料品) 등이다. 1921년 이래 중부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국제박람회가 개최되며, 수출진흥에 기여하고 있다.

빈의 역사
예로부터 동서교통로였던 빈은 발트해와 아드리아해를 맺는 요로이며, 중세부터는 독일인·슬라브인·마자르인의 접촉점이었다.

고대·중세
기원전에는 작은 마을이었으나, 마르코만넨전쟁(남하한 게르만인 마르코만니부족들에게 로마가 반격을 가한 전쟁) 말기인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가 이곳에서 전사했다. 3세기에는 로마의 자치도시였으나 민족이동기에 멸망하였고, 5세기에는 아틸라의 훈족과 이탈리아로 침입하기 전의 동고트족도 이 근방에서 나라를 형성했다. 8세기엔 성 루프레히트교회와 성 베드로교회가 건설되었고, 그 후 빈은 9세기에 오스트마르크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바벤베르크가(家) 밑에서 13세기에는 궁정기사문화도 꽃피웠다. 또 십자군의 통로가 되기도 하여,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한때 제국도시(帝國都市)로도 번영했다. 그러나 1251년 베멘왕 오타카르 2세가 남하하여 점령한 이래 빈은 영방군주(領邦君主)에게 종속되는 도시로 바뀌었다.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대공위시대가 지난 뒤 황제가 된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는 오타카르를 내쫓고 빈으로 입성했다. 그리고 13세기 말부터 교회가 많이 건설되어, 성 슈테판대성당은 고딕양식으로 재건되고 아우구스티누스교회도 창건되었다. 그러나 황제위를 둘러싸고 여러 왕가와 다툰 합스부르크가 밑에서의 빈도 15세기 후반에는 헝가리왕의 오랜 점령을 당했다. 합스부르크가는 결혼정책에 의해 에스파냐의 유산을 이어받고, 카를 5세하에서 세계제국을 실현했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계속되는 신교파의 대두뿐만 아니라, 상속에 따르는 에스파냐·오스트리아 양통분립(兩統分立), 대외적으로는 프랑스와 투르크의 위협으로 빈은 어려움을 겪었다. 오스트리아가는 보헤미아·헝가리의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1529년 빈은 투르크군에게 포위되었다. 1619년에는 빈의 신교도와 결탁한 토룬백작 마티어스의 공격을 받았고, 30년전쟁 때에 스웨덴군의 공격을, 1683년에도 다시 투르크군에게 포위당했다. 황제군은 빈 북쪽에서 승리하고, 반격으로 나온 뒤부터는 마침내 헝가리 전 국토를 확보할 수 있었고, 에스파냐를 배경으로 반종교개혁을 추진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밑에서 빈은 바로크문화를 꽃피웠다. 1740년에 모든 가령(家領)을 이어받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계승전쟁과 7년전쟁에서 슐레지엔을 빼앗기고 프로이센의 대두를 허용했으나 요제프 2세와 함께 계몽절대주의에 의한 근대화를 추진시켰다. 18세기 말에는 고전파의 전성기를 맞았다.

빈회의 이후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뒤인 1814∼1815년의 빈회의에서는 유럽의 군주들이 모였다. 복고주의와 정통주의에 의한 메테르니히의 반동체제하의 비더마이어문화(복고주의 예술양식) 속에서 슈베르트의 가곡과 왈츠도 태어났다. 1857년 오늘날의 합창단·관현악단 등이 많이 생겨났고, 브람스와 J. 슈트라우스의 왈츠, 오페레타의 황금시대를 맞았다. 이탈리아통일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에 패하여 헝가리의 독립을 인정한 뒤 이중왕국으로 다시 편성했으나 독일 통일로부터는 배제되었고, 1879년의 독일-오스트리아동맹은 독일제국에 대한 종속적 길을 트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독일인의 지도권이 상실되어 가는 가운데서 노동자운동도 격화하였으나, 사회민주당도 민족문제의 극복과 제국주의단계에서의 대응에 고민했다. 빈대학에서는 역사주의와 민족주의를 극복하려는 개인주의적인 새로운 학문이 탄생했다. 문화산업이 전개되었으나 후진자본주의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이중왕국의 모순은 컸으며,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시작되는 제1차세계대전을 맞게 된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제1차세계대전 패전에 따르는 합스부르크제국 해체로 인해 동·중유럽을 잃은 오스트리아는 독일과의 합방도 거부당함으로써 경제적·정치적 위기는 심각했다. 빈에는 하층시민과 실업자를 위한 가난구제시설도 많이 설치되었으나, 노동운동의 고조는 1927년에 이르러 노동자의 봉기로까지 발전했다. 1929년에 시작된 세계공황은 반볼셰비키·반나치스인 기독교사회당에 정권을 맡겨 E. 돌푸스의 독재를 낳았고 1934년에는 사회민주당도 비합법화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나치스는 같은 해 돌푸스를 왕궁 안의 총리관저에서 암살했으며, 히틀러는 1938년에 독일-오스트리아합방을 강행함으로써 1939년에는 제2차세계대전으로 돌입했다. 전쟁 말기에 빈은 1주일간의 소련군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1945년 4월 나치스독일로부터 해방되어 사회민주당의 K. 레너를 대통령으로 하는 신생 오스트리아의 수도가 되었고,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국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미·소 해빙분위기 속에서 1955년 5월 마침내 독립을 되찾게 되었다. 1961년 케네디·흐루시초프회담의 무대가 되었으며 이것이 쿠바위기 회피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 여행정보 http://www.hanatour.com/asp/travelinfo/if-12000.asp?country_code=AT











성 슈테판 성당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로서, 1147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을 시작하였고, 1258년 빈을 휩쓸었던 대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263년 보헤미아 왕에 의해 재건되었다. 1359년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헐어버리고 고딕 양식으로 개축하였고, 1683년에는 터키군, 1945년에는 독일군에 의해 많이 파괴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복구를 시작하여 대부분 옛 모습을 찾았다. 성당 이름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성인(聖人) 슈테판에서 딴 것이다.

옛 건물이 가득 들어찬 구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다. ‘빈의 혼(魂)’이라고 부를 정도로 빈의 상징으로 꼽힌다. 공사기간이 65년이나 걸렸으며 건물의 길이가 107m, 천정 높이가 39m에 이르는 거대한 사원이다. 높이 137m에 달하는 첨탑과 25만 개의 청색과 금색 벽돌로 만든 화려한 모자이크 지붕이 눈에 띈다. 보헤미아 왕이 세웠던 '거인의 문'과 '이교도의 탑'도 남아 있다.

건물 내부에는 16세기의 조각가 안톤 필그람이 만든 석조 부조의 설교대와 15세기 말에 만들어진 프리드리히 3세의 대리석 석관이 있다. 그밖에 마리아와 예수상이 있고,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매우 아름답다. 지하에는 1450년에 만든 지하유골 안치소 카타콤이 있는데, 페스트로 죽은 사람의 유골 약 2,000구와 합스부르크 왕가 황제들의 유해 가운데 심장 등의 내장을 담은 항아리 및 백골이 쌓여 있다. 모차르트의 결혼식(1782)과 장례식(1791)이 치러진 곳이며, 빈 시민들은 매년 12월 31일 슈테판대성당 광장에 모여 새해를 맞는다.







비엔나의 중심지, 케른트너 거리(Kerntner Strasse)
비엔나 관광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거리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립 오페라 하우스에서 시작하여 슈테판 대성당 광장에 이르는 비엔나의 중심가로 고품질의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상점들이 즐비하며 보행자 전용 거리인 그라벤과 콜마르크트로 이어진다. 쇼핑의 파라다이스라고 할 수 있는 거리로 세계 유명 디자이너의 상품, 가치있는 골동품 또는 재미있고 앙증스러운 기념품 등이 사람들의 시선을 멈출 수 없게 한다.






오스트리아 (Republic of Austria)

요약

유럽 중남부에 있는, 산이 많고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 정식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Resrepublik Österreich).

설명

유럽 중남부에 있는, 산이 많고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 정식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Resrepublik Österreich).

면적 8만 3855㎢. 인구 818만 8000명(2003). 동쪽은 헝가리·슬로바키아, 서쪽은 스위스·리히텐슈타인, 남쪽은 슬로베니아·이탈리아, 북쪽은 독일·체코와 접하고 있다. 수도는 빈.

오스트리아의 자연
국토의 2/3가 동부알프스산맥 지역이며, 동서로 뻗은 화강암류의 중앙알프스와 남쪽과 북쪽으로 나란히 달리는 남·북 석회암 알프스의 3산열(山列)로 이루어진다. 이에 속하는 산들은 해발고도 1500~3000m이며 최고봉은 그로스글로크너산(3797m)이다. 중앙알프스는 오랜 화강암·편마암·편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으로는 엔스·잘차흐계곡까지 뻗어 있으며 남으로는 드라바강에 면해 있다. 이탈리아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외츠탈과 호에타우레른 산령은 특히 험준하고 빙하의 침식을 받았으며 2700~2900m 높이에 설선(雪線)이 있다.

북동부를 흐르는 다뉴브강 이북은 보헤미아숲의 연장이며 고기(古期)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완만한 구릉과 넓은 평지는 빈분지로부터 노이지들러호(湖) 부근에만 있을 뿐이다. 다뉴브강은 독일의 파사우로부터 오스트리아 북동부를 지나 빈 동쪽에서 헝가리로 들어간다. 멜크로부터 하류 쪽으로는 단구가 있는 넓은 계곡이 있고, 상류는 협곡 사이로 흐른다. 주요 지류는 인·잘차흐·엔스·트라운·무르 등이며, 상류에는 아터호를 비롯한 많은 아름다운 호소(湖沼)가 있다. 산지에는 U자곡·빙퇴석(氷堆石) 등의 빙하지형이 남아 있고, 질브레타산군에는 빙하가 있다.

서유럽의 해양성기후와 동유럽의 대륙성기후의 점이지대(隷移地帶)를 이루고 있다. 동부에 있는 빈(해발고도 202m)의 1월평균기온 -1.4℃, 7월평균기온 19.9℃, 연평균기온 9.8℃, 연강수량 660㎜이다. 서쪽으로 가면서 기온이 낮아지고 비가 많아지며 중앙부인 잘츠부르크(430m)는 연평균기온 8.3℃, 연강수량 1359㎜이다. 산악지대는 알프스기후이며, 아를베르크(1220m)에서는 연평균기온 5.4℃, 연강수량 1957㎜이다. 고산지대는 기온이 더 낮고 강수량은 일반적으로 많으나, 인강 상류 계곡은 강수량 600㎜ 이하이다. 남동부는 스텝성 푄기후로 안다우에서는 연평균기온 9.7℃이나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우며 강수량 576㎜로 적다.

기후와 해발고도에 따라 1000m 미만에서는 너도밤나무를 주로 하는 활엽수림지대를 이루고, 1000m 이상에서는 가문비나무를 주로 하는 침엽수림대로 되어 있다. 그보다 위쪽은 소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수목한계는 설선보다 약 900m 낮고, 한계 부근에는 눈잣나무가 있다. 동부는 헝가리 초원의 연속으로 스텝황야를 이룬다. 숲은 광범위하게 벌채되었으나 아직도 국토의 44%를 차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지지
서부의 잘츠부르크·티롤·포어아를베르크 3주는 알프스지역 안에 있다. 잘츠부르크주는 암염과 글로크너 카프룬 수력발전소로 유명하다. 주도인 잘츠부르크시(인구 약 14만)는 호엔잘츠부르크성(城)과 예술제로 유명하다. 티롤주는 겨울스포츠의 메카이며 가옥과 자연이 아름다운 관광지이다. 주도 인스브르크(인구 약 12만)는 빈과 스위스를 잇는 동서교통로인 동시에 브레너고개를 넘어 독일과 이탈리아를 연결하는 십자로에 해당되어 역사적 기념물이 많다. 가장 서쪽에 있는 포어아를베르크주는 관광으로 번영함과 아울러 수원지대(水源地帶)이자 섬유공업이 활발하다. 보덴호에 면한 주도 브레겐츠(인구 약 2만)는 예술제로 알려져 있다.

알프스산맥 끝부분이 그 남쪽에 이르고 있는 오버외스터라이히주는 알프스와 비슷한 지형의 경승지가 많다. 다뉴브강 사이로 북부는 보헤미아숲 남단이 체코와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주도 린츠(인구 약 22만)는 다뉴브강의 하항(河港)으로, 이 시를 중심으로 철강업·화학공업이 발달해 있다.

부르겐란트·슈타이어마르크·케른텐·니더외스터라이히의 4개 주는 농림업지역이다. 헝가리와의 국경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은 부르겐란트주에서는 밀·옥수수·야채·과일이 풍부하게 생산된다. 작곡가 F.J. 하이든이 활동한 주도 아이젠슈타트에는 그의 묘지가 있다. 슈타이어마르크주는 임업이 성하고 또 에르츠베르거의 철광석과 마그네사이트를 원료로 하는 제철업, 기계공업, 종이·셀룰로오스공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도 그라츠는 인구 약 25만의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로 상공업 중심지이다. 케른텐주 서부는 알프스지역으로 산과 호수가 많고 주도 클라겐푸르트(인구 약 8만)에서는 국제재목박람회가 열린다. 납·아연·마그네사이트도 산출된다. 수도 빈(인구 159만, 1996)에는 총 인구의 22%가 모여 있고, 니더외스터라이히주와 더불어 공업이 활발하다. 빈분지 북부에는 천연가스와 석유자원이 있으며, 다뉴브강과 그 지류로부터의 전력공급도 풍부하다.

오스트리아의 역사

고대
선사시대부터 교통의 요지로서 여러 민족의 이동이 많았다. BC 8세기 무렵부터 할슈타트문화의 중심이 되어 정착한 켈트인이 BC 2세기에는 노리쿰왕국을 세웠다. 기원 전후 로마인도 다뉴브강 남쪽 연안에 이르러 노리쿰을 속주로 편입시켰고 뒤늦게 빈도보나(지금의 빈)를 건설하였다. 게르만인도 1세기에 이 지방으로 진출했다. 로마제국은 그 대응책에 고심하면서 4세기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훈족의 서진(西進)으로 435∼453년 아틸라의 지배를 받았으나, 그가 죽자 게르만부족들의 재편성과 자립화가 진행됐다. 그러나 동방으로부터 슬라브족을 동반한 아바르족이 진출하였고, 5세기 말 로마인이 철수했다.

오스트마르크의 성립
서쪽에서 5세기 후반 이래 왕국을 형성하고 있던 프랑크족은 6세기 로마교회와 손을 잡고 점차 남동쪽으로도 진출하여 카롤링거왕조의 카롤루스대제(재위 768∼814) 영도 아래 8세기 말 바이에른을 복속시키고 다시 동진하여 791∼796년 아바르족을 괴멸시켜 여기에 오스트마르크를 설치했다. 9세기 말부터 서진을 시작한 마자르인은 10세기에 이곳으로 진출하였다. 카롤링거왕조가 단절된 뒤 동프랑크왕국을 계승한 작센왕조 오토 1세(재위 936∼973)는 955년 마자르인을 격파하고 오스트마르크를 재건, 962년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였다.

바벤베르크가의 지배
사촌인 바이에른공과 싸워 이겨 황제가 된 오토 2세(재위 961∼983)는 976년 바이에른으로부터 오스트마르크를 분리시켜 변경백(邊境伯)의 영지로 삼아 이것을 바벤베르크가에게 하사했다. 바벤베르크의 군주들은 동방식민을 추진해서 경제발전을 꾀하였고, 서임권을 둘러싼 황제와 교황의 분쟁을 이용해 세습을 관행화하였으며, 슈타우펜가와 벨프가의 분쟁에서도 프리드리히 1세(재위 1152∼90)로부터 1156년 세습공령으로의 승격을 획득했고, 아울러 영역 내에서의 재판권을 인정받았다. 1192년 슈타이어마르크공령도 병합하여 남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했으나, 1246년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최후의 군주인 프리드리히 2세(재위 1230∼46)가 전사함으로써 오스트리아는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1246∼73)를 맞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 지배의 성립
주변 지역의 분쟁에 개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접 제후들의 무력개입을 초래했으나, 보헤미아(뵈멘)왕 오토카르 2세는 1251년 빈을 점령하고 아드리아해까지 진출해 동유럽에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1256년 독일의 대공위시대(1256∼73)에 때맞추어서 황제위를 요구하였다. 이에 반대한 독일 제후들은 1273년 알자스와 스위스 등지에 기반을 둔 합스부르크백작 루돌프를 황제로 선출했다. 황제 루돌프 1세(재위 1273∼91)는 제국영토의 반환을 거부한 오토카르를 1278년에 죽이고 오스트리아를 합스부르크가의 영지로 확보했다. 그러나 제후들은 너무 강대해진 합스부르크가에게 계속해서 황제위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1291년 이래, 특히 14세기에는 오랜 기간에 걸친 스위스독립전쟁으로 고초를 겪었을 뿐 아니라, 카를 4세(재위 1347∼78) 밑에서 번영한 룩셈부르크가와도 대립, 1356년 금인칙서(金印勅書)에서도 7선제후(七選帝侯)에서 배제되어, 룩셈부르크왕조가 후스전쟁(1419∼36)으로 단절되고 알브레히트 2세가 1438년 즉위한 뒤에야 합스부르크가가 황제위를 독점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1453년 대공령으로 승격하였다.

결혼정책과 세계제국의 성립
합스부르크가의 아들들에 대한 분할상속 전통은, 결과적으로는 결혼정책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으나 영토분할과 계승권분쟁이 생김으로써 통일국가로 나아가는 데에는 방해가 되었다. 1477년 부르군트공주와 결혼한 황제 막시밀리안 1세(재위 1493~1519)는 1495년 독일제국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좌절되었다. 1496년 그의 아들 필립이 에스파냐 왕녀와, 1515년 그의 손자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헝가리 왕녀와 결혼했다. 이 결혼정책은 프랑스와의 대립을 장기화시키면서 프랑스와 동맹관계에 있는 오스만투르크와 대립을 가져와 합스부르크가는 동·서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었으나, 필립의 장남 카를 5세(재위 1519~1556)가 프랑스왕과의 전쟁에서 이겨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 합스부르크세계제국이 출현했다.

종교개혁과 오스트리아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룩한 세계제국도 1521년 에스파냐계와 오스트리아계로 분할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재위 1556~1564)는 농민전쟁에도 직면했으나 오스만투르크의 북상으로 헝가리왕 라요시 2세(재위 1516~1526)가 1526년 모하치에서 죽자, 보헤미아·헝가리 두 왕국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1529년 빈을 포위당해 겨우 격퇴하고 1531년 독일왕이 되었으며 헝가리에서는 얼마 되지 않는 북서부를 지배했을 뿐이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화의(和議) 뒤 1556년 카를 5세로부터 제위를 승계받았으나 종교쟁의에는 간섭할 수 없었다. 합스부르크가의 내분 뒤 페르디난트 2세(신성로마황제, 재위 1619~1637)가 1617년 보헤미아왕이 되어 반종교개혁을 강행하자, 1618년 30년전쟁(1618~1648)이 일어났다.

봉건반동과 계몽전제주의
30년전쟁은 단순한 종교전쟁이 아니라 자본주의 탄생의 태동이기도 하였으며 체크민족주의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열강의 간섭 속에서 오스트리아의 군주들은 반종교개혁을 통해 농노제를 다시 확립하였고, 서방에서는 영국과 결탁해 루이 14세의 침략을 막았으며, 동방에서는 1683년 오스만투르크의 빈 포위를 반격하여 헝가리 전토를 확보하였다. 권력집중을 도모하고 영토통합을 꾀하였으며, 산업육성·농민보호에 힘썼으나 에스파냐계승전쟁에서는 해외 진출을 단념하고 에스파냐왕위를 포기하였으며,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 영토를 확보하였다. 오스트리아계승전쟁(1740~1748)에서는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을 빼앗겼으나 영토분할을 막기 위한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이 인정되어, 마리아 테레지아(재위 1740~1780)에게 상속시켰다.

1756년 프랑스와의 동맹에 성공했으나 7년전쟁(1756~1763)에서도 슐레지엔을 수복하지 못했고, 오히려 헝가리귀족과 타협해 동방에서의 러시아진출과 독일에서의 프로이센 발흥을 도운 셈이 되었다. 전중·전후의 부흥을 위해 행정·재정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 요제프 2세(재위 1765~1790) 치하인 1781년 <농노해방령>과 <관용령>을 발포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1790년 요제프 2세의 죽음으로 개혁정책도 좌절되었다.

나폴레옹전쟁과 메테르니히체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에 직면한 합스부르크가는 영토를 유지하기 위하여 나폴레옹이 대관하기에 앞서서 1804년 오스트리아황제라고 칭했고, 슬라프코프에서 참패한 1806년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K.W.N.L. 메테르니히는 1810년 황녀 마리아 루이자와 나폴레옹의 결혼을 추진하는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교묘히 해방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빈회의(1814∼1815)를 주최하고, 복고·정통·연대를 기조로 반동체제를 국내적·국제적으로 확립해 자유의 움직임을 탄압했다.

3월혁명과 반혁명의 승리
메테르니히체제 아래에서도 산업발전에 따라 시민의 힘이 강해졌다. 1848년 프랑스 2월혁명의 영향으로 빈 등지에서 3월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는 망명했다. 혁명의 전면에 하층시민이 부상하자 산업시민층은 혁명에서 후퇴해 10월 말 반혁명의 승리로 끝나고, 1851년 이후로는 신절대주의 A. 바흐 체제가 되었다. 혁명 뒤에는 농민해방을 정착시키면서 산업 근대화를 추진시켰기 때문에 산업혁명이 전개되면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영토의 기반을 동·중유럽에 두었기 때문에 전형적인 다민족국가가 되었고 혁명은 여러 민족의 독립운동을 표면화시켰다. 헝가리 토지귀족의 독립운동은 러시아군대의 원조로 1849년 진압되었으나, 체크의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는 슬라브 여러 민족에 영향을 주었다. 크림전쟁에서의 외교적 실패와 고립화 속에서 이탈리아의 운동은 1859년 독립전쟁으로까지 고조되었고, 그 패전으로 바흐체제는 붕괴되었다.

이중제국과 그 붕괴
위기에 직면한 오스트리아는 여러 민족의 요구를 참작, 1860년 연방주의적인 10월 칙서(Oktoberdiplom)를, 1861년에 2원제의회를 인정하는 2월헌법(Februar-Patent)을 반포하여 부르주아적 권력의 강화를 시도했지만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에서 완패하자 헝가리 토지귀족과 제휴, 그 왕국을 인정해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제국을 성립시켰다. 이 노선은 반발하는 슬라브 여러 민족의 요구를 억압하고 1873년 공황을 거쳐 1879년 독일-오스트리아동맹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운동의 고조와 함께 노동운동도 성장하였다. 이 해에 <모든 민족과 정당을 대표하는 황제내각>이 성립되자, 이로 인한 독일인과 체크인의 민족적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보헤미아에서는 <언어령(Sprachenverordnung)>이 되풀이되었지만 대립은 일상생활로까지 번져 격화를 거듭하였다. 1888년 결성된 사회민주당은 1907년 보통선거제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1909년 민족별로 분열되자 민족주의가 고양되어 혼란에 말려들었다. 발칸으로의 진출은 범슬라브주의와 대립되었고, 1914년 사라예보사건을 계기로 제1차세계대전에 돌입했다.

제1·2차세계대전과 전후(戰後)
제1차세계대전으로 제국은 해체되고 1918년 사회민주당 주도로 공화국이 성립되어, 국민의회 결의에도 <독일계 오스트리아는 독일공화국의 한 구성요소>라고 명기되었으나 이 합병은 전승국들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특히, 산업이 앞선 보헤미아의 상실, 전후 경제혼란과 1929년 대공황에 따라 그리스도교사회당이 대두하였다. 1932년 C.E. 돌푸스내각은 사회공산당과 더불어 합병을 주장하는 나치스를 탄압했다. 독일민족주의자들은 나치스에 가담해 1938년 독일-오스트리아합방을 단행하고, 1939년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나치스 독일이 패배하는 가운데, 1945년 3월 빈에 소련군이 진주하였고, 전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 점령 아래 마셜플랜을 받아들였으며, 4개국회의를 거쳐 1955년 오스트리아국가조약으로 자유영세중립국으로 주권이 회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외교
입헌제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연방공화국으로서 3권분립을 견지하고 있으며 헌법은 1920년 제정되었다.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국가를 대표하며, 총리를 임명하고, 총리의 제청으로 국무위원을 임명하며, 국민의회의 소집·해산권을 가진다. 3선 이상은 금지되어 있고, 헌법재판소의 탄핵을 받으면 국민투표에 의해 파면될 수도 있다. 국회는 양원제로서 국민의회(하원)와 연방의회(상원)로 구성된다. 국민의회는 임기 4년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비례대표제에 의해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정원 183명이며 1986년 총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제1당의 자리를 유지하였고 K. 발트하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7년 1월 사민당·인민당의 연립내각이 이루어졌다. 인민당은 제2차세계대전 전의 가톨릭적 보수당의 노선을 따르고 있으며 사민당은 사회민주노동자당의 후신으로 각기 1945년 결성된 이래 의회의 주요 세력으로 국정을 안정·발전시켜 왔다. 인민당의 토마스 클레스틸이 1992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 1998년 4월 대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하였다. 대독일주의를 제창하는 자유당 등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으나 대다수 국민은 중도노선을 취하여 왔다.

1999년 10월 총선에서 자유당이 급부상, 2000년 2월 극우파 자유당과 보수파 인민당의 연립정부가 국내외 비난에도 불구하고 정식 출범하였다. 새 내각 총리로 W. 쉬셀 인민당 당수가 취임했다. 최근 환경문제가 대두되면서 녹색당의 활동이 눈에 띄고 있다. 1999년 선거결과 사회민주당 65석, 인민당 52석, 자유당 52석, 녹색당 14석을 차지했다. 연방의회 의원은 빈과 8개 주에서 인구수에 비례하여 각 지방의회가 간접선거로 선출하며, 정원 64명이다. 국민의회와 연방의회 모두 법안제출권이 있고, 법안은 양원을 모두 통과해야 하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국민의회에 우선권이 있다. 선전포고 등 중대안건의 결정에는 양원 의원으로 구성되는 연방회의가 소집된다. 헌법 개정은 국민투표에 의한다.

내각은 총리·부총리 외에 대통령의 임명을 받은 국무위원으로 구성된다. 국민에게는 기본권과 자유의 권리가 있다. 그 기초는 1867년 <국가기본법>에 근거하고 있으며, 1948년 제2공화국시대에 입법화되었다. 성(性)·출생·인종·언어·신분·계급·신앙 등의 차별은 인정되지 않으며 언론·집회·결사는 법률 내에서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 각주와 빈은 역사적으로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서, 주민이 선출한 주의회가 있고 의회가 선출한 주의 장관이 행정을 집행한다.

사법권은 연방에 속해 있고, 4단계로 나뉜 보통재판소가 설치되어 있다. 그 밖에 헌법재판소와 행정재판소가 있어 위헌심사와 행정권 감독을 담당하고 있다. 외교의 기본방침은 모든 나라와의 평화적 공존을 추구하는 영세중립을 표방하고 있다. 1955년 5월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체결된 <오스트리아국가조약>으로 주권·독립을 회복하면서, 독일과의 합방과 나치즘 및 군국주의를 금지하고 인권을 존중할 것을 서약하였다. 국민의회는 1955년 10월 26일 <영세중립에 관한 법률>을 채택, <스스로의 의지로 영세중립을 지키고 어떠한 군사동맹에도 가입하지 않으며 또한 영내에 외국군의 기지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에 의거하여 정부 및 국민은 동·서의 인접국과 우호를 증진하고, 국제연합(UN)의 임무에 협력하고 있다. UN사무총장으로 발트하임이 취임하기도 하여 사무국에 요원을 보내거나 UN군에 감시단이나 구호반을 파견하는 등 분쟁해결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빈은 동·서 수뇌회담이나 각종 국제회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원자력기구(IAEA)·국제연합공업개발기구(UNIDO) 등의 본부가 있어서 1979년 국제센터를 건설하려는 도시계획이 수립되었다. 이같은 선린외교를 추진하고는 있으나 남티롤지방은 이탈리아와의 분쟁지역이다. 제1차세계대전 뒤인 1919년 이 지역은 이탈리아에 할양되었으나, 주민의 90%를 차지하는 오스트리아인에 대한 탄압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의 원인이 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뒤에는 독일어가 공용어로 되고 자치권이 부여되었으나 아직 이탈리아령으로 남아 있어, 분쟁은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군사
국가의 방위와 안전을 위하여 오스트리아연방군이 조직되어 있다. 군대의 최고지휘권은 대통령에게 있지만 실제적인 지휘는 국방장관이 한다. 국민개병제도로서 17세 이상 61세 미만의 남자는 병역의무가 있어 7개월간의 복무 뒤에는 60일간의 훈련에 참가해야 한다. 양심상 이유에 의해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비군사적 근무에 복무할 수 있도록 <병역대체복무법>이 제정되어 있다. 총병력은 육군 3만 4600명, 공군 6500명(2001)을 보유하고 있다. 국방비 지출액은 1985년 19억 1300만 달러(GDP의 1.2%)에서 2000년 16억 900만 달러(GDP의 0.8%)로 낮아졌다.

오스트리아의 경제·산업
제2차세계대전으로 산업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전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한 분할점령과, 특히 소련의 생산시설 반출, 동·서진영의 대립 등으로 부흥이 늦어졌다. 1949년 마셜플랜에 의한 유럽부흥기금을 받아, 1955년 완전독립을 이룩한 뒤에는 경제가 급속히 회복되어 1950년대에는 연평균 6%에 이르는 경제성장률을 이루었다.

이후 계속된 경제성장으로 2002년에는 국내총생산 2277억 달러, 1인당 국내총생산 2만 7900달러를 기록했다. 그 원동력은 옛 독일제국 자산의 반환에 따른 공업의 국유화와 기술혁신, 수출증대 등이었으며 그것을 뒷받침한 것은 국내의 자원과 에너지의 공급, 안정된 정치, 사회조건 등이었다.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를 취하는 한편, 기간산업은 국유화되고 있다. 국영기업은 철강, 비철금속, 기계·조선 및 전기, 석유·화학, 석탄의 6분야로 되어 있고, 오스트리아산업관리주식회사(ÖIAG)가 관리한다. 국영공업종사자는 11만 5000명, 매출액 1200억 실링이며 32%가 수출되었다(1978).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제조업은 비율은 전체 산업에서 25.7%를 나타냈으며, 농업 3.5%, 3차산업 70.9%를 나타내었다(2004). 산업별 인구 구성에서는 2001년 현재 1차산업 4%, 2차산업 29%, 3차산업 67%를 나타내고 있다. 2004년 경제활동인구는 총 342만 5000명이었고, 2004년 실업률은 4.4%를 나타내었다.

농림업
주요 생산물은 사탕무·감자·옥수수·보리·밀 등이다. 야채로는 양배추 등이 있으며 과일로는 포도·사과·배 등이 생산된다. 포도는 주로 동부의 구릉경사면에서 재배되어 백포도주로 양조된다. 가축으로는 소·돼지·닭이 많다. 서부산지에서는 한때 알름(Alm;여름철의 고원목장)에서 소를 이목(移牧)하여 사육하고, 일부는 여기에서 채유하여 직접 치즈를 생산하기도 했다. 도로사정이 좋아지고 교통이 편리해짐에 따라 품이 많이 드는 산에서의 치즈생산은 줄어들었고 산기슭 공장으로 우유가 운반되어 가공되고 있다. 사료작물의 생산성도 향상되어 방목(放牧)이 쇠퇴하였고 산간마을에서는 관광업이 번창하게 되었다.

국토의 39%에 해당되는 328만 ㏊가 임야이며, 임업은 높은생산액을 올리는 중요한 산업이다. 보안림을 제외한 317만㏊가 벌채·제재의 대상이 되어, 각주에서 임업이 성하다. 그 가운데서도 슈타이어마르크주(45%)·케른텐주·포어아를베르크주는 삼림면적 비율이 매우 높다. 삼림면적의 약 1/2이 농가 소유이고, 약 1/3이 대지주 소유, 나머지가 국·공유림이다. 삼림의 84%가 침엽수림으로 가문비나무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낙엽송·젓나무·북가시나무 등이다. 임산물은 땔감으로도 쓰이나 펄프와 제지공업의 원료로 중요하다.

광업·에너지
에너지자원의 2/3는 수입하고, 1/3은 자체생산하고 있다. 주요 수입에너지원은 석탄과 석유인데, 석유 14%와 천연가스 44%를 자급한다. 그리고 총에너지의 12%를 차지하는 수력자원으로 증가하는 에너지수요와 석유가격 상승을 완화시키고 있다. 유전과 천연가스 산출지는 모두 빈분지에 있으며, 개발되지 않은 자원도 확인되고 있다. 주요 발전소는 다뉴브·엔스·일·드라우·인 등 여러 하천에 건설되어 있다. 주로 산출되는 금속자원은 철광석 및 각종 자철광상을 비롯하여 납·아연·안티몬 등이고 비금속으로는 석고·활석·고령토·암염 등이다. 철강업원료로 약 360만t의 철광석이 매년 수입되고, 크롬광석·납광석·보크사이트 등도 수입하고 있다. 에르츠베르거 등지에서 채굴되는 철광석은 철분함유량 26%, 매장량 약 26억t이다.

공업
제조업 종사자 수는 전 산업 종사자의 29%(2001)이며, 제조업은 제철·기계·화학 등의 중공업과 요업·섬유·식품가공 등의 경공업이 활발하다. 중공업은 철광석·전력 등의 자원에 기초를 두고 석유·천연가스 등 원료의 일부를 수입, 제2차세계대전 뒤 국영화되어 발달했다. 국영공업은 1946년 7월 26일 연방법에 의해 발족, 1970년 ÖIAG에 이양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철강·석유·화학·전기·기계 등이 포함된다. 빈·린츠 등 동쪽의 주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국영대기업을 주로 하는 중화학공업에 비해 중·소규모의 경공업이 각지에서 발달하고 있어 국민생활과 관광에 도움을 주고 있다. 제분·제당·양조를 비롯하여 제빵·제과 등 식료품제조업은 빈 등 도시의 주변이나 교통요지에 입지하고 있다. 섬유공업은 대소비지인 빈 교외 노이슈타트에 면방공장이 입지해 있고, 서부 산기슭지대에는 여성 노동력에 의한 마방·직물·자수 등의 공장이 있다. 또, 의류공업은 빈·린츠·인스브루크 등지에 집중되어 있다.

상업·무역·금융
최근 제3차산업의 발달이 두드러진다. 특히 상업 및 서비스업은 전체 산업의 70.9%(2004)를 차지한다. 도·소매업은 도시에 모여 있고 대개는 영세한 규모이나, 1000명 이상의 종업원이 있는 기업도 있다. 무역총액은 수출 727억 800만 달러, 수입 718억 4000만 달러(2002)이다. 수입품목은 자동차·섬유제품 등이며, 수출품목은 자동차·전기제품·기계·철강 등이다. 세목별로 볼 때 수입이 많은 것은 과일·야채·커피·차·코코아 등의 식료품, 연사(撚絲)나 광석 등의 공업원료, 자동차, 의류 등이며, 섬유·의류·전기기계·철강부문은 수출이 많다. 무역상대국은 독일이 수출입 모두에서 가장 많고 이어 이탈리아·스위스·영국의 순이다.

관광업
음악과 역사의 도시 빈을 비롯하여 산악·호수의 경승지가 많고 세계적인 스키장이 있어서 관광객이 많이 찾아온다. 관광수입은 100억 달러(2000)를 상회한다. 주별로는 티롤이 전체의 약 33%를 차지하고 잘츠부르크·케른텐이 이를 뒤따른다. 여름이 겨울의 약 2배가 되는데 최근 겨울철 관광객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여름철 숙박인의 70%, 겨울철 숙박인의 50%가 외국인인데, 독일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유럽 각국 및 미국인이며 소수의 동유럽인들도 찾아온다. 케른텐주 호반이나 잘츠카머구트지방 등지에는 별장이 늘어나고 있고 전국 별장의 15%는 외국인 소유이다. 겨울철 관광객의 증가로 많은 외화수입을 올리고 있다. 특히 포어아를베르크주에서는 총 숙박의 45%가 겨울의 스키철에 이루어진다. 키츠뷔엘, 장크트안톤 등은 스키장으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의 사회
평균 인구밀도는 97.6명/㎢(2003)이지만, 인구분포는 지역차가 크다. 빈분지에서는 인구밀도가 1㎢에 200명에까지 이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부 산악지대는 주택이 드문드문 있고 겨울에는 눈이 많은 임업지·관광지이다. 출생률은 1971년 14.6%에서 1996년 1.08%로 떨어졌고 사망률은 13%에서 0.99%로 내려갔다. 그 결과 1996년 자연증가율이 -0.09%로 감소했다. 고령층의 비중이 크고 중간 연령층의 비중이 눈에 띄게 작은 방추형 연령구성에서 제2차세계대전의 상흔을 엿볼 수 있다.

독일문화와 로마가톨릭의 정신적 지주 위에 1920년에 이루어진 헌법에 의한 민주주의의 세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다. 그것은 서유럽사회가 지니고 있는 특색과 거의 같지만 사회복지·사회보장 등에서는 진보한 나라의 하나이다. 이같은 제도는 19세기 후반 제정시대에 시작되어 제1차세계대전 뒤의 변혁으로 진보하였다가 제2차세계대전 뒤에 마무리되었다. 노동관계에서는 노동기본법이 제정되어, 주 40시간 노동을 법제화한 데 따르는 임금, 유급휴가, 소년·여성의 노동 등이 법률로 규정되어 있다. 국민은 또 건강·재해·실업·연금의 각 보험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다. 신체장애자와 전쟁희생자에 대한 배려, 아동양육을 위한 가족수당 지급, 지방자치단체가 세운 연금생활자 숙소, 긴급아동보호소 설치, 보건위생센터, 병원, 온천요양소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국가의 보조를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회복지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1972년 연방보건환경보호부가 설치되었다.

교육제도는 6~15살까지 총 9년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그 뒤에는 중학교나 공과과정(工科過程)의 상급학교에 진학하며, 그 위에 2~4년의 직업학교·중급교원양성소가 있다. 또, 기초학교 4년에 이어 일반교육을 실시하는 중·고등학교 9년제가 설치되어 있다. 종합대학·단과대학은 이들 위에 있으나,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처럼 직업선택과 학습능력에 따라 교육은 복선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스포츠는 겨울철의 스키와 회원 20만이 넘는 축구가 가장 인기 있으며, 스키·스케이트·등산은 국민스포츠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주민의 98%가 독일계로,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어는 부르겐란트주에서, 슬로베니아어는 케른텐주 남부에서, 마자르어는 부르겐란트 및 빈에서, 체크어는 빈에서 각각 조금씩 사용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인은 게르만민족에 속하지만 빈이 유럽의 정치·문화의 중심도시였기 때문에 현재 독일 게르만민족들과는 다른 국제성과 낭만적 정서를 지니고 있다.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가톨릭교는 연중행사·풍속·습관에 뿌리박고 있다. 몸짓이나 예의범절, 인간관계에도 가톨릭적인 것이 남아 있으며, 지방풍속에는 보수성이 짙다. 로마가톨릭 신자가 전인구의 90%를 차지하며 프로테스탄트나 유대교 신자가 약간 있다.

음악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예술로서, 독일음악을 기초로 슬라브와 헝가리의 민속음악적 요소를 가미한 밝은 선율을 특징으로 한다. 빈을 중심으로 활동한 음악가로는 C.W. 글루크·하이든·W.A. 모차르트를 비롯해 L. 베토벤·F.P. 슈베르트·J. 브람스·G. 말러·A. 쇤베르크·A. 베베른 등 서양음악사의 대표적인 음악가들을 들 수 있다. 특히 빈왈츠를 완성시킨 J. 슈트라우스 2세의 곡은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빈국립오페라극장은 오페라 역사를 장식하는 수많은 무대를 탄생시켰다. 그것을 지탱한 것은 궁정과 귀족의 후원과 시민들의 참여였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1786 초연)》은 부르크극장에서 초연되었으나, 19세기 후반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창조적 연주를 보인 것은 말러·R. 슈트라우스 등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해서 파괴된 오페라극장은 2억 6500만 실링을 들여 재건하여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상연하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그 연주는 K. 뵘·H. 카라얀·힐베르트 등으로 계승되었다. 빈에는 수많은 음악학교가 있고 그 정점에 음악·연극아카데미가 있다. 여러 음악제·예술제 가운데서도 1920년 시작된 잘츠부르크예술제와 헤르부른축제가 유명하다. 새로 시작된 것으로는 브레겐츠예술제가 있는데, 호수 위에 무대를 꾸며 오페라나 발레를 상연하고 있다.

국토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각지에 로마시대의 유적이나 교회·수도원·왕궁·성채 등 역사적 기념물이 많아 박물관으로 이용되거나 순례지나 관광지로 되어 있다. 건축양식으로는 로마네스크·고딕·르네상스·바로크 등이 있다. 고딕건축의 대표적인 거물은 빈에 있는 성(聖) 슈테판대성당으로 1304년 건축되었는데, 제2차세계대전으로 피해를 입었으나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보수되었다. 바로크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는 빈 교외에 있는 쇤브룬궁전과 다뉴브강변 단구 위에 있는 멜크수도원이다. 잘츠부르크 구릉에 우뚝 솟아 있는 호엔잘츠부르크성은 11세기에 착공된 성채이다. 이러한 건축물과 함께 회화·조각·가구·조원(造園) 등의 예술·기예(技藝)가 발달하였고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근대미술 및 건축의 새로운 경향을 시도한 사람들도 나타났다. G. 클림트·E. 실레·O. 코코슈카 등의 현대화가들은 독특한 화면을 이루어내었다. 빈의 서민적 희극을 토대로 극작을 한 F. 그릴파르처, 오페라 《장미의 기사》 등을 슈트라우스와 합작한 H. 호프만슈탈을 비롯해 A. 슈니츨러·F. 카프카 등은 세기말과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학술 수준도 높아서, 평화상을 받은 2명은 별도로 치더라도 생리학·의학·물리학·화학·경제학에 걸쳐 14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유전학 G.J. 멘델, 심리학 S. 프로이트, 인류학 W. 슈미트, 지질학 E. 쥐스, 경제학 A. 멩거 등은 큰 공헌을 한 학자들이다. 빈대학을 비롯해 12개 종합·단과대학이 있으며, 6개 예술대학이 있다. 박사과정 수료자의 연구기관으로는 빈고등학술연구소(사회과학), 빈외교아카데미가 있다. 학술의 최고결집체는 1847년 창립된 오스트리아학사원과 1960년 창립된 루트비히볼츠만협회가 대표적이다. 또, 동·서 13개국이 국제기관으로 설립한 국제응용시스템연구기관 등 수많은 연구·정보센터가 있다.

오스트리아와 한국과의 관계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한국과는 1963년 5월, 북한과는 1974년 12월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한국과는 무역협정(1971)·사증면제협정(1979)·항공협정(1979)·2중과세방지협정(1985)·투자보장협정(1991)·과학기술협력협정(1995) 등을 체결하였으며, 2001년 대한수입 2억 2356만 달러, 대한수출 2억 8496만 달러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교민 327명, 체류자 1282명(2003)이다. 북한과는 민간무역협정(1960), 무역협정(1969), 무역 및 지불에 관한 협정(1978), 항공운수협정(1979) 등을 체결하였다.

연표
750 초기철기시대, 할슈타트문화(~BC 400)
150 켈트인, 노리쿰왕국 창건
BC 15 로마, 노리쿰을 속주로 삼음
AD 100 로마의 성채로 빈도보나 건설. 빈의 기원
435 훈족의 왕 아틸라의 지배(~453)
791 카를 1세 아바르족 정벌. 오스트마르크 설치(~796)
955 오토 1세, 마자르인 격퇴
962 신성로마제국 성립
976 오스트마르크를 변경백(邊境伯) 영지로 삼아 바벤베르크가에 봉토로 줌
1077 성직서임권 투쟁(~1122)
1156 황제 프르드리히 1세, 오스트리아를 세습공령으로 승격시킴
1192 오스트리아공령에 슈타이어마르크공령을 합병
1246 오스트리아 대공위시대(~73)
1251 보헤미아왕 오토카르 2세, 빈 점령
1273 합스부르크백작 루돌프 1세, 독일황제로 선출됨
1278 루돌프 1세, 오토카르 2세를 패사시킴
1282 루돌프 1세, 아들들에게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를 다스리게 함.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 지배가 시작됨
1291 스위스독립전쟁 시작됨
1356 룩셈부르크가 황제 카를 4세, 금인칙서(金印勅書) 내림
1438 합스부르크가 알브레히트 2세, 황제가 됨
1477 합스부르크가 막시밀리안 1세, 부르군트 공주와 결혼
1496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필립, 에스파냐왕녀와 결혼
1515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페르디난트 1세, 보헤미아-헝가리왕녀인 안나와 결혼
1519 황제 카를 5세(~56), 합스부르크제국 실현
1521 합스부르크가, 에스파냐계와 오스트리아계로 분립
1526 모하치 싸움에서 보헤미아-헝가리왕 라요시 2세 패사.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헝가리 두 왕국 상속
1529 오스만투르크(제국), 제1차 빈 포위
1555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和議)
1556 페르디난트 1세, 황제 등극
1618 30년 전쟁(~48)
1667 루이 14세 침략전쟁(67~68 플랑드르, 72~78 네덜란드, 88~97 프팔츠)
1683 오스만투르크(제국), 제2차 빈 포위
1699 카를로바츠 화약(和約), 오스트리아·헝가리 전토 확보
1701 에스파냐계승전쟁(~14)
1713 카를6세,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 제정
1740 마리아 테레지아 즉위, 오스트리아계승전쟁(~48)
1756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동맹에 성공. 7년 전쟁(~63)
1781 요제프 2세, 농노제폐지령과 관용령 발표
1789 프랑스혁명 일어남
1804 나폴레옹, 황제에 추대됨. 프란츠 1세, 오스트리아황제가 됨
1806 독일 황제 프란츠 2세, 신성로마제국 붕괴 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남
1810 나폴레옹, 합스부르크가 마리아 루이자와 결혼
1814 빈회의(~15). 그뒤로 K.W.N.L 메테르니히 반동체제 이어짐
1848 프랑스 2월 혁명. 독일·오스트리아 3월 혁명
1851 반혁명 승리로 신절대주의 바흐체제 출범
1859 이탈리아통일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패전
1860 10월칙서
1861 2월헌법
1866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참패
1867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제국 성립
1871 포로이센-프랑스전쟁 끝남. 독일제국 성립
1879 독일-오스트리아동맹, 82년 이탈리아를 가입시켜 3국동맹 성립
1888 오스트리아사회민주당 결성
1891 러시아-프랑스 동맹
1904 영국-프랑스협상
1907 보통선거제 실지
1909 영국-러시아협상, 그 뒤 3국협상 결성됨. 오스트리아사회민주당에서 체코슬로바키아사회민주당 분당
1914 사라예보사건, 제1차세계대전 일어남(~18)
1918 합스부르크가 황제 카를 1세 퇴위. 오스트리아공화국 성립
1919 생 제르맹조약에 따라 합스부르크제국 해체
1932 기독교사회당 C.E. 돌푸스내각 성립
1938 독일-오스트리아 합방
1939 제2차세계대전 일어남(~45)
1945 소련군, 빈 점령. 4개국점령시대 이어짐
1955 오스트리아국가조약 조인. 영세중립국으로 주권회복
1972 유럽공동체(EC)와의 자유무역협정 조인
1983 총선거에서 사회당 단독과반수 얻음
1986 사회당 K. 발트하임내각 성립.
1989 EC 가입
1992 T. 클레스틸 대통령 취임
1995 EU 가입
1998 T. 클레스틸 대통령 재선
2000 극우파 자유당과 보수파 인민당 연립정부 공식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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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14일




성 이슈트만 성당

기독교를 헝가리에 전파한 위업으로 기독교의 성인으로 추대된 이슈트반 성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부다페스트 최대의 성당으로, 50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내부 기둥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기둥이 지탱하는 아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 교회의 탑은 96m로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높으며 이 숫자는 헝가리의 건국된 해인 896년의 96을 의미한다. 도나우 강변의 모든 건축물은 도시 미관을 위해 이보다 높이 지을 수 없게 규제되어 있다.

성당의 정문 위에는 오른손에 홀을, 왼손에 구슬을 들고 있는 성이슈트반의 동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제단의 뒤쪽에 가면 성이슈트반의 오른손이 봉헌된 ‘신성한 오른손 성당’이 있다. 헝가리 인들은 이 신성한 손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이 손으로 인해 공산정권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다뉴브강 유람선에서







부다 왕궁

13세기 몽고 침입 이후에 에스테르곰에서 이곳으로 피난 온 벨라 4세는 방어를 위해 높이 솟은 부다의 언덕에 최초로 왕궁을 지었다. 이후 마차시 왕 시절에 모든 건물들은 르네상스 스타일로 변형되었고, 궁전은 중부 유럽의 문화, 예술,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17세기에는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현재의 크기로 개축되었고, 지금은 역사박물관과 국립미술관, 국립도서관 등으로 쓰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된 현장을 복구하면서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들은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노동운동박물관에는 헝가리 투쟁운동과 사회주의 하의 헝가리 모습을 담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국립미술관에는 11세기부터 현재까지의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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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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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의 요새

왕궁 언덕의 동쪽에 우뚝 서 있는 네오 로마네스크와 네오 고딕 양식이 절묘하게 혼재된 건물로, 1899년에서 1905년 사이에 지어졌다. 헝가리 애국정신의 한 상징으로 19세기 시민군이 왕궁을 지키고 있을 때 도나우강의 어부들이 강을 건너 기습하는 적을 막기 위해 이 요새를 방어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중세에는 어부들이 도나우강에서 왕궁 지구에 있는 어시장으로 가는 지름길로 사용되었다.

동양적인 색깔이 짙은 고깔모자 모양을 한 일곱 개의 탑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건국 당시의 7부족을 상징한다. 전체가 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얀 색의 화려한 성벽과 마차시교회까지 뻗어있는 계단이 매우 아름답다. ‘도나우의 진주’라 불리는 부다페스트 전체를 굽어 볼 수 있는 뷰포인트로, 이곳에서 보이는 부다페스트의 경관이 1987년 유네스코가 제정하는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마차시 성당

13세기 중엽에 세워진 마차시교회는 헝가리의 가장 위대했던 왕인 마차시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마차시 왕의 두 번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으며, 합스부르크 최후의 황제인 카를 4세의 대관식을 포함하여 3번의 대관식이 거행되어 대관식 교회라고도 부른다. 16세기에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슬람사원인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17세기에는 다시 가톨릭 교회가 되었고,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기 때문에 이슬람적인 분위기와 카톨릭적인 분위기가 혼재되어 묘한 매력을 풍긴다.

교회의 지붕은 원색의 타일을 사용한 모자이크 모양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며, 내부는 헝가리 역사의 중요한 장면들을 묘사한 프레스코화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여름밤에 열리는 오르간 콘서트는 뛰어난 음향과 완벽한 분위기로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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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14일

현지 가이드 - 자칭 명가이드 송인선(여)

엘리자베스 다리에서 조깅을 한다나...

여행정보http://www.hanatour.com/asp/travelinfo/if-12000.asp?country_code=HU





영웅광장

가운데-가브리엘 천사상, 왼쪽-헝가리 왕, 오른쪽-민족지도자 상

헝가리 건국 1000년 기념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1896년에 지어진 광장이다. 광장 중앙에는 36m 높이의 기둥이 있는데, 꼭대기에는 가브리엘 대천사의 조각상이 있다. 기둥 옆에는 마자르의 7개 부족장들의 동상이 있다.

이 기둥을 기준으로 반원의 형태로 주랑이 2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곳에는 헝가리의 역대 왕과 영웅들이 연대순으로 조각되어 있다.







겔레르뜨 언덕에서

다뉴브(도나우) 강과세체니 다리가 보입니다.

겔레르트 언덕(Gellert hegy)

서울의 남산처럼 부다페스트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왕궁의 언덕 남쪽에 있는 해발 235m의 바위산이다. 왕궁의 언덕이라 불리는 곳에는 겔레르트 언덕 외에도 마차시 언덕, 마르노티비치 언덕 등의 완만한 언덕들이 있는데, 그중 이곳 겔레르트 언덕은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가장 전망좋은 곳으로 꼽힌다.

겔레르트라는 이름은 이태리 선교사로서 이 언덕에서 순교한 한 사람의 이름이라고 하며, 이곳에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고대에 이곳은 마녀의 소굴이었다고 한다. 언덕 중턱에는 이 겔레르트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페스트 쪽에서 올려다 보면 잘 보인다. 또 1848년 혁명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돌의 성체가 있던 곳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독립을 기념하는 뜻으로 14m 높이의 모스크바쪽을 향하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기도 했다.

1900년대 초에만 해도 이곳에는 술집과 매춘굴, 도박장이 가득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고급 레스토랑과 카페, 온천이 들어서 있는 유명한 관광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세체니 다리

도나우강의 진주로 알려진 부다페스트에 가장 먼저 만들어진 다리로 세체니 이슈트반 백작의 아이디어로 시작하여 스코틀랜드인 클라크 아담에 의해 건설되었고, 당시의 이 다리는 경제와 사회 발전의 상징이었다. 이후 1945년에 독일군에 의해 다리가 폭파되었으나 다리를 만든 지 100년이 되던 1949년에 다시 개통되었다. 세체니라는 이름은 이 다리에 공헌한 세체니 백작을 일컫기도 하지만 밤을 밝히는 전구의 모습이 마치 사슬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 졌다.

그리고 다리 난간에는 혀가 없다고 전해지는 사자 상이 있으며, 이는 양분된 부다와 세체니 간의 결속력을 상징한다. 지금은 부다페스트의 야경에서 빼놓을 없는 아름다운 다리로 자리하고 있다.

다뉴브강 (-江 Danube)

요약

볼가강 다음가는 유럽 제2의 강. 영어로는 다뉴브, 독일어로는 도나우(Donau), 헝가리어로는 두나(Duna), 루마니아어로는 두나리아(Dunărea), 불가리아어로는 두나브(Dunav) 이다.

설명

볼가강 다음가는 유럽 제2의 강. 영어로는 다뉴브, 독일어로는 도나우(Donau), 헝가리어로는 두나(Duna), 루마니아어로는 두나리아(Dunărea), 불가리아어로는 두나브(Dunav) 이다. 독일 남서부에서 발원하여 중·동유럽을 동서로 흘러 흑해로 들어가는 국제하천이다. 전체길이 약 2860㎞. 유역면적 81만 7000㎢. 유역폭은 평균 280㎞. 수원은 독일 바덴지방 슈바르츠발트산지이다. 유로는 남독일, 오스트리아 북부,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 국경을 동진하고, 부다페스트 북방 약 35㎞에서 남으로 굽어 유고슬라비아로 들어가고, 베오그라드 근처에서 다시 동류하여 불가리아·루마니아 국경을 흐른다. 하류부에서는 왈라키아평야를 북상해서 루마니아·몰도바 국경을 남류하는 프루트강과 합류, 양국 국경을 동진하며 흑해로 들어간다. 지류수는 3000에 가깝고, 빈·부다페스트·베오그라드 등을 관류한다.

유량·삼각주
알프스의 습곡산지를 2개소에서 횡단하고 알프스·카르파티아산맥, 트란실바니아 알프스·발칸산맥을 나누는데, 빈 근처부터 하류는 평야부를 흘러 경사가 완만하며, 경사가 큰 산간하천으로서의 유로는 짧다. 다뉴브강의 평균유량은 계절적 변동이 적고, 빈과 하류부의 브라일라에서의 하황계수(河況係數;최대유량과 최소유량의 비)는 빈이 4.0 이하, 브라일라가 30.0 내외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유량은 지극히 안정하다. 모든 유역의 연평균강수량은 약 750㎜, 유출률은 32.5%, 매년 공급되는 용해량은 2억 2500만t, 부유량은 5000만t이다. 이 물질들은 주로 하구 부근에 퇴적되기 때문에 삼각주의 끝을 매년 약 40m씩 전진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하구에서 상류 300㎞ 부근(루마니아의 칼라라시)까지는 삼각주 모양을 보이고 그물처럼 생긴 형상을 띠며 물줄기가 흘러간다. 특히 흑해에 들어가기 수십㎞ 앞에서 부채꼴로 열려진 3개의 지류(支流)는 북쪽부터 킬리아(Chilia)·슐리나(Sulina)·스핀투 게오르게(Sfintu Gheorghe)라고 불린다. 강폭은 100∼130m 전후이다. 킬리아지류를 다뉴브강의 본류로 치며, 현재 루마니아와 러시아연방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이 삼각주지대에는 무수한 호수(발타라고 한다)가 있고 수로로 연결된다. 삼각주 거점은 루마니아의 툴체아(Tulcea)이다.

항행
삼각주가 발달해서 하류부의 수심이 가장 깊은 곳에서도 5∼10m로 얕고, 더구나 하상의 변화, 유로의 변전이 현저하므로, 흘수(吃水)가 깊은 배는 하구에서 160㎞ 상류의 브라일라까지밖에 못 간다. 브라일라와 그 하류 갈라티는 루마니아의 중요한 밀[小麥(소맥)] 수출항이다. 소형선박이면 독일의 뷔르템베르크지방의 울름까지 항해가 가능하며, 남독일에서 지류 알트뮐강을 거쳐 라인강 지류 마인강으로 연락하는 마인 다뉴브(루트비히)운하를 통해서 북해 쪽으로 항행이 가능하다. 흑해로 흐른다는 것과 소형선박이면 흑해와 북해간을 연결·항해할 수 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항행하기에 가파르고 험한 곳은 유로 변화가 심한 삼각주지대와 트란실바니아 알프스와 발칸산맥을 가르는 계곡인 철문(Iron Gate) 근처의 협곡이다. 빈과 린츠 사이도 협곡을 이루어 운항하기가 쉽지 않다. 이 협곡 풍경들은 모두 세계적 경승지로서 유명하다. 하류부 삼각주 지대는 1984년 다뉴브-흑해운하(전체길이 64.2㎞)의 개통으로 다뉴브강과 흑해간이 약 400㎞ 단축되었고, 또 슬로바키아 중부에서 다뉴브·오데르운하가 완성되어 흑해와 발트해도 연결되었다.

국제하천 다뉴브강
다뉴브강은 관개와 발전에 이용되고 국제하천으로서 동유럽문화와 교역상 중요한 기능을 해 왔다. 통과국은 독일·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불가리아·우크라이나 등 9개국에 이르며 예부터 항행권을 둘러싸고 유역 여러 나라 사이에 중대한 관심과 분규를 일으켜 왔다. 그러나 통과국수가 많은 것이 대규모의 인공적 변화를 막아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한 나라에만 흐르는 내륙하천으로 세계 제일인 러시아연방의 볼가강과 비교할 경우, 볼가강은 운하·수문·저수지의 연속으로 인공적 변화가 심하다는 점에서 양자는 현저하게 취향을 달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
그리스의 헤시오도스와 헤로도토스의 책에는 이미 다뉴브강 유역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로마시대 아우구스투스황제(재위 BC 27∼AD 14)는 제국판도의 북쪽 한계를 다뉴브강 기슭까지 확장하였다. 그 뒤 수세기 동안 다뉴브강은 로마제국과 이민족과의 경계선이 되었다. 그 결과 연안에 요새가 만들어져서 현재의 연안도시 기반이 되었다. 4세기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자 게르만족을 비롯하여 슬라브족·마자르인이 이 강 유역으로 이동·침입하였다. 14세기 이후 오스만제국이 발칸반도로 진출하여 강의 중·하류를 지배하에 넣었다. 18세기 베오그라드 주변지역은 합스부르크제국과 오스만제국의 경계선을 이루었다. 이 무렵부터 군사·상업상 교통로로서 중요성이 증대하였고, 연안 여러 민족은 항행의 자유가 큰 관심사였다. 1856년 크림전쟁을 종결시킨 파리조약으로 드디어 다뉴브강 항행의 자유가 보장되고, 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 등 열강을 중심으로 한 다뉴브항행위원회가 창설되었으나 연안 여러 민족은 제외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후에도 연안 여러 민족의 다뉴브강 관리 주장은 베르사유조약으로 기각되었다. 1930년대 나치 독일의 진출로 다뉴브항행위원회는 해산되었다. 1948년, 사회주의정권하의 연안제국(동유럽)은 베오그라드에 모여 다뉴브강 항행의 자유, 무장의 자유, 관리위원회를 연안제국에 한정시킨다는 취지의 협정을 체결하고, 다뉴브강 관리위원회를 창설했는데, 하천공동개발이 활발하며,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가 협력하여 완성한 철문댐은 양국에 많은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











헝가리 (Republic of Hungary)

요약

중부 유럽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헝가리공화국.

설명

중부 유럽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헝가리공화국. 면적 9만 3033㎢. 인구 1004만 5000명(2003). 동쪽으로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서쪽으로 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 남쪽으로 크로아티아와 유고슬라비아, 북쪽으로는 슬로바키아에 둘러싸인 내륙국가이다. 수도는 부다페스트.

헝가리의 자연·지지
신생대 제3기에 형성된 알프스·카르파티아·트란실바니아알프스 및 디나르알프스 등 여러 산맥에 둘러싸인 대규모 구조분지의 주요부분을 차지한다. 국토의 약 60%는 해발고도 200m 이하의 낮은 평야로 다뉴브강이 거의 중앙부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로지른다.

헝가리 국토 대부분은 대륙성기후에 속하지만 남서부 산지는 어느 정도 해양성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부다페스트의 연평균기온은 11.3℃, 연강수량 615.1㎜이다.

국토는 지형적 특색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뉜다.

척량산지(脊梁山地)
중앙산지 또는 북부중대(中帶)산지라고도 한다. 제3기에 형성된 습곡산맥의 한 지류로서 지질구조적으로는 연속해 있으나 그 뒤 국지적인 화산활동을 수반한 단층운동에 의해 분단되어 많은 지루산지(地壘山地)가 형성되었다. 또한 다뉴브강의 서안 트란스다뉴비아대지쪽에는 크고 작은 여러 형태의 산지가 알프스 동쪽 기슭에서 다뉴브강변까지 이어진다. 이들 중 바코뉘산지는 규모가 가장 큰 산지로서 아름다운 삼림으로 덮여 있으며, 그 주변지역에는 보크사이트가 매장되어 있다.

또한 바코뉘산지 남쪽 가장자리에는 단층운동에 의해 형성된 동유럽 최대의 발라톤호가 있다. 호숫가에는 유럽에서 흔치 않은 현무암의 바다초니산이 멀리 바라다보이며, 그 산기슭은 포도주의 명산지로 유명하다. 이 척량산지는 또다시 다뉴브강 동쪽으로 뻗어 베르소니·체르하트·마트라·뷔크·젬플렌 등의 산지군을 형성한다. 마트라산지의 케시산(1015m)은 헝가리 최고봉인데 그 주변은 석탄·갈탄 산지로 소규모의 철광석도 산출되며 그 중심지인 미슈콜츠는 인구 제2위의 공업도시이다. 그 북부에 펼쳐져 있는 돌로마이트(白雲岩)지역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를 가진 아그텔렉의 종유굴이 있어서 관광·휴양지로 유명하다.

소평원과 대평원
소평원은 알프스산맥·카르파티아산맥 및 척량산지로 둘러싸인 구조분지로서 다뉴브강 서안부를 차지하며 알프스에서 발원하는 라바강·라브카강 등이 이 지역을 동쪽으로 흐르며 다뉴브강 북쪽은 슬로바키아령이다. 대평원의 대부분은 낮고 편평한 티소강 유역에 걸치며 광대한 평원을 형성한다. 외견상으로는 토양의 질이 고른 단순한 평탄지처럼 보이지만 오랜 지질시대를 통하여 티소강과 그 지류인 쾨뢰시강은 이따금 범람하여 유로를 바꾸었기 때문에 자연제방 자리에는 사질토의 낮은 언덕을 형성하고 하천이 흐르던 자리에는 저습지 등이 복잡한 토양층을 형성하였다. 또한 바람의 작용에 의한 비사지(飛砂地)나 사구지 등이 평탄한 데 비하여 토양·수문조건이 비교적 복잡하게 되어 있다. 북부의 니르세그는 황토 및 사질토양이 풍부하여 양질의 감자·옥수수·담배 등을 생산한다. 중부의 다뉴브강과 티소강 사이의 지역은 북서에서 남동으로 이어진 사구열의 발달로 배수가 잘 되는 사질토양지대이므로 케치케메트를 중심으로 포도·살구·딸기·파프리카 등의 과수재배와 원예농업이 활발하다.

티소강 동부의 쾨뢰시강 하류역은 지하수위는 비교적 높지만 강수량에 비해 증발량이 많아 염분이 집적되기 쉬워 알칼리성 토양인 곳이 많다. 이 때문에 경지의 개발이 제한되어 자연발생한 초원은 예로부터 방목장으로 이용되어 목축업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스텝 모양의 초원을 푸스타(puszta)라고 하는데, 제2차세계대전 후 티소강 상류역에서의 댐 건설에 의한 발전과 관계용수의 확보, 하류역에서의 배수시설 건설로 푸스타는 차츰 경지로 변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후 제1차 5개년계획에 따라 포도산지로 유명한 토카이 남쪽 티소강에 티사루크댐과 관개용수로가 건설되었다.

트란스다뉴비아대지
황토로 덮인 광대한 대지로 서쪽으로 갈수록 완만하게 고도가 높아지면서 알프스 산기슭으로 이어진다. 많은 하천이 이 대지 위를 동쪽으로 가로질러 흐른다. 지하수위는 지표면 밑 20∼30m로 낮기 때문에 가뭄 때에는 한해(旱害)를 입기 쉽다.

메체크산지
트란스다뉴비아대지 남부에 고립해 있는 이 산지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지질구조적으로는 디나르알프스계에 이어져 있다. 산지 주변에 규모는 작지만 헝가리에서 가장 양질의 석탄을 생산하는 코믈로탄전 및 페치탄전이 있다. 이 나라를 관류하는 다뉴브강은 유럽 중·동부 최대의 국제하천이며 항공로의 발달로 그 가치가 떨어졌다고 하지만 지금도 중요한 교역교통로의 하나이다. 부다페스트는 중요한 국제하항 중 하나로 매일 다뉴브강의 하황정보(河況情報)를 연안에 있는 여러 하항으로 발신한다.

주별 면적·인구
면적(㎢) 인구(명) 중심도시
1.부다페스트 525 1,775,203 -
2.코마롬에스테르곰 2,265 316,780 토토바니오
3.소볼치소트마르베레그 5,937 582,795 니레지하조
4.졸로 3,784 298,056 졸로에게르세그
5.지외르쇼프론 4,089 434,956 지외르
6.소모지 6,036 335,463 코포슈바르
7.야사나기쿤솔노크 5,582 415,819 솔노크
8.촌그라드 4,263 433,388 세게드
9.톨노 3,703 250,062 섹사르드
10.노그라드 2,544 220,576 솔고타랸
11.호지두비호르 6,211 553,043 데브레첸
12.보시 3,336 268,653 솜바트헤이
13.바치키슈쿤 8,445 546,753 케치케메트
14.보로니오 4,430 408,019 페치
15.폐예르 4,359 434,547 세케슈페헤르바르
16.베케시 5,631 397,074 베케슈초보
17.페슈트 6,393 1,080,759 부다페스트
18.베스프렘 4,613 374,346 베스프렘
19.헤베시 3,637 325,673 에게르
20.보르쇼드오보우이젬플텐 7,247 745,154 미슈콜츠
93,030 10,197,119 -
*자료: 브리태니커 연감(2003)

헝가리의 역사
BC 10세기 마자르족은 조상 대대로 살던 땅 우랄을 출발한 뒤 터키계의 여러 민족과 접촉하다가 895년 카르파티아분지로 침입·정착하였다. 마자르 7부족은 이 땅에 연합국가를 세우고 이중수장제(二重首長制)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차츰 유목·기마생활에서 정주·농경으로 생활양식이 변화하자 씨족적 지배체제도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10세기 말에는 게자와 이스트반 1세 부자에 의해 국가통일이 이루어져 초대왕조인 아르파드왕조가 성립되었다. 동시에 그리스도교로의 귀의도 진척되어 1000년 이스트반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국왕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스트반 지배 아래서는 왕성주제(王城州制)가 실시되었고 봉건적 주종관계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국내에서는 이교반란과 지방영주층이 대두하였고, 대외적으로도 발칸반도 등을 둘러싸고 로마·비잔틴제국에 대립하여 지배체제가 동요하였다. 12세기 말부터는 왕령지(王領地)의 분해가 진행되어 대호족이 할거하였다. 1222년 대호족에 대항하여 귀족의 여러 가지 특권을 인정하는 금인헌장(金印憲章)이 국왕에 의해 공포되었다. 1241년 몽골 침입 후 벨라 4세는 여러 민족의 식민에 의한 국토의 재건을 시도하였고, 또한 13세기 말에는 농민이 이동의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조건은 대호족을 이롭게 만들어 군웅할거시대를 초래하였다. 국토가 영방(領邦)으로 분열되는 것은 소영주·귀족과 국왕과의 동맹으로 모면하였으나 분권화의 경향은 계속되어 대귀족과 중소귀족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14세기 중엽 이후 대외적으로는 세력이 확장되었으나, 국내적으로 대귀족의 강대화가 추진되어 15세기 전반에 이르러 국토의 약 40%를 60여 대귀족이 차지하게 되었다. 1458년 마티아스 1세가 중·소 귀족의 지지를 얻어 국왕이 되자 대귀족을 억누르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어 중부유럽에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국내는 또다시 혼란해졌으며 1514년 대(對)오스만 십자군 모병을 계기로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에 패한 농민은 이동의 자유를 빼앗겼고 부역을 강요당하였다. 혼란 속에 약체화된 헝가리군은 1526년 모하치전투에서 오스만제국군에게 패한 뒤 17세기 말까지 중앙헝가리는 오스만제국의 점령 아래 있었고 헝가리 서부는 합스부르크가의 세력 아래 들어갔다.

한편 동부의 트란실바니아는 오스만제국의 보호 아래 있으면서도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30년전쟁에서는 트란실바니아공 베틀렌이 이끄는 군대가 대합스부르크동부전선을 형성하였다. 또한 18세기 초에는 라코치 피렌체 2세가 대합스부르크독립전쟁을 지휘하였다. 종교적으로도 트란실바니아는 신교의 요새로 존속하였다. 독립전쟁에서 패배한 뒤 헝가리는 합스부르크가의 세습왕제를 인정하였고, 제1차세계대전까지 지배를 받으며 독일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발전하여 18세기말 농민은 다시 이동의 자유를 얻었다. 19세기에 나폴레옹전쟁과 서유럽의 여러 개혁의 영향으로 중류귀족의 지지를 받은 혁명가 L. 코슈트의 지도로 1848년 민족독립을 목표로 한 혁명이 일어나 농노해방을 실현시켰다. 혁명이 진압되고 합스부르크절대주의가 부활되었으나 1867년 안팎으로 위기에 빠진 오스트리아와의 사이에 아우스글라이히(和協)가 성립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왕국이 탄생하였다. 이 체제 속에서 헝가리는 경제적인 번영을 이룩하였다.

제1차세계대전말 이중왕국 붕괴와 함께 혁명이 발발하여 M. 카로이 내각이 탄생하였으며 1918년 11월 공산당이 창건되어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듬해 3월 외교정책에서 실패한 카로이에 이어 B. 쿤이 이끄는 소비에트공화국이 성립되었으나, 국제적 반혁명과 국내정책의 실패로 약 4개월만에 무너지고 M. 호르티 데 노지바냐에 의한 권위주의적 지배체제가 들어섰다. 호르티 데 노지바냐체제에서는 경제가 침체되었고 몰락 중류귀족층이 기반이 되어 파시즘화가 진행되었다. 외교정책에서도 친이탈리아·친독일파가 실지회복운동(失地回復運動)과 결부되어 우위를 차지하였으며 제2차세계대전에서는 추축국쪽에 참전하였다. 전쟁 후 소련군의 점령 밑에서 여러 가지 개혁이 이루어졌고 1948년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합동하여 공장 등의 국유화를 이루었으며, 농업의 집단화도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되었다. 그 뒤 헝가리사건 등 1950년대 정치적 변동과 1960년대말 이래의 여러 차례에 걸친 경제개혁을 거쳐 안정된 사회발전의 길을 걸었다.

동구권 가운데 가장 활발한 개혁을 추진해온 헝가리는 1989년 1월 동구권 최초로 복수정당제를 도입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공산당)은 1989년 10월 당대회에서 공산당을 공식해체, 사회당(HSP)으로 변신해 다당제·시장경제 도입 등을 포함한 신강령을 채택했다. 10월 다당제와 대통령제의 개헌안이 통과, 국명도 인민공화국에서 공화국으로 바꿨다. 1990년 5월 비공산연립정부가 수립된 이래 2003년 현재까지 비슷한 골격을 유지해 오고 있다.

헝가리의 정치·외교·군사

헝가리의 정치
1990년 3월과 4월 전후 최초로 실시된 자유총선거에서 온건중도우파인 민주포럼(HDF)이 총 386석중 165석을 차지, 집권 사회당은 제4당으로 전락했다. 같은 해 5월 HDF를 주축으로 독립소지주당·기민당이 참여하는 비공산연정이 공식출범하고 민주포럼의 안탈 의장이 총리에 취임했다. 1994년 5월 총선 1·2차투표에서 줄라 호른 전외무장관의 사회당이 총 386석중 209석을 차지, 정국주도세력으로 부상했다. HDF는 경제정책 실패와 내분으로 참패했다. HSP는 제2당인 자유민주동맹(AFD)과 연정을 구성키로 합의, 7월 HSP의 줄라 호른을 새 총리로 하는 동구권 최초의 좌우파 대연립정부가 출범했다. 1995년 6월 곤츠 대통령은 의회의 대통령선출투표에서 재선되었고 2000년 대선에서는 페렌츠 마들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2년 총선에서는 사회당과 자유민주동맹의 좌파연합이 승리했다.

헝가리의 외교
공산정권 붕괴후 서방과의 관계개선을 적극 추진, 중유럽 국가들의 역내협력 강화도 중시했다. 1992년 EU준회원국, 1994년 4월 가입신청서를 제출, 1999년중 EU가입을 목표로 외교역량을 동원했다. 1994년 2월 나토의 평화동반자계획(PFP)협정에 서명, 5월 서구동맹(WEU) 준회원국 지위를 확보했다.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총리가 1994년 3월 헝가리를 방문, 채무상환문제에 관한 협정에 조인했다. 러시아는 헝가리에 대한 10억 달러의 채무를 기계와 설비 수출로 1998년까지 변제할 의사를 밝혔다. 1990년 6월 바르샤바조약기구를 탈퇴했다. 호른 총리는 동구권 주변국과의 선린관계를 적극 추진하여, 루마니아내 헝가리계 소수민족문제로 마찰을 빚던 루마니아와의 긴장도 다소 완화되었다. 1995년 4월 중유럽 8개국 정상회담을 개최했으며, 7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슬로바키아 3개국 정상은 경제협력을 강화키로 합의했다. 슬로바키아와는 1977년부터 <다뉴브강 댐건설>을 둘러싸고 오랜 분쟁을 계속, 1997년 10월 국제사법재판소는 이 분쟁과 관련하여, 양국 모두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1997년 7월과 12월 각각 나토 및 유럽연합(EU) 가입우선협상대상국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2002년 EU 정상회담에서 신규 회원국으로 인정되어 2004년 5월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헝가리의 군사
1955년 창군 이래 바르샤바조약기구에, 1969년 주네브군축위원회에 가입하였으나 1990년 6월 26일 헝가리 의회는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를 만장일치로 승인, 이 기구 해체를 선도한 결과가 되었다. 1991년 6월 헝가리 주둔 소련군이 완전히 철수하였다. 1999년 NATO에 가입하였다. 복무기간 1년의 징병제를 실시한다. 국방비 지출액은 1985년 35억 1700만 달러(GDP의 7.2%)에서 2002년 1억 840만 달러로 크게 낮아졌다. 총병력은 육군 2만 3600명, 공군 7700명(2002) 등이다.

헝가리의 경제·산업
19세기 중반 헝가리는 합스부르크제국 내의 낙후된 농업지대였다. 아우스글라이히 이후 오스트리아 등 서유럽자본의 영향 아래 공업화가 진행되어 전통적으로 융성한 식품공업 외에 광산·기계 등의 부문도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제1·2차세계대전 동안 섬유공업의 확충 및 중공업도 진전하였다. 이 기간에도 기본적으로는 농업이 주산업이었고 1941년 농업인구는 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전후 토지개혁으로 대토지소유가 해체되고 소농이 지배적인 농업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950년대 농업집단화, 1960년대 집단화농장의 합동운영을 거쳐 오늘날에는 대규모 협동조합농장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이 운영되고 있다.

한편 낙후된 공업은 기업의 국유화, 1950년대 전반의 급격한 중공업화, 1960년대부터 공업진흥정책 등으로 공업의 중심이 중화학부문으로 옮겨졌다. 1956년 헝가리 사건을 계기로 종래의 과도한 중앙집권적인 계획경제를 고치기 위해 <경제개혁>이 여러 형태로 추진되고 있다. 경제개혁안은 1966년 결정되었으며 1968년 이후 기업에 활동의 결정권을 대폭 인정하고 이윤추구를 용인하는 시장기구를 도입하는 등 종래의 사회주의경제의 틀을 넘어 개혁이 실시되어왔다.

1980년대 들어 다시 경쟁원리의 명확화와 저수익 부문의 파산선고에 따른 정리 등 제2단계 개혁이 진행되었으며, 개인의 경영 능력에 기초를 두는 실질적 합명회사·합자회사 등의 새로운 기업형태의 도입도 실시되었다. 또한 지방자치단체나 공단의 채권발행, 파산법 시행, 공개증권거래소의 개설계획 등 대폭적인 개혁이 추진되어 왔다. 1989년 사기업 육성과 외국인에 대한 투자규제를 완화하는 신회사법을 제정하였으며 1990년 들어서는 민영화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어 국영기업의 민영화 및 중소기업 육성노력에 박차를 가하였다.

1990년부터 정부는 가격자유화·임금통제·정부보조금 삭감 및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한 긴축정책 수행 등 포괄적 경제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경제개혁에 따른 과도기적 혼란과 IMF 경제안정화계획에 부응한 긴축정책 등의 부작용, 에너지부족, 가격자유화에 따른 인플레, 구코메콘 해체로 인한 수출시장 상실 및 과도한 외채부담 등으로 1990~1993년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했다. 1993년 이후 경제안정화조치에 따른 시장혼란의 진정, 경제개혁성과의 가시화, 공업생산 및 투자증가, EU 등 서방국과의 관계강화로 1994~1995년 2% 이상, 1996~1997년 3~4%의 성장을 달성했다. 최근 경제개혁인 보클리스정책 시행에 따라 안정된 경제성장을 유지하고 있다. 1996년 5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2002년 국내총생산은 1340억 달러, 1인당 국내총생산은 1만 3300달러를 기록하였다.

농업·임업·수산업
농업형태는 혼합적이며 주요 작물로는 옥수수·밀 등이 있고 사과·포도 등 여러 과일류도 생산된다. 축산으로는 돼지가 가장 많고 경주마의 생산으로 유명하다. 수산업에서는 하천·호소에서 잉어·농어 등의 민물고기를 연간 약 4만t 정도 어획한다. 삼림자원은 많지 않은 편으로 산림은 국토의 18% 정도를 차지하며 졸참나무·아카시아·너도밤나무·삼나무를 중심으로 연간 500만∼600만㎥의 목재를 생산한다

광공업
광물자원은 빈약하여 철광석 20%, 석유 10% 정도를 자급하고 있다. 다만 보크사이트는 연간 약 300만t을 생산하며 수출도 하고 있다. 그 밖에 천연가스의 60%, 석탄(약 75%가 갈탄)의 90% 이상이 자체공급되어 에너지 자급률은 전체적으로 50%에 가깝다. 이러한 에너지 기반의 취약성도 작용하여 공업은 자원이 절약되고 특히 가공도가 높은 제품의 생산이 두드러진다. 또 소비생산으로의 일관된 중시정책에 의해 공업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소비재의 생산비중이 매우 높으며 이것은 동유럽 여러 나라 중 뚜렷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공업생산의 주력은 기계·금속가공·화학·식품가공 등이다. 공업생산에서의 기계·화학 공업부문 비중이 계속 확대되고 식품생산이 재검토되는 반면 연료·철강·비철금속·건재의 여러 부문이 감소하는 경향이다. 또 소비재 중에서도 유리·도자기 공업의 생산수준은 유지되고 있으나 섬유·봉제품의 생산비중은 감소하였다.

무역
무역의존도가 높은 편으로 국내최종생산물의 30%가 수출되는데, 특히 수출의 80%를 차지하는 광공업부문에서는 최종생산물의 50%가 수출된다. 수입은 총지출의 15%를 차지한다. 무역품목은 선진자본주의 국가에 반가공품·완성품을 수입하고 반가공품·식료품을 수출하며 개발도상국에는 원재료·식료품을 수입해서 반가공품·완성품을 수출한다. 주요 수출품은 기계·차량·의약품·섬유류·곡물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석유·기계·자동차·화학품·철강·섬유원료 등이다.

무역수지는 개발도상국과의 무역을 제외하고는 적자였으나, 1980년 전반에는 수입억제와 환율저하 효과에 의해 흑자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전반 행해진 경제개혁의 진전으로 비국영부문에서의 투자수요가 급속히 높아졌으며 서방측 자본의 유입과 맞물려 수입이 급증함에 따라 1985년 이후 적자가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서방측과의 교역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제도적으로도 1972년 서방측 출자비율 49% 이내의 합병병기업 설립이 인가되어 1979년 이탈리아·프랑스·오스트리아·서독·일본과의 공동출자에 의한 중부유럽국제은행이 설립되었다. 2002년 수출액은 314억 달러, 수입액은 339억 달러이다.

헝가리의 사회

주민·언어
국민의 84.4%는 헝가리인이고 소수민족으로 독일인 2.4%, 슬로바키아인 0.9%, 루마니아인 1.0% 외에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집시·유대인 등이 있다. 외국에도 헝가리인이 살고 있는데 인근 여러 나라와 북아메리카에 약 450만 명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루마니아에는 약 170만 명, 체코와 슬로바키아에 60만 명이 살고 있으며, 유고슬라비아·오스트리아·러시아에도 많이 있다. 따라서 이들 여러 나라에서의 헝가리인 처우문제가 상호 외교관계에 미묘한 영향을 끼친다. 또한 미국의 200만 명, 캐나다의 14만 명의 헝가리인은 대부분이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유럽 전역에서 이주한 사람들과 그 자손들이지만, 제2차세계대전 후의 이민·망명자도 많다.

도시와 농촌의 인구비는 도시쪽이 약간 많은데 도시인구의 대부분은 수도 부다페스트에 집중해 있다. 인구의 자연증가율은 세계대전 후 계속 내려가 동유럽권에서는 유일하게 증가율이 감소하는 나라이다.

공용어는 헝가리어이며 러시아어는 의무교육기간인 8년간 교육되지만 전혀 보급되어 있지 않다. 청년·지식인층에는 영어가, 제2차세계대전 이전 세대인 장년층에는 독일어가 비교적 많이 사용되나 다른 나라에 비해 외국어의 보급률은 높지 않다. 소수민족의 언어는 지역적으로 의무교육 단계에서 보장되고 있다. 한편 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에는 각기 헝가리어 출판국이 있어서 헝가리어 서적이 발행되고 있다.

국민생활
근로자의 지위별 인구구성비는 소득 종사자 약 494만 명 중 노동자 55.7%, 사무직 26.3%, 농업생산협동조합원 14%, 자영업자 4%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취업인구가 감소하여 노동력 부족을 나타내고 있다. 근로시간은 1971년 7월부터 주 5일 42시간제를 단계적으로 채용하여 1982년 1월부터는 전국적으로 채택되었다. 1984년부터 주 40시간제가 받아들여졌다. 유급휴가는 연 15~24일이며 근속연수에 따라 늘어난다. 출산휴가는 3개월 유급이며 산전·산후 3년간은 일정액의 유급으로 육아휴가가 보장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여성도 취업하고 있어 한 가정의 월수입은 평균임금의 거의 2배가 된다.

정신근로자에 비해 육체노동자의 임금은 20% 정도 높다. 의료는 원칙적으로 무료이지만, 실제로는 진료 때 사례가 필요하며 상당한 비용을 강요받는다. 연금생활자가 해마다 증가하여 장래의 노인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혼자 사는 노인의 경우 연금만으로는 충분히 생활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한편 자녀를 둔 부인에게는 아동 수에 따라 아동수당이 지급된다.

교육·종교
초등학교는 8년제(6~14세)로 의무교육이며 무상이다. 중등교육은 4년제로 일반중학교 외에 직업중학교와 공업중학교가 있다. 일반중학교의 취학률은 69.1%, 직업중학교는 16.6%(1988)이다. 종합대학은 부다페스트·페치·세게드·데브레첸에 각각 1개교씩 있고 그 밖에 공과대학 6개교, 의과대학 4개교, 예술대학 3개교, 경제대학 1개교가 있다.

교회의 사회적인 영향력은 제2차세계대전 후 약화되었으나 1957년 종교의 자유와 교회의 권리가 재확인되었으며 1971년 정부와 로마교황청과의 관계도 정상화되었다. 국민의 57.8%가 가톨릭, 20%가 프로테스탄트이고 그 밖에 그리스정교도·유니테어리언·유대교도 등이 있다.

헝가리의 문화

국민문화의 개화
헝가리 국민문학의 시초는 16·17세기 2대 시인 B. 발라시·M. 즈리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국민문화가 꽃핀 것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반의 민족주의 고양기로 학사원·민족박물관·민족극장 등의 창설이 잇따랐으며, 시인 M. 초코나이 비테즈·M. 뵈뢰슈마르티, 독립전쟁에서 죽은 사랑과 혁명의 시인 S. 페퇴피, 극작가 K. 키슈팔루디, 사극 《뱅크밴(1821)》의 J. 카토나와 E. 시글리게티 등이 잇따라 나왔다.

음악에서도 민족적 격정을 상징하는 베르붕코슈양식의 발달과 독일음악의 영향을 받아 서유럽에서 널리 활동한 F. 리스트와 민족오페라 확립자 F. 에르켈이 나타났다. 학술분야에서는 비교언어학의 S. 자르마티, 티베트학의 S. 쾨뢰시 초마, 수학의 J. 볼리아이 등이 활동하였다. 이 국민문화의 개화는 독립전쟁 패배 후의 염세주의가 팽배한 가운데에서도 시인 J. 아라니와 시극 《인간의 비극》의 I. 마다치에게 계승되어 1867년 이중왕국 성립과 함께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부다페스트에는 오페라하우스를 비롯하여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서 세기전환기에 걸쳐 독특하고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였다.

미술에서는 역사화의 마다라스·B. 세케이, 벽화의 로츠, 사실파의 M. 문카치, 풍경화의 L. 파르·N. 페렌치, 천재화가 촌트바리, 인상파의 P. 시녜이 메르세 등이 등장하였으며 특히 공예미술은 조르나이의 아르누보 양식의 도자기가 유명하다. 문학에서는 M. 요카이와 헝가리 리얼리즘의 선구자 K. 미크사트, 과학에서는 산욕열을 연구한 I.P. 제멜바이스, 물리학의 L. 외트뵈시, 전기기관차의 칸도 등이 국제적으로 유명하다.

발전기
20세기에 접어들자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전통적인 국민주의를 뛰어넘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상징주의 시인 E. 아디를 중심으로 서유럽 문예사조의 영향을 받은 신세대그룹의 잡지 《뉴가트(西方)》가 1908년 창간되어 문단에 충격을 주었고, 이 파에서 M. 바비치, D. 코스톨라니, E. 모리츠 등이 배출되었다. 이 밖에 희곡 《릴리옴(1909)》의 F. 몰나르, 전위적 풍자의 F. 카린티 등의 도회파(都會派), 문학적 농촌사회지를 만든 민중파, V. 마야코프스키와 대비되는 요절시인 A. 요제프 등이 활동하였다. 시인으로는 L. 나지와 베레슈가 뛰어났다. 2002년에는 I. 케르테스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음악에서는 주로 빈에서 활동한 오페레타의 F. 레하르와 T. 가르만, 그리고 민요의 채록을 통하여 혁명적인 현대음악의 지평을 개척한 B. 바르토크와 E. 코다이 등의 작곡가가 활동하였다.

미술에서는 분리파와 연결되는 리프로나이, 전위파의 L. 카샤크, <노르차크(8인회)>의 주도자 케른슈토크와 델코비치의 표현주의가 꽃피었다.

학술에서는, 철학의 G. 루카치, 사회사상의 D. 사보, 생화학의 A. 센트죄르지, 국외로 나간 사회학의 O. 야시와 경제학의 K. 폴라니 등이 있다.

1910년대에 본격화된 영화계에서는 A. 코르다나 G.H. 커티스·페예슈·산타, 루마니아 국적의 쉬테 등 국외에도 널리 알려진 작가가 많이 있다. 영화계는 망명에서 귀국한 영화이론가 B. 발라즈가 제작한 《유럽의 어디에서(1947)》 이후 한때 침체하였으나 파브리·얀초에 이어 실험 그룹 <발라즈 스튜디오>에서 배출한 카보르·코샤·D. 사보, 단편·기록영화의 후사리크·호모키나지 등이 차례로 국제영화상을 받아 성황을 보이고 있다.

미술에서는 도예의 코바치가 유명하다. 음악에서는 지휘의 E. 오르만디·A. 도라티·G. 숄티와 첼로의 J. 슈타르케르, 바이올린의 J. 시게티 등 많은 거장을 낳은 나라이기도 하다. 특히 피아노의 랑키를 비롯한 국제적인 신예를 배출해내고 있으며, Z. 코다이의 음악교육이론은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도입하고 있다.

헝가리와 한국과의 관계
헝가리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북한과는 1948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정치·경제·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한국과는 1987년 8월 상호무역사무소 개설에 합의, 12월 부다페스트에 무역사무소를 개설하였으며 헝가리도 1988년 3월 서울에 상공회의소 사무실을 상주시켰다. 1988년 9월 양국은 준대사급 상주대표부를 교환하였으며 1989년 2월 21일 정식 수교하였다. 같은 해 2월 문화협정, 3월 이중과세방지협정 및 과학기술협력협정, 11월 항공협정 및 관광협정, 1991년 3월 일반여권 사증면제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통상은 2002년 대한수입 3억 6352만 달러, 대한수출 1531만 달러이다. 2003년 교민수는 32명이고, 체류자수는 427명이다.

연표
BC 1000 ~9 마자르족 우랄지방에서 이주 시작. 로마인, 지금의 헝가리 서부지역을 정복
AD 800 년경 마자르족의 자립화와 서방으로의 이동
895 카르파티아분지 정복.
972 그리스도교의 본격적인 포교 개시
1000 이스트반 1세(아르파드家) 대관, 초대 국왕이 됨
1046 바타의 이교도 반란
1172 세속대영주층 대두
1217 ~18 안드라시 2세, 십자군 지휘
1222 금인헌장(金印憲章) 포고
1241 ~42 몽골(타타르)의 침입
1301 아르파드가 단절. 바츨라프 3세(프셰미슬) 즉위
1342 라요수대왕(앙주가) 즉위
1351 중소귀족의 법적 권리 확대
1440 브와디스와프 1세(야겔로가) 즉위
1442 훈야디의 대(對)터키전쟁(~56)
1458 마티아스 1세(훈야디가) 즉위
1514 헝가리농민전쟁. 삼부법전 성립
1526 모하치의 싸움. 3분할시대(~1699)
1703 ~ 라코치의 대(對)합스부르크독립전쟁, 사투마레의 화약(1711)
1767 마리아 테레지아의 토지대장령
1805 헝가리어의 공용어화
1825 개혁의회 개시
1848 ~49 부르주아적 개혁과 독립전쟁
1851 합스부르크 절대주의의 도입
1867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 성립(아우스글라이히)
1868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타협
1869 민선의원 제1회총선거 실시
1875 ~ 자유당내각 시대(~1905)
1890 헝가리사회민주당 결성.
1918 부르주아혁명, 카로이내각 성립
1919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 성립
1919 ~ 호르티 데 노지바냐 반혁명정권(~44)
1921 합스부르크가의 왕위 폐지
1939 반공협정 참가
1945 소련군, 헝가리를 독일군으로부터 해방
1946 헝가리인민공화국 선언
1948 사공합동(社共合同), 공산당정권 성립
1956 헝가리사건, 카다르정권 성립
1968 경제개혁 개시
1984 의원선거의 복수후보자제도 도입
1988 카다르 물러나고 그로스가 대신함
1989 공산당 해체, 사회당으로 변신. 다당제와 대통령제 개헌. 국호를 헝가리공화국으로 개칭
1990 자유총선거. 민주포럼 압승. 대통령간선제 개헌
1994 총선거에서 승리한 사회당과 우파인 자유민주동맹의 연합정권 발족
1995 슬로바키아 헝가리계 국민에게 일정한 자치권 부여하는 조약 체결
1996 루마니아 헝가리계 주민의 지위와 국경보전관련조약 조인
1998 빅토르 오르반 총리 취임
1999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2000 8.4 페렌츠 마들 대통령 취임
2002

메제쉬 총리 취임, I. 케르테스 노벨문학상 수상.

부다페스트 (Budapest)

요약

헝가리 수도. 면적 525㎢.

설명

헝가리 수도. 면적 525㎢. 인구 182만 1552명(2000). 중북부의 헝가리분지에 있으며, 다뉴브강이 시내를 가로질러서 흐른다. 중부 유럽 최대의 도시로서 헝가리의 정치·문화·산업·교통의 중심지이다. 이 나라 전인구의 약 20%가 집중되어 있다. 지금의 부다페스트는 하나의 행정단위로서 통합되어 있으나, 다뉴브강 오른쪽 연안인 부다지구(地區)와 왼쪽 연안인 페스트지구는 오랜 동안 서로가 독립된 쌍둥이도시로 발전해 왔다. 부다는 역사가 오래되어 고대 로마제국 때에 이미 성채가 축조되었다. 이에 반해 페스트는 다뉴브강의 범람원이었던 저평지(低平地)로서 홍수 등의 수해를 입어 개발이 늦어졌다. 한편 부다에는 산이 많아 토지이용의 여지가 없고 동서남북의 교통의 요지라는 점 때문에 상업도시로서 급격히 발전했다. 1873년 두 도시는 합병에 조인하고, 도시 이름을 부다페스트라고 하였다. 부다는 강 연안 가까이까지 산이 바싹 닿아 있고, 기복이 심한 도시로서, 바르헤지 성산(城山)이라고 불리는 언덕에는 형가리왕조의 왕궁과 마티아시교회 등 역사적 건물이 많이 있다. 한편, 페스트에는 국회의사당·과학아카데미·국립박물관·국립오페라극장·페스트콘서트홀 등 현대적 정치·과학·문학·예술의 중추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부다페스트는 헝가리 최대의 공업도시로서, 전국 공업생산의 약 50%, 공업종사자수의 약 26%를 차지한다. 이 도시의 중요한 공업지역은 남부의 체펠과 북쪽 근교에 새로 개발된 위페스트이다. 체펠은 다뉴브강 가운데 있는 섬에 건설된 공업지역으로서 공업용수를 얻는 데 알맞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제품은 철도·선박·버스 등의 수송기계, 전기기계·공작기계 등 기계공업의 제품인데, 그중에서도 간츠 마바크회사의 전기기관차, 이카루스회사의 버스는 외국에도 수출되고 있다.

부다페스트의 역사
1873년에 부다 및 오부다(옛 부다)와 페스트지구가 합병하였으며, 초대시장은 K. 카메르마예르이다. 부다는 타타르(Tatar;몽골)의 습격을 받은 후인 13세기 중엽에 벨라 4세가 이곳에 왕궁을 지음으로써 그 발전의 기초를 닦았으며, 그 후 일관해서 국가의 군사적·정치적 요지였다. 오부다는 로마제국령 파노니아시대에는 아퀸쿰(Aquincum)으로 불렸으며, 또한 헝가리왕가인 아르파드가의 연고지이기도 했다. 한편 페스트의 도시적 기초는 11세기에 불가르족이 구축했다. 페스트는 부다와 함께 왕국특권도시로 번영했으며, 특히 요제프 2세 시대(1765~1790) 이후에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 19세기 전반의 개혁기에는 자유주의파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이 개혁기에 부다와 페스트가 다리로 이어졌으며, 1849년 민족독립을 목표로 한 혁명중 한 때 합병이 이루어졌으나, 혁명실패 후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부다페스트는 중부유럽의 요지였으므로 예로부터 다른 민족의 점령대상지, 또는 망명처가 되기도 했다. 특히 부다지구의 민족구성은 다양한데, 오늘날에도 터키계 주민지역 등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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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and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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