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은행나무 숲

 

 

 

 

 

 

살둔 산장

 

속초 아바이 마을

 

평창 청옥산 육백마지기

 

 

 

태백 철암 단풍나무 군락지

 

 

 

철암 탄광 역사촌

 

구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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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여행/국내 여행 2016. 2. 18. 21:33

 

도 타워에서                

PC로 보면 지맛이 납니다.(스마트폰은 화면이 너~무 적어요)

 

 

 

 

 

 

 

 

 

정도리 구계등

 

 

 

 

 

 

 

신지도 명사십리 해변

 

 

 

 

 

 

 

 

 

 

 

도립 완도 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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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여행/국내 여행 2015. 2. 7. 09:55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에 속하는 섬.

개설

강화도 북서부에 위치하며, 동경 126°16′∼126°21′, 북위 37°45′∼37°00′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양사면과 내가면이 있고, 남쪽으로는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가 있다. 북쪽으로 불과 2~3㎞의 바다를 끼고 황해도 연백군이 있다. 따라서 섬 북부에서는 황해도 땅을 쉽게 바라볼 수 있으며, 좀 높은 곳에서는 예성강 하구를 볼 수 있고, 맑은 날에는 개성 송악산도 바라볼 수 있어, 실향민들이 화개산 산정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명칭 유래

교동도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달을참(), 고목근(), 교동()으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달을참이란 ‘크고 높은 산이 있는 고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대운도(), 고림()이라고도 불렸다.

자연환경

고도가 매우 낮은 섬으로 높이 0∼10m의 지역이 섬의 3분의 2를 이루고 있으며, 마식령산맥 서단에 해당한다. 가장 높은 산은 화개산(, 260m)으로 이 섬의 주산을 이루며, 봉황산(75m)·율두산(89m)·고양이산(35m)·수정산(75m) 등 모두 100m 이하의 낮은 구릉들이다.

연백에 면한 동북해안은 제방을 쌓아 고구()의 관개용 저수지의 완성으로 경지확장 및 경지정리를 하였다. 해안선은 단조로우며, 연안의 저지()는 이질()인 갯벌로 되어 있어서 어항의 발달은 불리하고, 간만의 차도 커서 선박의 출입도 그리 편리하지 못하다. 섬인 까닭에 한서의 차는 내륙에 비하여 작으나 언제나 해풍이 비교적 강하게 불며, 겨울에는 해안의 유빙으로 한기를 더욱더 조장한다.

내륙에 비하면 겨울이 빠르고 여름이 늦어 환절기에는 해상의 기류가 고르지 않아 때때로 소나기·회오리바람을 몰아오며, 때로는 서리나 우박이 내리는 등 날씨가 고르지 못하다. 연평균기온은 11.2℃, 연강수량은 1,390㎜이다.

상고시대에 이 섬은 개화산·율두산·수정산을 중심으로 세 개의 섬으로 되어 있었으며, 교동평야에는 언제나 조수가 흘렀고, 그것이 그 뒤 하나의 섬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개화산 중턱에서 볼 수 있는 화석이 된 조개껍질이나 현 해안선에서 내륙에 위치한 패총의 흔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 남쪽에 있는 석모도 상주산 사이의 바다가 육화()되어 인마가 내왕할 수 있었다가, 1578년(선조 14)경 다시 바다로 되어 간조 때 외에는 인마가 내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보아, 후빙기 이후 범세계적인 해면변동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하천의 발달도 드물고, 작은 계류가 있을 뿐이다.

형성 및 변천

고구려 때에는 고목근현()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부터 교동이라 불려 혈구현()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도 교동이라 일컬었으며, 고려 명종 때 감무()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395년(태조 4)에 만호()와 지현()을 두었으며, 그 뒤 이를 고쳐 현감이라 일컬었다. 1629년(인조 7) 화량진()으로부터 수영()을 교동 원권진(현 읍내리)으로 이전하면서 현을 부로 승격시키고 수군절도사 겸 부사를 두었다.

1633년 서남해의 방어를 더한층 강화하기 위하여 삼도통어사(使)를 교동에 두고, 삼도, 즉 경기·황해·충청의 주사()를 통괄하게 하였다. 1777년(정조 1)에 이르러 교동부사를 격을 낮추어 현감으로 하였다가, 1779년에 통어사가 강화로 이속되면서 교동현감은 다시 부사 겸 방어사로 승격되었다. 1789년에 통어영()이 다시 교동으로 옮겨왔다.

1866년(고종 3) 통어사가 다시 강화로 이속되면서 부사 겸 방어사로 하였다가, 같은 해 8월 또다시 통어사를 두었다. 1884년 해방영()에 통어사가 이속되어 부사 겸 통어사로 격이 내려갔다. 1895년 행정개편에 따라 읍을 폐하여 강화에 이속하였다가 1896년 읍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강화군에 속하게 되면서, 개화·수정의 두 면을 두었다가 1934년 두 면이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현황

인구는 광복 당시 8,644명이었던 것이 6·25전쟁 뒤 많은 피난민으로 1965년에는 1만2443명에 달해 최고를 이루었다. 그러나 1972년부터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1977년부터 감소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2009년 5월 현재 교동면 인구는 3,132명이고 세대수는 1,389호이다.

2006년 현재 교동면 전체 면적은 47.14㎢이고 논 25.89㎢, 밭 2.57㎡, 임야 11.45㎢이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교동토의 간척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까지 지속되었다. 이로써 형성된 저평한 평야가 넓고, 완비된 경지정리·수리시설 기계화 등으로 쌀의 생산량은 섬의 자급자족을 넘어 다른 지방으로 나가며,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감자 등과 임산물은 밤·대추·버섯 등이 생산된다.

그리고 밭에서 하는 인삼재배가 농가의 부업으로, 완초공예품은 강화도의 화문석처럼 그 이름이 높다. 완초공예품으로는 화방석·꽃삼합·광주리·손가방·화문석 등 다양하며, 그 가운데 화방석과 꽃삼합은 대도시로 팔려나가는데, 수익성이 높아 오랜 전통을 오늘날까지 지속하고 있다.

6·25전쟁 이전에는 4개의 정기연락선이 있어 육지와 서해도서가 자유롭게 연락되었으나, 전쟁 이후 매우 불편해졌다. 그러나 서울과의 연결은 강화도 창후리에서 수시로 배가 있고, 연안도서를 연락하는 선편이 있으나 불편한 편이다. 육지와 격리된 섬인 까닭에 고려 중엽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유배지로 이용되었고, 지리적 위치상 외세의 침범이 빈번했던 관계로 섬에는 많은 고적이 남아 있다.

1629년에 축조된 읍성지(), 1173년경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 화개산성지, 교동구현허()를 비롯하여, 고려 희종이 유배되어 기거하던 경원전(殿)과 철종잠저소()·봉수대()·단묘() 등과 그 밖에도 많은 유적들이 있다. 또, 명승지로는 교동팔경이 있고, 화개사·교동향교 등은 화개산 남쪽에 있다.

오염원과 축산농가가 없어 맑고 깨끗한 농업용수로 농사를 지어 생산한 교동쌀이 이름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동도 [喬桐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산 아래 집집마다 흰 술 걸러내고

강화에서 나온 한 맥이 서편 언덕을 따라가다가 움푹 꺼진 돌맥이 되고, 작은 개 하나를 지나서 교동도()가 되었다. 이색이 “바닷물 끝없고 푸른 하늘 나직한데 꽃 그림자 나직하고 해는 서로 넘어가네. 산 아래 집집마다 흰 술 걸러내어 파 뜯고 회치는데 닭은 홰에 오르려 하네”라고 노래한 교동도가 개성의 바깥 안산()이 되고, 섬 북쪽은 한강인데 여기에 와서 개성의 안수()가 되었다. 남쪽은 서해에 임하였고, 바다 건너 남쪽은 충청도의 해미ㆍ서산 등의 지역이다.

바다를 사이에 둔 양쪽 언덕이 그리 멀지 않아서 산에서 모두 바다가 보이고, 서북쪽으로는 황해도의 연안, 배천과 개를 사이에 두고 비스듬하게 서로 보인다. 이곳 교동읍 내 화개산 기슭에 조선의 폭군으로 악명 높았던 연산군이 유배를 왔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교동도는 강화보다는 작지만 섬 전체가 모두 돌이고 바다 가운데 따로 솟아 있다. 조선 인조 때 조정에서는 이곳에 통어영을 설치하고 경기, 황해, 평안 삼도의 수군을 거느린 수군절도사를 두어서 바다를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두 섬이 모두 땅에 소금기가 있어 자주 가물고 수확이 적기 때문에 주민은 모두 생선을 잡는 어부와 소금을 굽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오늘날에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사람들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강화도는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 아래 집집마다 흰 술 걸러내고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2012.10.5, 다음생각)

 

 

 

 

 

 

 

 

 

 

 

 

 

 

교동의 원래 이름은 대운도()이다. 고림()또는 달을신()이라고도 불렀으나,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을 두어 고목근현()이라 하고,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고종 32년(1895)에는 읍을 폐하고 강화와 합군하였다가 다음해 7월에 다시 읍으로 하고 군수를 두었다. 그때 당시는 교동 동서남북면 4개 면과 송가면을 합쳐 5개면이었다가 한일합방 후(1911)에 송가면은 송남면으로 개칭하고, 본도는4개면 13개로 구획되어졌다. 합군(1914) 이후, 송남면은 삼산면에 부속되었고 교동은 화개면과 수정면, 2개면이 되었다. 1934년 이후, 화개·수정면을 합면하여 지금의 교동면이 되었으며 현재 법정리는 13개, 행정리는 17개이다.

본도는 인천광역시 서해안에 놓여 있으며 동남은 양사면, 삼산면, 서도면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으로는 불과 5㎞ 밖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북한과 군사분계선을 이르고 있어 황해도 연백군이 눈앞에 보인다. 도서라고는 하지만 비교적 평야가 많으며 해안선은 평탄한 편이고 해저는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동도(강화)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3.6, 한국관광공사)

 

 

 

 

 

 

 

 

 

 

 

 

 

 

 

 

 

 

 

 

 

 

 

 

 

 

 

 

 

 

 

 

 

 

 

 

 

 

 

 

 

 

 

 

 

 

 

 

 

 

 

 

 

 

 

 

뒤편, 강같은 바다 건너 바로 저기가 고향인 사람들이 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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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 성지

 

 

 

 

신리성지는 조선천주교회의 요람이다.

충청도 내포지방의 중심부에 자리한 신리는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끊임없이 예비자, 신자,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성지 내 초가집은 손자선(손도마, 1866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 성인의 생가이다. 동시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안주교, 1866 오천 갈매못에서 순교)의 주교관이자 조선 교구청이었다.

안주교는 이곳에서 끊임없이 찾아드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풀고 신앙 진리를 가르치는 한편, 각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제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리나 초창기의 한글 교리서 저술과 간행, 조선교회의 상황과 순교사적들을 수집 정리하여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내는 일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 자료들이 훗날 한국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토대가 된 이른바 <다블뤼 비망기>이다.

,본디 “천주강생 1815년”에 지어진 생가는 박해시대 이래로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고 그 구조 또한 개조를 더듭해 왔다.

1964년부터는 강당의 형태로 개축되어 공소로 사용되었으나 본당 중심의 사목이 강화되면서 방치되기에 이른다.

이후 성지개발이 본격화 되고 한국교회사연구소로부터 생가의 옛 사진이 발견됨에 따라 원형 복원을 위한 본격적인 조사가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된다. 2004년 마침내 손 성인의 생가이자 안주교께서 사시던 주교관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복원된 생가(주교관)의 기둥과 뼈대는 옛날 그대로이다. 대들보, 서까래, 주춧돌, 문지방 디딤돌, 집 지은 연도를 적은 상량문 등 상당 부분의 실물들이 그대로 사용되어 성인들의 숨결과 손 때가 그대로 묻어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신리성지는 순교자들이 태어난 집과 마을, 거닐던 길 그리고 경작하던 농토도 그 지명들과 함께 그대로 유지되어 순교자들의 자취를 생생히 느끼게 한다. 특히 손자선 성인의 생가와 함께 안주교와 오신부, 민신부 그리고 황석두 루가 등 성인 네 분이 붙잡힌 ‘거더리’의 집(신리 99번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해 준다.

,신리성지는 이처럼 순교자들의 고향인 동시에 순교자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손자선 성인의 순교 이후 그 시신이 신리의 선산에 묻혔다. 그리고 이름이 알려져 있는 33분의 순교자 외에도 성지 인근에는 ‘32기의 목이 없는 무명 순교자 묘’와 ‘14기의 손씨 가족 무명 순교자묘’, 그리고 해미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는 묘 3기가 있다. 이 묘들은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연차적으로 발굴되어 대전리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보존되어 있다.

 

 

 

 

 

 

 

 

 

 

 

 

 

 

 

 

 

 

 

 

 

 

 

 

 

 

 

 

 

합덕 성당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에 있는 천주교성당.

내용

전신은 1890년(고종 27)에 설립된 양촌성당(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인데, 초대본당주임 퀴를리에(Curlier, J. J. L.)신부가 1899년 현 위치에 120평의 대지를 매입, 한옥성당을 건축하고 이전하여 합덕성당으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그 뒤 7대주임 페랭(Perrin, P., )신부가 1929년 현재 건물인 벽돌조의 고딕성당을 신축하였는데, 1960년 신 합덕성당이 분할되어 독립함으로써 명칭이 합덕성당에서 구 합덕성당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합덕지방은 일찍부터 천주교의 사적지로 알려졌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Daveluy, M. A. N.)주교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이 체포되기 전 피신하였던 곳이 현 구합덕성당의 신리공소()로, 당시의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합덕성당 [合德聖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충남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275 지도

1890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세워진 양촌성당으로 출발하여, 1899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명칭도 합덕성당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29년에 신축된 것인데,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양식으로서 벽돌과 목재를 사용한 연와조 구조로 지었으며, 종탑이 쌍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61년 합덕읍 운산리에 신합덕성당이 생김으로써 구합덕성당으로 불리다가, 1997년 다시 합덕성당의 명칭을 되찾았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29년에 준공된 것으로, 벽돌과 목재를 사용한 연와조 구조에 종탑이 쌍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 설계를 담당한 페랭(Perrin) 신부는 6·25전쟁 때 납치되고, 현재 성당 구내에 있는 그의 묘소에는 유해가 없이 유물만 묻혀 있다.

아산만 일대의 내포() 지방은 예로부터 충남지역 천주교의 중심지로, 내포 공동체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언제나 주목을 받는 곳이었다. 1791년 신해박해() 이후 1868년 무진박해() 때까지 이곳은 박해가 있을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김대건(), 최양업() 신부 집안도 이곳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박해시대 한국에서 활동한 성직자들은 거의 이곳을 거쳐갔다.

1890년 장 퀴를리에(Jean Curlier) 신부와 피에르 파스키에(Pierre Pasquier) 신부가 이곳에 파견되어 양촌과 간량골(현재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에 2개의 본당을 설립하였다. 그후 퀴를리에 신부는 여러 차례의 교안()을 겪으면서 양촌이 본당의 중심지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장소를 물색한 끝에 1898년 합덕지() 이웃의 창말[]에 있는 언덕을 매입하여 성당을 건립하고 본당을 이전하여 합덕성당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1907년 매괴학교를 설립하고, 1908년 결성()의 수곡성당(현재 서산성당 전신)을 분리하였으며, 1928년 예산성당을, 1939년 당진성당을 각각 분리하였다. 1960년 11월 합덕읍 운산리()에 여섯 번째 자본당인 신합덕성당을 신설·분리함으로써 본래의 성당을 구합덕성당으로 개칭하였으나, 1997년 다시 합덕성당으로 명명하였다. 1998년 7월 16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275번지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당진 합덕성당 [唐津合德聖堂]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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