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 12일

폴란드 http://www.koreabound.com/han/nation/europe/poland_info.htm


060812-6340

체코와 폴란드 국경

아직 유럽연합에 미가입 상태라 그런지 여권 확인 과정을 거치는 입출국 절차를 밟았다.

아직은 빈국의 모습이 보이는 초라한 국경

그러나 분단국가에서 온 우리에겐 장난같은 그런 국경이었다.



점심을 먹었던 식당

항상 느끼지만 현지 식당들에는 낭만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일행을 일정 내내 태우고 다녔던 벤츠 버스

운전기사 체코인 불라디미르(24세 총각)



아이슈비츠 수용소(현지 가이드 :작곡을 전공한다는 이우화씨)

인류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 한다.

하여 그들의 편리대로 편집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분명 인류에 대한 큰 죄악임이 분명하다.

어느날 갑자기 이유도 없이 잡혀가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 영혼을 생각해 보면...

방문한 날은 너무도 청명하여 스산한 분위기에 어울릴 수용소의 표정이 언바란스 했지만

망자의 신발, 안경, 머리카락, 사진등의 유물을 보면서 한인간의 허망함을 실감 하였다.

과연 거대한 사회 조직의 가동에 있어 일개인의 의미는 무엇이고 가치는 얼마 정도 일까.







우리 일행












통곡의 벽

바로 오른쪽 옆건물에서 간이재판을 하고 필요에 따라 저벽에 세우고 총살을 했다고 함.





수용소장이 전쟁후 도망 가다 잡혀서 죽었던 교수대




가스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수용소이며, 폴란드의 오슈비엥침(옛이름 아우슈비츠)에 있는 옛 수용소이다. 위치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약 300km 떨어진 곳이며,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유대인, 소련군 포로, 정신병자, 동성애자, 기타 나치즘에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나치가 세운 강제수용소 중에서 최대 규모였다.

배경

나치가 본격적으로 유태인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은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하면서부터이다. 하인리히 히믈러SS특별행동부대(SS Einsatzgruppen)을 A, B, C, D의 4개 지대로 편성하여 진격하는 국방군의 뒤를 따라 소련 영내에서 각종 처형임무에 투입하였다. 이들이 처형한 이들은 유태인, 공산주의자, 정치장교, 공산청년동맹 소속 청년당원 등이었다. 처음 이들의 처형 방법은 직접 총살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을 총살했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우선 처형 속도가 문제였으며 이와 더불어 탄약 문제도 심각했다. 둘째 부대원들에게서 심리적인 부작용 현상이 발견되었다. 이런 문제에 직면한 히믈러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할 것을 지시했다. 여러가 지 방법 중에 S트럭이 실험되었다. 자동차 배기가스를 이용한 S트럭은 불결한 결과로 인해 처형대원들의 불만을 샀고, 다시 기존 강제수용소와 S트럭에서 사용한 가스를 이용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치클론B를 이용한 아우슈비츠의 가스 대량 학살이었다.

경과

수감자들은 매우 좁은 크기의 방에서 생활했다. 이 방은 너무나 좁아서 일어서 있을 수가 없었다. 최초의 수용자들이 아우슈비츠에 온 것은 1940년 6월로, 폴란드 정치범 728명이 첫 수용자들이었다. 이후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폴란드 수용자들은 약 15만명이며, 이중 7만 5천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941년 9월,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 수용자들이 처음으로 독가스실에서 처형당한 것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첫 처형이었다. 독가스실에서는 한 번에 약 2,000여명의 수용자가 처형되었다. 대부분이 노인과 여성,그리고 아이들이었다. 독가스실은 대개 샤워실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사용된 독가스는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치클론 B였다.

처형된자들의 시체는 시체 소각로에서 대량으로 불태워졌는데 하루에 약 1,500~2,000구의 시체가 소각되었다. 또한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카펫과 가발을 만들었다.

희생자수

기존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약 400만명이며 이 중에서 약 250만명이 유대인이라고 알려져왔다. 처음에 이 수용소를 해방한 소련군의 발표였다. 그러나 이 숫자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과장되고 꾸며낸 얘기가 많다"는 제목으로 씌여진 뉴스위크지 1995년 1월 18일 자의 기사[1] 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 실제로 사람은 유태인을 포함하여 110만 ~ 150만명으로 추산했으며, 가장 많은 희생자가 유태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하게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유태인 외에 나머지 희생자들은 폴란드 정치범, 소련군 포로(주로 정치장교), 집시 등이었다. 이어 2005년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알리는 기사에서는 유태인 희생자 수를 100만명으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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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지하감방 질식의 방 수감자들이 손톱으로 그린 벽화. 해골같은 모습은 자신들의 얼굴이다.
수용소 의사 멩겔레 박사에 의해 인체실험을 받고있던 집시소녀들. 너무 여위어 성별구분도 어려울 정도다.

가스실 바로 옆에 설치된 소각장. 독일에서 만들어 현지에서 조립한 이 소각로는 지금도 가동될 수 있다.

면적이 54만평이나 되는 제2수용소 구내로 뻗은 철도 인입선. 유럽 각지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남자는 강제노역장, 노약자는 가스실로 끌려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포로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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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and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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