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투어 첫날 점심, 기가 막혔다.

 

 

 

 

기사들은 마치 야생마 타듯 운전했다.

 

 

 

 

 

고비 사막의 특징과 규모를 짐작해 보시라

 

 

 

 

 

고비사막[ Gobi Des., ─ ]

요약
몽골고원 내부에 펼쳐진 거대한 사막이며 동서 길이가 1600km에 이른다.

주위가 산지로 둘러싸인 몽골고원 내부의 고비사막의 범위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로 알타이산맥 동단에서 싱안링[]산맥 서쪽 기슭에 걸친 동서 1,600km, 남북 500∼1,000km의 범위로 알려져 있다. 고비란 몽골어로 ‘풀이 잘 자라지 않는 거친 땅’이란 뜻으로, 모래땅이란 뜻은 내포되어 있지 않다. 고비라는 말의 뜻처럼 고비사막 대부분의 지역은 암석사막을 이루어 모래사막으로 된 지역은 매우 적고, 또 일반적으로 고비사막이라 부르는 지역범위 안에는 넓은 초원지대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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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량은 중앙부에서 연 25∼50 mm, 북부에서 남동부에 걸쳐 150∼200mm에 불과하나, 강수량의 대부분이 목초와 농작물 생육기인 여름에 집중된다. 하천은 대개 사막 속으로 스며들거나 염호()로 흘러드나, 북부에 케룰렌강(), 남부에 황허강[] 등이 흐른다. 지하수면은 대개 지표에서 6m 미만의 깊이에 있으나, 물은 대부분 염수화()되어 있다. 중심부의 노암지대()에서 주연부()로 나가면서 스텝지대로 이행하는데, 수목은 거의 없고 유극관목림()이 간간이 있을 정도이다. 영양류() ·설치류() 등의 야생동물이 살고, 가축으로는 염소 ·양을 비롯하여 소 ·낙타 ·말 등이 사육된다. 근래 농목업의 집단화 ·기계화가 이루어지고, 종래의 유목민의 생활도 정착화되어가고 있다.

한편, 몽골의 날라이하에서 석탄, 사인샨드에서 석유가 개발되고, 또 중국 간쑤성[]의 위먼[]에서도 유전이 개발되어 간쑤철도가 그 유전지역까지 연장됨으로써 과거의 오아시스 거리에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고비사막은 공룡화석의 보고()로서 1922년에는 프로토세라톱스의 뼈와 공룡 알들이 발견되었고, 1960년대에는 벨로시랍터와 프로토세라톱스 공룡을 한 마리씩 발견했으며, 1992년에는 날지 못하는 새의 친척인 최초의 모노니쿠스가 발견되었다.

타클라마칸, 커얼친사막, 내몽골고원 등과 함께 황사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커얼친사막중국몽골일본한국내몽골고원타클라마칸사막고비사막

[네이버 지식백과] 고비사막 [Gobi Des., ─砂漠] (두산백과)

 

 

 

 

저들의 행복...

 

 

 

 

사막 투어 첫날 밤, 게르에서

 

 

 

 

 

게르 [ Ger ]

요약
몽골족[]의 이동식 집.
 

중국어로는 파오[]라고 한다. 높이 1.2m의 원통형 벽과 둥근 지붕으로 되어 있다. 벽과 지붕은 버들가지를 비스듬히 격자로 짜서 골조로 하고, 그 위에 펠트를 덮어씌워 이동할 때 쉽게 분해 ·조립할 수 있다. 입구는 남으로 향하며 중앙에 화덕, 정면 또는 약간 서쪽에 불단(), 벽쪽에는 의장함 ·침구 ·조리용구 등을 둔다. 연령이나 성별에 따라 자리가 정해 있고, 안쪽에 가장()이나 라마 승()이 앉는 상석이 있다. 게르는 바람의 저항이 적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게르 [Ger] (두산백과)

 

 

 

 

보름달에 쏟아지는 별을 볼 수 없었고

여러 냄새가 칵테일 게르...

행복 했다.

 

 

 

 

 

 

 

 

 

 

 

 

 

 

* 사막의 아침

 

 

 

 

 

 

 

 

 

 

 

 

 

 

 

거기에도 꽃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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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기스칸 기념관

 

 

 

칭기즈칸 몽골제국을 건설한 탁월한 군사전략가이자 제왕 Chingiz Khan, 1162경~1227

“칭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이 세계를 흔들자 술탄들이 쓰러졌다. 칼리파들이 넘어졌고, 카이사르들은 왕좌에서 떨었다. 그는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었으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자식들에게 중국 제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중에서
“그의 눈에는 불이 있고 얼굴에는 빛이 있다.” <몽골비사> 중에서

복수와 약탈의 세계에서 사고무친의 고난을 겪다

칭기즈칸 이미지 1

1162년경 오늘날의 몽골과 시베리아 지역이 맞닿은 곳 근처, 오논 강 유역 숲에서 보르지긴 씨족 예수게이와 올크누트 부족 출신 후엘룬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후엘룬은 메르키트 부족 전사의 아내였으나 예수게이에게 납치당한 처지였다. 예수게이는 이미 첫 부인 소치겔과의 사이에 아들 벡테르를 두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테무진(). 예수게이가 죽인 타타르족 전사의 이름이었다. 예수게이는 테무진을 부르테와 약혼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타타르족 야영지를 방문했다가 독살당하고 말았다. 두 아내와 10살이 안 된 자식 일곱 명이 남겨졌다. 12세기 당시 초원 지대에는 수십 개 부족과 씨족들이 전투, 사냥, 유목, 약탈, 납치, 교역 등으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예수게이의 보르지긴 씨족은 타이치우드 씨족에 사실상 의탁해 살고 있었는데, 타이치우드 씨족은 예수게이가 죽자 그 가족들을 버리고 이동했다. 고립된 가족은 오논 강 유역에서 사냥과 채집으로 겨우 연명하며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이 시기 테무진은 자무카와 의형제를 맺었고, 배다른 형 벡테르를 활로 쏘아 죽였다. 타이치우드 씨족은 테무진을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었지만 테무진은 탈출했다. 1178년 16살 경 테무진은 부르테와 결혼하고 몽골 중부의 유력한 부족 케레이트의 옹 칸에게 복종하여 안전을 도모했다. 그러나 메르키트 부족이 후엘룬을 빼앗긴 것에 대한 뒤늦은 복수로, 테무진의 아내 부르테를 납치해갔다.

타타르와 타이치우드를 정복하고 초원의 강자로 떠오르다

테무진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옹 칸에게 메르키트를 습격할 뜻을 밝혔다. 메르키트와 구원()이 있던 옹 칸은 테무진과 의형제를 맺은 자무카를 끌어들여 메르키트를 공격해 승리했다. 테무진은 의형제 자무카 무리와 함께 생활하며 안정을 찾았지만 1181년 자무카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쌓기 시작했다. 1189년 여름 27살의 테무진은 옹 칸의 승인 아래 전통적인 씨족, 부족 회의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칸의 칭호를 차지했다. 1196년에는 옹 칸과 함께 타타르 원정에 나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쟁을 통해 테무진은 금나라가 타타르, 케레이트, 몽골 등 여러 부족들을 서로 싸우게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1197년 테무진은 주르킨 부족을 공격해 무너뜨리고 케룰렌 강과 쳉게르 강이 만나는 곳 근처에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어다. 이곳이 몽골의 수도 아바르가가 되어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원정을 위한 기지 구실을 했다. 1201년, 새롭게 떠오르는 테무진 세력에 반감을 지닌 씨족들이 자무카를 구르 칸으로 추대해 옹 칸과 테무진에 도전했다. 옹 칸은 자무카와 맞서고 테무진은 타이치우드 부족과 맞서 승리했으나 자무카는 달아났다. 1202년 옹 칸은 메르키트를 공격하고 테무진은 타타르를 공격했다. 타타르를 정복한 테무진은 수레바퀴 비녀장보다 키가 큰 타타르 남성들은 모두 죽이고 나머지는 자기 부족의 구성원으로 융합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몽골 군대와 부족을 아르반(10호), 자군(100호), 밍간(1000호), 투멘(1만호) 체제로 재편했다.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의 지배자 칭기즈칸으로 거듭나다

칭기즈칸의 즉위식

테무진은 맏아들 주치와 옹 칸의 딸을 혼인시키려 했으나 옹 칸은 거부했다. 그러나 테무진의 군사력을 당해내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옹 칸은 계략을 세웠다. 혼인을 수락하고 축하 잔치에 테무진을 초대해 제거하려 했던 것. 소수 병사만 이끌고 옹 칸에게 가던 테무진은 계략을 알아채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옹 칸의 추격을 피해 살아남은 자는 불과 19명. 이들은 흙탕물을 마시며 테무진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이들 19명은 아홉 부족 출신으로 전통적인 씨족이나 부족 관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결사체가 탄생한 셈이었고, 이는 몽골 제국 내 통일의 기초나 마찬가지였다. 테무진은 흩어진 추종자들을 모아 옹 칸을 향해 진군했다. 기습당한 케레이트 부족은 대부분 테무진에게 항복했다. 옹 칸은 나이만에서 죽임을 당했고 1204년 테무진은 나이만을 정복했다. 테무진 앞에 끌려 온 자무카의 유언은 이러했다. “나를 죽여 그 뼈를 높은 곳에 놓아라. 그러면 내가 영원히 그대의 후손들을 보호할 것이며, 그들에게 복이 되겠다.”

1206년 테무진은 부르칸 칼둔 성산() 근처 오논 강 원류에서 쿠릴타이를 열었다. 100만 명 가까운 인구에 2000만 마리에 가까운 가축을 보유한 새로운 나라가 탄생할 참이었다. 새로운 나라의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 통치자의 칭호는 칭기즈칸이었다. 테무진, 아니 칭기즈칸은 부족 간 납치와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시키고,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으며, 칭기즈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것을 선언했다. 칭기즈칸은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족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하여, 부족이나 민족 전체 단위로 가족적 유대를 맺는 정책을 폈다. 그리고 1207년부터 1209년까지 여러 차례 공격을 통해 탕구트, 즉 서하(西)를 정복했다.

금나라와 호라즘을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하다

칭기즈칸이 48세가 된 1210년 금나라 사신이 몽골의 복종을 요구하러 왔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땅에 침을 뱉고 금나라를 욕했다. 전쟁 선포였다. 1211년 쿠릴타이를 소집해 원정을 결정하고 진군을 개시한 칭기즈칸은 1215년 금나라 수도 중도(. 오늘날의 베이징)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칭기즈칸 부대의 행렬

당시 원정에서 몽골군의 병력은 기병 6만5천이었다. 지구력 강한 몽골 말과 보급부대를 두지 않는 간편함(육포와 마른 젖 덩어리를 휴대했다), 고도로 조직화된 부대 편재는 몽골군의 기동력을 세계 최강으로 만들어주었다. 여기에 포로들을 통해 익힌 공성전() 전술과 무기, 굳은 충성심과 규율, 적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선전전, 적이 제대로 대응하기 전에 전격적으로 기습하는 전술, 적의 영토 전역에 걸쳐 작전을 펼쳐 혼란을 일으키는 전술 등으로 몽골군은 위세를 떨쳤다.

칭기즈칸은 이제 넓어진 영역을 다스리며 교역과 상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한 호라즘과 교역 조건을 협상하고 관계를 공식화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호라즘의 지배자인 투르크 족술탄 무함마드 2세는 칭기즈칸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칭기즈칸은 많은 물자와 함께 상인들을 보냈다. 그러나 호라즘의 북서쪽 오트라트(카자흐스탄 남부)의 총독이 상인들을 죽이고 물자를 빼앗았다. 칭기즈칸은 사신을 보내 총독을 처벌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무함마드 2세는 오히려 사신들을 죽였다. 남은 것은 전쟁이었다. 1219년 원정을 떠난 칭기즈칸은 이듬해 봄 호라즘 영역에 도착하여 그 해가 끝나기 전에 호라즘의 주요 도시들을 속속 점령했다. 무함마드 2세는 몽골군에 쫓기다가 카스피해의 작은 섬에서 죽었다. 무함마드 2세의 아들 잘랄웃딘이 인더스 강변에서 몽골군과 맞서기도 했지만 칭기즈칸에게 패했다.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휩쓴 칭기즈칸의 원정은 1222년 여름 오늘날의 파키스탄 중심부에서 멈추었다(1223년에는 제배와 수부타이가 이끈 별동군이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러시아 남부 지역과 이란 일부 지역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오”

칭기즈칸은 인도 북부를 모두 점령하고 히말라야 남쪽을 돌아 중국 송나라 영토를 가로지를 생각을 했지만, 더위와 습기가 커다란 장벽이 되었다. 본거지로 돌아온 칭기즈칸은 이제 서하, 즉 탕구트 공격을 준비했다. 탕구트는 이미 항복했지만 호라즘 원정 때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탕구트 원정을 위해 고비 사막을 건너던 1226~27년 겨울 칭기즈칸은 진군을 멈추고 야생마를 사냥했다. 갑자기 야생마들이 돌진해오자 칭기즈칸이 탄 말이 놀라 뛰어올랐다.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지만 칭기즈칸은 탕구트와 전쟁을 계속했다. 수도를 포위하고 마지막 승리를 얼마 앞둔 1227년 8월 칭기즈칸은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중국 깐수성() 칭수이현() 시장(西) 강변이었다.

몽골 언덕에 그려진 칭기즈칸의 초상화(2006)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나는 사치를 싫어하고 절제를 존중하오. 나의 소명이 중요했기에 나에게 주어진 의무도 무거웠소. 나와 나의 부하들은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소.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오. 세상에는 왕들이 많이 있소.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할 거요!”

 

 

 

 

 

 

 

 

 

 

 

 

 

 

 

 

 

 

 

 

 

 

 

 

 

 

 

 

 

 

징기스칸의 귀환을 마중 나온 어머니

 

 

 

 

말머리 위의 사람들을 보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복드칸 왕궁

 

 

복드칸 궁전박물관 [ Bogd Khaan Palace Museum ]

요약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는 박물관.
몽골 왕조의 마지막 황제 자브춘 담바 후탁트 8세가 20년간 살았던 겨울궁전에 들어서 있다. 1893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903년에 완공되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복드칸이 세계의 왕들에게 받은 선물, 몽골 왕과 왕비의 침실, 복드칸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박제 동물들이 주로 전시된다. 18~19세기 티베트 지역에서 활약했던 작가들의 불교 작품도 많이 전시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복드칸 궁전박물관 [Bogd Khaan Palace Museum] (두산백과)

 

 

 

 

 

 

 

 

 

 

 

 

 

 

 

 

 

 

 

 

 

 

 

 

 

 

 

 

* 수호바타르 광장

 

 

담딘 수흐바타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담딘 수흐바타르

담딘 수흐바타르(몽골어: Дамдин Сүхбаатар, 1893년 ~ 1923년)는 몽골의 정치가, 혁명가로, 몽골 혁명의 아버지로 불린다.

요약[편집]

그는 체첸 한 아이막(Цэцэн Хан аймаг) 유목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16세 때 후레-캬흐타 간의 역전(驛傳)마차의 마부가 되었다. 1911년, 몽골 독립 후 건군된 자치(自治)몽골군의 소집을 받고 입대, 하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기관총 소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웠다. 1918년 정부 인쇄소의 식자공(植字工)이 되었는데, 그 동안 중국과 무능한 몽골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에 자극을 받은 그는 1920년 6월 허를러깅 처이발상 등과 함께 몽골 인민당(인민 혁명당)을 결성,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에 들어갔다. 전후 두 차례에 걸친 블라디미르 레닌과의 회담을 통하여, 몽골 혁명의 성공과 그 후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술 지도를 받고, 1921년 인민의용군을 결성, 그 총사령관이 되어 적군(赤軍)과 함께 마이마친-- '마이마이천(賣買城)'에서 군사를 일으켜, 7월 10일 니슬렐 후레(울란바타르)에 인민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국방장관이 되었다. 30세 때 결핵으로 죽었다. 그의 부인은 양지마(1893-1963)다. 탄생

 

 

 

 

 

 

 

 

 

 

 

 

 

 

 

 

 

 

 

 

 

 

 

 

 

 

 

 

 

 

 

 

 

* 간단사원

 

 

그들의 종교,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간단사 [ Gangdan Monastery ]

 

   

 

간단사는 몽골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사원으로 울란바토르(Ulan Bator) 사람들의 종교와 밀접한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한국의 대사찰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편이나 티베트 불교가 몽골에 어떻게 전래되어 변모해 왔는지를 잘 보여 준다. 1838년 시내 중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온 후 100여 년간 9개의 법당을 갖추고 5,000여 명이 수행을 하는 몽골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1938년 사회주의의 종교 탄압에 의해 본래 기능을 상실하여 5개의 법당이 파괴되었다. 1990년 민주 정부의 등장으로 본래 모습을 되찾기 위한 간단사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현재 10개의 법당에서 약 900여 명의 승려가 수행 중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간단사 [Gangdan Monastery] (몽골 개황, 2011. 8., 외교부)

 

 

 

 

 

 

 

 

 

 

 

 

 

 

 

 

 

 

 

 

 

 

 

 

 

 

 

 

 

 

 

 

 

 

 

비둘기도 더워서 그늘 밑으로

 

 

 

 

 

몽골 국영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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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6.29

인천 국제 공항

언제 부터 인가 꿈꾸어 오던

고비 사막, 바이칼 호,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러 길을 떠난다.

 

 

 

 

 

 

 

 

 

 

 

징기스칸의 나라 몽골

울란바토르 징기스칸 국제 공항

 

 

 

 

 

 

* 테레지 국립공원

 

 

 

 

 

 

 

 

 

 

 

 

 

 

 

 

 

 

 

 

 

 

 

 

 

테렐지 국립공원 [ Gorkhi-Terelj National Park ]

요약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북동쪽으로 약 75km 지점에 있는 국립공원. 
 
원어명 Горхи-Тэрэлж

1993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넓게 펼쳐진 초원에 유목민의 이동식 가옥인 게르가 흩어져 있고 말을 돌보는 목동 따위를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중생대의 화강암지대 위에 우뚝 솟은 커다란 바위와 깎아지른 절벽이 장관을 이룬다. 특히 우명한 거북바위에 올라서면 주변의 뛰어난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낙타와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릴 수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테렐지 국립공원 [Gorkhi-Terelj National Park] (두산백과)

 

 

 

 

그들에게 미안했다.

 

 

 

 

 

 

 

 

 

 

 

 

 

 

 

 

 

 

 

 

 

 

 

 

 

 

 

 

 

 

 

 

 

 

* 울란바토르 지붕 "자이승 전승 기념탑"

 

 

 

자이산 승전탑 [ Zaisan Memorial ]

자이산 승전탑은 1939년 몽골과 소련 연합군과 일본군 간의 할흐(Khalkh) 강 전투에서의 승리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구소련군을 기념하기 위해 1945년 조성된 기념탑으로 울란바토르(Ulan Bator) 시내 전경과 톨(Tuul) 강 주변 자연경관을 볼 수 있으며, 특히 야간 울란바토르 시 야경을 즐길 수 있다. 자이산 승전탑에는 할흐 강 전투 시 일본군을 격퇴한 내용의 조형물이 있다. 시내 남쪽에 위치, 정부 청사에서 차량으로 10분 거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이산 승전탑 [Zaisan Memorial] (몽골 개황, 2011. 8., 외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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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여행/국내 여행 2015. 2. 7. 09:55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에 속하는 섬.

개설

강화도 북서부에 위치하며, 동경 126°16′∼126°21′, 북위 37°45′∼37°00′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양사면과 내가면이 있고, 남쪽으로는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가 있다. 북쪽으로 불과 2~3㎞의 바다를 끼고 황해도 연백군이 있다. 따라서 섬 북부에서는 황해도 땅을 쉽게 바라볼 수 있으며, 좀 높은 곳에서는 예성강 하구를 볼 수 있고, 맑은 날에는 개성 송악산도 바라볼 수 있어, 실향민들이 화개산 산정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명칭 유래

교동도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달을참(), 고목근(), 교동()으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달을참이란 ‘크고 높은 산이 있는 고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대운도(), 고림()이라고도 불렸다.

자연환경

고도가 매우 낮은 섬으로 높이 0∼10m의 지역이 섬의 3분의 2를 이루고 있으며, 마식령산맥 서단에 해당한다. 가장 높은 산은 화개산(, 260m)으로 이 섬의 주산을 이루며, 봉황산(75m)·율두산(89m)·고양이산(35m)·수정산(75m) 등 모두 100m 이하의 낮은 구릉들이다.

연백에 면한 동북해안은 제방을 쌓아 고구()의 관개용 저수지의 완성으로 경지확장 및 경지정리를 하였다. 해안선은 단조로우며, 연안의 저지()는 이질()인 갯벌로 되어 있어서 어항의 발달은 불리하고, 간만의 차도 커서 선박의 출입도 그리 편리하지 못하다. 섬인 까닭에 한서의 차는 내륙에 비하여 작으나 언제나 해풍이 비교적 강하게 불며, 겨울에는 해안의 유빙으로 한기를 더욱더 조장한다.

내륙에 비하면 겨울이 빠르고 여름이 늦어 환절기에는 해상의 기류가 고르지 않아 때때로 소나기·회오리바람을 몰아오며, 때로는 서리나 우박이 내리는 등 날씨가 고르지 못하다. 연평균기온은 11.2℃, 연강수량은 1,390㎜이다.

상고시대에 이 섬은 개화산·율두산·수정산을 중심으로 세 개의 섬으로 되어 있었으며, 교동평야에는 언제나 조수가 흘렀고, 그것이 그 뒤 하나의 섬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개화산 중턱에서 볼 수 있는 화석이 된 조개껍질이나 현 해안선에서 내륙에 위치한 패총의 흔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 남쪽에 있는 석모도 상주산 사이의 바다가 육화()되어 인마가 내왕할 수 있었다가, 1578년(선조 14)경 다시 바다로 되어 간조 때 외에는 인마가 내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보아, 후빙기 이후 범세계적인 해면변동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하천의 발달도 드물고, 작은 계류가 있을 뿐이다.

형성 및 변천

고구려 때에는 고목근현()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부터 교동이라 불려 혈구현()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도 교동이라 일컬었으며, 고려 명종 때 감무()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395년(태조 4)에 만호()와 지현()을 두었으며, 그 뒤 이를 고쳐 현감이라 일컬었다. 1629년(인조 7) 화량진()으로부터 수영()을 교동 원권진(현 읍내리)으로 이전하면서 현을 부로 승격시키고 수군절도사 겸 부사를 두었다.

1633년 서남해의 방어를 더한층 강화하기 위하여 삼도통어사(使)를 교동에 두고, 삼도, 즉 경기·황해·충청의 주사()를 통괄하게 하였다. 1777년(정조 1)에 이르러 교동부사를 격을 낮추어 현감으로 하였다가, 1779년에 통어사가 강화로 이속되면서 교동현감은 다시 부사 겸 방어사로 승격되었다. 1789년에 통어영()이 다시 교동으로 옮겨왔다.

1866년(고종 3) 통어사가 다시 강화로 이속되면서 부사 겸 방어사로 하였다가, 같은 해 8월 또다시 통어사를 두었다. 1884년 해방영()에 통어사가 이속되어 부사 겸 통어사로 격이 내려갔다. 1895년 행정개편에 따라 읍을 폐하여 강화에 이속하였다가 1896년 읍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강화군에 속하게 되면서, 개화·수정의 두 면을 두었다가 1934년 두 면이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현황

인구는 광복 당시 8,644명이었던 것이 6·25전쟁 뒤 많은 피난민으로 1965년에는 1만2443명에 달해 최고를 이루었다. 그러나 1972년부터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1977년부터 감소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2009년 5월 현재 교동면 인구는 3,132명이고 세대수는 1,389호이다.

2006년 현재 교동면 전체 면적은 47.14㎢이고 논 25.89㎢, 밭 2.57㎡, 임야 11.45㎢이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교동토의 간척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까지 지속되었다. 이로써 형성된 저평한 평야가 넓고, 완비된 경지정리·수리시설 기계화 등으로 쌀의 생산량은 섬의 자급자족을 넘어 다른 지방으로 나가며,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감자 등과 임산물은 밤·대추·버섯 등이 생산된다.

그리고 밭에서 하는 인삼재배가 농가의 부업으로, 완초공예품은 강화도의 화문석처럼 그 이름이 높다. 완초공예품으로는 화방석·꽃삼합·광주리·손가방·화문석 등 다양하며, 그 가운데 화방석과 꽃삼합은 대도시로 팔려나가는데, 수익성이 높아 오랜 전통을 오늘날까지 지속하고 있다.

6·25전쟁 이전에는 4개의 정기연락선이 있어 육지와 서해도서가 자유롭게 연락되었으나, 전쟁 이후 매우 불편해졌다. 그러나 서울과의 연결은 강화도 창후리에서 수시로 배가 있고, 연안도서를 연락하는 선편이 있으나 불편한 편이다. 육지와 격리된 섬인 까닭에 고려 중엽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유배지로 이용되었고, 지리적 위치상 외세의 침범이 빈번했던 관계로 섬에는 많은 고적이 남아 있다.

1629년에 축조된 읍성지(), 1173년경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 화개산성지, 교동구현허()를 비롯하여, 고려 희종이 유배되어 기거하던 경원전(殿)과 철종잠저소()·봉수대()·단묘() 등과 그 밖에도 많은 유적들이 있다. 또, 명승지로는 교동팔경이 있고, 화개사·교동향교 등은 화개산 남쪽에 있다.

오염원과 축산농가가 없어 맑고 깨끗한 농업용수로 농사를 지어 생산한 교동쌀이 이름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동도 [喬桐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산 아래 집집마다 흰 술 걸러내고

강화에서 나온 한 맥이 서편 언덕을 따라가다가 움푹 꺼진 돌맥이 되고, 작은 개 하나를 지나서 교동도()가 되었다. 이색이 “바닷물 끝없고 푸른 하늘 나직한데 꽃 그림자 나직하고 해는 서로 넘어가네. 산 아래 집집마다 흰 술 걸러내어 파 뜯고 회치는데 닭은 홰에 오르려 하네”라고 노래한 교동도가 개성의 바깥 안산()이 되고, 섬 북쪽은 한강인데 여기에 와서 개성의 안수()가 되었다. 남쪽은 서해에 임하였고, 바다 건너 남쪽은 충청도의 해미ㆍ서산 등의 지역이다.

바다를 사이에 둔 양쪽 언덕이 그리 멀지 않아서 산에서 모두 바다가 보이고, 서북쪽으로는 황해도의 연안, 배천과 개를 사이에 두고 비스듬하게 서로 보인다. 이곳 교동읍 내 화개산 기슭에 조선의 폭군으로 악명 높았던 연산군이 유배를 왔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교동도는 강화보다는 작지만 섬 전체가 모두 돌이고 바다 가운데 따로 솟아 있다. 조선 인조 때 조정에서는 이곳에 통어영을 설치하고 경기, 황해, 평안 삼도의 수군을 거느린 수군절도사를 두어서 바다를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두 섬이 모두 땅에 소금기가 있어 자주 가물고 수확이 적기 때문에 주민은 모두 생선을 잡는 어부와 소금을 굽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오늘날에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사람들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강화도는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 아래 집집마다 흰 술 걸러내고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2012.10.5, 다음생각)

 

 

 

 

 

 

 

 

 

 

 

 

 

 

교동의 원래 이름은 대운도()이다. 고림()또는 달을신()이라고도 불렀으나,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을 두어 고목근현()이라 하고,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고종 32년(1895)에는 읍을 폐하고 강화와 합군하였다가 다음해 7월에 다시 읍으로 하고 군수를 두었다. 그때 당시는 교동 동서남북면 4개 면과 송가면을 합쳐 5개면이었다가 한일합방 후(1911)에 송가면은 송남면으로 개칭하고, 본도는4개면 13개로 구획되어졌다. 합군(1914) 이후, 송남면은 삼산면에 부속되었고 교동은 화개면과 수정면, 2개면이 되었다. 1934년 이후, 화개·수정면을 합면하여 지금의 교동면이 되었으며 현재 법정리는 13개, 행정리는 17개이다.

본도는 인천광역시 서해안에 놓여 있으며 동남은 양사면, 삼산면, 서도면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으로는 불과 5㎞ 밖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북한과 군사분계선을 이르고 있어 황해도 연백군이 눈앞에 보인다. 도서라고는 하지만 비교적 평야가 많으며 해안선은 평탄한 편이고 해저는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동도(강화)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3.6, 한국관광공사)

 

 

 

 

 

 

 

 

 

 

 

 

 

 

 

 

 

 

 

 

 

 

 

 

 

 

 

 

 

 

 

 

 

 

 

 

 

 

 

 

 

 

 

 

 

 

 

 

 

 

 

 

 

 

 

 

뒤편, 강같은 바다 건너 바로 저기가 고향인 사람들이 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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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 성지

 

 

 

 

신리성지는 조선천주교회의 요람이다.

충청도 내포지방의 중심부에 자리한 신리는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끊임없이 예비자, 신자,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성지 내 초가집은 손자선(손도마, 1866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 성인의 생가이다. 동시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안주교, 1866 오천 갈매못에서 순교)의 주교관이자 조선 교구청이었다.

안주교는 이곳에서 끊임없이 찾아드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풀고 신앙 진리를 가르치는 한편, 각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제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리나 초창기의 한글 교리서 저술과 간행, 조선교회의 상황과 순교사적들을 수집 정리하여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내는 일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 자료들이 훗날 한국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토대가 된 이른바 <다블뤼 비망기>이다.

,본디 “천주강생 1815년”에 지어진 생가는 박해시대 이래로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고 그 구조 또한 개조를 더듭해 왔다.

1964년부터는 강당의 형태로 개축되어 공소로 사용되었으나 본당 중심의 사목이 강화되면서 방치되기에 이른다.

이후 성지개발이 본격화 되고 한국교회사연구소로부터 생가의 옛 사진이 발견됨에 따라 원형 복원을 위한 본격적인 조사가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된다. 2004년 마침내 손 성인의 생가이자 안주교께서 사시던 주교관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복원된 생가(주교관)의 기둥과 뼈대는 옛날 그대로이다. 대들보, 서까래, 주춧돌, 문지방 디딤돌, 집 지은 연도를 적은 상량문 등 상당 부분의 실물들이 그대로 사용되어 성인들의 숨결과 손 때가 그대로 묻어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신리성지는 순교자들이 태어난 집과 마을, 거닐던 길 그리고 경작하던 농토도 그 지명들과 함께 그대로 유지되어 순교자들의 자취를 생생히 느끼게 한다. 특히 손자선 성인의 생가와 함께 안주교와 오신부, 민신부 그리고 황석두 루가 등 성인 네 분이 붙잡힌 ‘거더리’의 집(신리 99번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해 준다.

,신리성지는 이처럼 순교자들의 고향인 동시에 순교자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손자선 성인의 순교 이후 그 시신이 신리의 선산에 묻혔다. 그리고 이름이 알려져 있는 33분의 순교자 외에도 성지 인근에는 ‘32기의 목이 없는 무명 순교자 묘’와 ‘14기의 손씨 가족 무명 순교자묘’, 그리고 해미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는 묘 3기가 있다. 이 묘들은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연차적으로 발굴되어 대전리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보존되어 있다.

 

 

 

 

 

 

 

 

 

 

 

 

 

 

 

 

 

 

 

 

 

 

 

 

 

 

 

 

 

합덕 성당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에 있는 천주교성당.

내용

전신은 1890년(고종 27)에 설립된 양촌성당(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인데, 초대본당주임 퀴를리에(Curlier, J. J. L.)신부가 1899년 현 위치에 120평의 대지를 매입, 한옥성당을 건축하고 이전하여 합덕성당으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그 뒤 7대주임 페랭(Perrin, P., )신부가 1929년 현재 건물인 벽돌조의 고딕성당을 신축하였는데, 1960년 신 합덕성당이 분할되어 독립함으로써 명칭이 합덕성당에서 구 합덕성당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합덕지방은 일찍부터 천주교의 사적지로 알려졌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Daveluy, M. A. N.)주교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이 체포되기 전 피신하였던 곳이 현 구합덕성당의 신리공소()로, 당시의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합덕성당 [合德聖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충남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275 지도

1890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세워진 양촌성당으로 출발하여, 1899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명칭도 합덕성당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29년에 신축된 것인데,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양식으로서 벽돌과 목재를 사용한 연와조 구조로 지었으며, 종탑이 쌍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61년 합덕읍 운산리에 신합덕성당이 생김으로써 구합덕성당으로 불리다가, 1997년 다시 합덕성당의 명칭을 되찾았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29년에 준공된 것으로, 벽돌과 목재를 사용한 연와조 구조에 종탑이 쌍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 설계를 담당한 페랭(Perrin) 신부는 6·25전쟁 때 납치되고, 현재 성당 구내에 있는 그의 묘소에는 유해가 없이 유물만 묻혀 있다.

아산만 일대의 내포() 지방은 예로부터 충남지역 천주교의 중심지로, 내포 공동체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언제나 주목을 받는 곳이었다. 1791년 신해박해() 이후 1868년 무진박해() 때까지 이곳은 박해가 있을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김대건(), 최양업() 신부 집안도 이곳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박해시대 한국에서 활동한 성직자들은 거의 이곳을 거쳐갔다.

1890년 장 퀴를리에(Jean Curlier) 신부와 피에르 파스키에(Pierre Pasquier) 신부가 이곳에 파견되어 양촌과 간량골(현재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에 2개의 본당을 설립하였다. 그후 퀴를리에 신부는 여러 차례의 교안()을 겪으면서 양촌이 본당의 중심지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장소를 물색한 끝에 1898년 합덕지() 이웃의 창말[]에 있는 언덕을 매입하여 성당을 건립하고 본당을 이전하여 합덕성당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1907년 매괴학교를 설립하고, 1908년 결성()의 수곡성당(현재 서산성당 전신)을 분리하였으며, 1928년 예산성당을, 1939년 당진성당을 각각 분리하였다. 1960년 11월 합덕읍 운산리()에 여섯 번째 자본당인 신합덕성당을 신설·분리함으로써 본래의 성당을 구합덕성당으로 개칭하였으나, 1997년 다시 합덕성당으로 명명하였다. 1998년 7월 16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275번지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당진 합덕성당 [唐津合德聖堂]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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