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카즈네를 돌아 더 들어 섰다.

 

 

 

 

 

 

 

 

 

 

 

 

 

 

수박? 아주 작았지만 분명 수박이었다.

 

 

 

해태상...

 

 

 

 

 

 

 

 

 

 

 

 

 

 

 

 

 

 

 

 

 

 

 

 

 

 

 

 

 

 

 

 

 

 

 

우리는 계곡, 깊숙이 더 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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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묵었던 호텔

 

 

 

 

 

매표소

 

 

 

 

페트라 [ Petra ]

요약
요르단 남부에 있는 대상 도시유적.

페트라 시크

영국의 시인 존 윌리엄 버건이 '영원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라고 노래한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산악도시이다. 나바테아인은 BC 7세기부터 BC 2세기경까지 시리아와 아라비아반도 등지에서 활약한 아랍계 유목민이다. 이들은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붉은 사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에 도시를 건설하여 일세를 풍미했던 것이다.
 
암벽 속에서 꽃피운 나바테 문명
페트라는 이집트, 아라비아, 페니키아 등의 교차지점에 위치하여 선사시대부터 사막의 대상로를 지배하여 번영을 누렸던 캐러밴 도시이다.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않은 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다. 협소한 통로와 협곡으로 둘러싸인 바위산을 깎아 조성된 페트라의 건물들은 대부분 암벽을 파서 만들어졌다.

이곳은 기원전 1400~1200년 경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에 자리했으며, 구약에서는 '에돔의 셀라'라고 지칭하고 있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를 의미하고, 셀라는 히브리어로 '바위'를 뜻하니 페트라는 바위의 도시인 셈이다. 애급(埃及, 이집트)을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던 모세와 그 추종자들에게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유목생활을 하던 나바테아인이 BC 7세기 무렵 페트라를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나바테 문명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106년에는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땅을 빼앗겼다가, 하드리아누스가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하드리아누스의 페트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후 6세기경 발생한 지진에 의해 도시 전체가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잊혀진 도시, 120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내다
다마스쿠스에서 카이로로 향하는 탐험 도중 젊은 탐험가 부르크하르트는 페트라에 엄청난 유적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듣고 아랍인으로 변장한 후 이곳을 찾아 나선다. 1812년 그는 잊혀진 도시를 발견하였고, 이후 그의 여행기를 통해 페트라를 유럽에 알렸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이곳은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트라 [Petra] (두산백과)

 

 

 

 

 

페트라 시크 입구

 

 

 

 

 

 

 

 

 

 

 

 

 

 

 

 

 

 

 

 

 

 

 

 

 

 

 

 

 

 

 

 

 

 

 

 

 

알카즈네

Al Khazneh

요약

요르단 페트라에 있는 고대 신전 유적.
 

길이1.2km에 이르는 좁은 ‘시크(Siq, 협곡)’가 끝나는 지점에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BC 1세기 무렵에 건설한 나바테아(Nabatea) 왕, 아레타스 3세(Aretas Ⅲ)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높이 43m, 너비 약 30m 규모의 2층 신전 형태의 건축물이다.

1층 부분은 6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1층 중앙 기둥 좌우에는 제우스 신의 쌍둥이 아들인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 기마상을 새겨놓았다. 맨 위쪽에는 파손된 채로 있는 독수리상 2개가 있고 2층 중앙의 원형으로 만든 톨로스(tholos)에는 ‘알-우자(Al-Uzza, 풍요의 여신)’가 조각되어 있다. 이 거대한 기둥들과 다양하고 정교한 조각 장식들은 따로 만들어 세운 것이 아니라 사암 절벽을 파고 다듬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사각 모양의 방이 있고 그 안쪽으로는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뚫려 있다.

‘카즈네(Khazneh, 베두인어로 보물창고라는 뜻)’란 명칭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곳에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전설이 사막 유목민인 베두인족들에게 전해져 비롯되었다고 한다. 알카즈네로 가는 길에는 페트라 시티 센터(Petra City Center)와 알 데이르(Al-Deir)수도원 등의 유적지들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카즈네 (두산백과)

 

 

 

 

 

 

 

 

 

 

 

 

 

 

 

 

 

 

 

 

 

 

 

 

보통 페키지 여행은 여기까지.

우리는 한참을 쉬고..

더 깊숙이 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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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청이 지정한 요르단 내 5대 기독교 성지

 

· 모세가 죽은 느보산(Mt. Nebo): 암만 남쪽 20km 마다바 근처에 소재

· 예수가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받은 베다니(Bethany): 암만 남쪽 30km 사해 입구 근처 소재

· 세례요한의 순교지 마케루스궁터(Macherus 또는 Mukawir): 암만 남쪽 40km 지점(마다바에서 20km)

· 선지자 엘리야의 고향(Tel Eliyas): 암만 북쪽 50km 지점(제라쉬에서 20km)

· 성모마리아의 성소를 모신 안자라교회(Anzara Church): 암만 북쪽 40km(아줄룬 근처)

[네이버 지식백과] 요르단의 주요 명소 (요르단 개황, 2007.1, 외교부)

 

 

 

느보산 [ Nebo Mt. ]

요약
요르단왕국 마다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10km 지점에 있는 산.
위치

요르단왕국 마다바 읍의 북서쪽

  • 높이

    835m

구약성서에 따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지 40년 만에 이 산에 당도하여 가나안 땅을 바라본 다음 거기서 120세로 죽었다(민수 27:12~14, 신명 32:48~52, 34:1~8)고 한다. 이 산은 3개의 중요한 봉우리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높은 봉우리가 니바(Ras al-Niba)로 높이 835m이고, 두 번째 높은 봉우리는 높이 790m 무카야트(Khirbetel-Mukhayyat),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는 높이 710m의 시야가(Ras Siyagha)이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다는 비스가 봉우리는 이 산의 세 번째 봉우리인 시야가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실제로 시야가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에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사해(死海)와 그 서북면에 위치한 초기 예수 시대의 유대교 수도원 유적지 쿰란동굴, 오아시스 도시 예리고와 요르단강, 요르단강과 예루살렘 사이의 유대사막, 그리고 예루살렘의 동부 구릉에 있는 올리브산 꼭대기 등을 훤히 바라다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시야가 봉우리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프란체스코회(프란치스코) 성서연구소에서는 1933년부터 1976년에 걸쳐 시야가를 발굴, 많은 건축물을 발굴해냈다. 모세의 죽음을 기념하여 4세기에 세운 소성당과 제의방과 세례당, 장례당을 두루 갖춘 대성당이 발굴되었다. 이 대성당은 5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제의방에서는 시골 풍경과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모자이크가 발굴되었다. 이 모자이크는 531년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함께 발견되었다.

한편, 구약성서에 따르면, 모세가 느보산에서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기만 하고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유에 대해 두 가지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 그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반도에서 야훼께 반역한 죄 때문이라고 한다(신명 1:37, 4:2). 다른 하나는 모세가 시나이반도 씬 광야 카데스에서 하느님의 명을 어긴 죄 때문에 가나안 땅을 밟을 수 없었다고 한다. 즉,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백성을 불러모은 뒤 바위를 향해 물을 내라고 명령하라고 했는데, 모세는 이를 따르지 않고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내리쳤다고 한다(민수 20:1~13). 이 불충으로 모세는 느보산에서 임종하였다고 한다(민수 27:12~14, 신명 32:48~52, 34:1~8).

[네이버 지식백과] 느보산 [Nebo Mt.] (두산백과)

 

 

모세 [ Mose(s) ]

요약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이자 민족적 영웅이다. 호렙산에서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음성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와 파라오와 싸워 이겨서 히브리 민족의 해방을 이룩하였다.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 40여 년 간 광야를 유랑하지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그 내용이 모세와 관련되는 바가 많아 ‘모세 오경(五經)’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출애굽기》 《민수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레위기》 《신명기》의 율법(律法)은 ‘모세의 율법’이라 일컬어진다.

최근의 고고학적·금석문학적(金石文學的) 연구 결과 성서에 기술된 이집트 입국, 이집트 탈출, 야훼 종교의 채용, 가나안 정복 등은 그 대체적인 줄거리가 역사적 사실에 아주 가까운 것으로 인정되어, 이 역사적 사실의 중심인물로서의 모세의 실재성이 매우 높아졌다. 상당수의 학자들이 모세라는 인물을 람세스 2세 시대인 기원전 13세기경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이자 민족 영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모세가 활동한 정확한 시기나 그와 관련된 일들을 완전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은 강제로 노역에 동원되는 등 파라오의 박해를 받았다. 이스라엘 레위족 집안에서 태어난 모세는, 이스라엘의 사내 아이는 태어나는 즉시 모두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을 피하여 나일강에 버려졌는데, 다행히 파라오의 딸에게 구출되어 왕궁에서 양육되었다. 그는 40세 때 동포가 몹시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유목민 미디안족(族)의 사제(司祭) 이드로(르의엘)의 딸 시뽀라를 아내로 맞아 게르솜과 엘리에젤이라는 두 아들을 얻었다.

80세 되던 해 호렙 산에서  신(神) 야훼에게서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음성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와, 형 아론의 협조를 얻어 파라오와 싸워 이겨서 히브리 민족의 해방을 이룩하였다. 이어 시나이산(山)에서 야훼한테서 십계명(十誡命)을 받고,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契約)의 중개자가 되었다(출애 20:1∼17, 신명 5:6∼21, 출애 34:14∼33).

그후 모세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에돔·모압의 광야에서 40년에 걸친 유랑생활을 계속하지만, 가나안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모세는 야훼의 명에 의하여 요르단강을 건너기 전 예리고 맞은 편 모압 땅의 느보산(山)에서 향년 120세에 죽었다(신명 33 ·34장).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인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세 [Mose(s)] (두산백과)

 

 

프란체스코회 [ Franciscan Order , ─會 ]

요약
1209년 아시시의 프란체스코(프란시스코)가 창립한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
구분

수도회

  • 설립일

    1209년

  • 설립목적

    그리스도의 사랑 전파

  • 주요활동/업무

    설교, 평화운동, 구라사업, 기타 자선사업

  • 소재지

    이탈리아

1209년에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에 의해 ‘작은 형제회’로 창설되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승인을 얻어 복음을 받들고, 특별히 청빈정신을 주창하며 편력설교(遍歷說敎)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탁발수도회로 출발했다. 프란체스코 자신은 자연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으며, 청빈을 부정적 금욕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환희로 돌려 수도생활의 이상을 실현했다.

창립 초기에는 프란체스코의 행동이 곧 회칙이 되었지만, 수도회가 발족한 지 10년 안에 회원수가 5,000명이 넘으면서 회칙을 제정하게 되었다. 1223년에 최종 확정된 회칙이 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승인을 얻었다. 수도회는 1세기 사이에 놀랄 만한 성장을 거듭하여 1300년 전후에는 회원이 3∼4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청빈’의 해석을 둘러싸고 내부 갈등이 생겼고, 그 결과 ‘엄격파’와 ‘온건파’, 그리고 ‘이완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짐으로써 분규가 계속되었다.

13세기 후반에 프란체스코회의 제2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보나벤투라(Bonaventura)가 총회장직을 맡으면서 수도회 영향력은 전 유럽에 미쳤으며, 시리아아프리카 등지에까지 선교사가 파견되었고, 파리와 옥스퍼드 등에 있는 수사들의 집을 기반으로 신학교가 세워졌다. 그러나 청빈의 실천을 두고 회칙엄수파와 온건파 사이의 갈등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교황 레오 13세 때인 1897년 양파가 통합되어 관구(管區)의 합병과 개편이 이루어졌다.

종래의 수도사가 주로 농촌을 그 기반으로 삼은 데 비해, 이 탁발수도회는 도시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전통적으로 설교·평화운동·구라사업(救癩事業) 및 기타 자선사업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또한 성탄절의 구유, 십사처(十四處), 삼종기도 등 가톨릭교회의 여러 의식을 정착시켰다. 보나벤투라, J.둔스스코투스(J.Duns Scotus), 윌리엄 오브 오컴(William of Ockham) 등 스콜라철학의 학자들을 배출했고, 해외선교를 통해 교육과 학문 분야에 많은 기여를 했다. 제2프란체스코회(클라라관상수녀회), 재속형제회(在俗兄弟會)인 제3프란체스코회가 있다.

한국에는 1937년 9월, 캐나다 관구 소속의 수사 두 사람이 파견되어 대전광역시 목동에 자리잡고 ‘작은형제회’를 설립함으로써 시작되었으나, 일제강점기6·25전쟁으로 폐쇄되었다가 1955년에 다시 입국했다. 1969년에 한국 준관구로 승격되었고, 1987년 12월에 한국 진출 50주년을 기념하여 총본부로부터 ‘한국 순교성인 관구’로 인가받았다.

한국의 작은형제회(프란체스코회)는 성소계발 및 본당사목 외에도 나환자복지·노인복지·빈민복지·재가복지 등 복지사업을 펼친다. 또한 카자흐스탄·일본·중국·러시아 등의 해외 선교사업도 활발히 하고 있으며, 본부에서는 수도자신학원과 프란체스코 사상연구회를 운영한다. 2000년 현재 전국에 17개 수도원이 운영되고 있으며, 본부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란체스코회 [Franciscan Order, ─會] (두산백과)

 

 

 

 

가나안 [ Canaan ]

요약

기원전 18세기 설형문자로 기록된 마리문서에 처음 등장하며 팔레스타인 서쪽 해안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며 또한 노아의 손자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요르단 서쪽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언어는 셈어족의 북서쪽 방언에 속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수메르어나 아카드어에 속한다는 견해도 있다. 가나안의 그리스 명칭은 페니키아이며 자주빛의 색을 의미한다. 그리스 사람들이 페니키아로 부른 것은 가나안지역에서 자주빛 염료의 생산지로 인식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또한 가나안은 상인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아마르나 문서(이집트의 고문서)에 따르면, BC 3000년 무렵 셈족이 가나안에 거주했고, BC 2200∼BC 2000년 이집트인이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였으며, BC 15세기에는 이집트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그 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가 혼란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BC 11세기에는 이집트 세력이 가나안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곧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와 지배하였다. 이 지역은 문명의 교차로로 자리잡고 있어 이집트 ·미케네 ·크레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으며, 주신 옐을 비롯하여 비와 풍요의 신 바알, 옐의 아내 아세라, 풍요를 주관하는 아스타르테 등이 있다. 고대 셈족에는 카리스마적인 형태와 정치적 형태라는 두 지배체제가 있었는데, 전자는 신적인 영력(靈力)을 받은 권위로써 민중을 지도하고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서의 판관(判官)이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창세기에 언급된 가나안은 노아의 아들인 함의 아들, 즉 노아의 손자로 등장하는데 포도주에 취한 노아를 함이 조롱하자 노아는 함에게 저주를 내려 함의 아들이 종이되리라고 하였다. 후일 노아의 예언대로 가나안의 후예인 가나안 족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타락한 민족이 되어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되었다고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나안 [Canaan] (두산백과)

 

 

 

 

 

 

 

놋뱀 [ brazen serpent ]

요약
청동으로 만든 뱀의 형상.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느님에게 불평하여 불뱀이 그들을 물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낫게 하기 위하여 모세가 하느님의 지시로 놋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보는 자는 살게 된다고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다.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본 자는 모두 치료되었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었는데, 히스기야는 이것을 부수어 버렸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열왕기하 18:4)고 기록되어 있다.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는 자기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고, 영적 의의를 모세 때 있은 놋뱀사건을 인용하여, 부활의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고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나타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놋뱀 [brazen serpent] (두산백과)

 

 

모세 기념 성당은 재건축 중이었고...

 

 

 

 

 

 

 

성 조지 교회_그리스 정교회

 

마다바 [ Madaba ]

요약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에서 남쪽으로 30m지점에 위치한 마다바는 1500년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서 모자이크 지도로 인해 모자이크 도시로 유명하다.
마다바는 암만에서 30km지점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서 현재는 인구가 5만명 정도되는 중소규모의 도시이다. 해발 700~800미터 고원 평지에 위치해 있는 이 곳은 4000년전 부터 존재하던 '왕의대로(고대 국제무역 통상로: King's High way)'상에 위치한 곳으로서 성경 구약에는 메드바라는 도시로 나오며 4500년 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마다바에서 발굴되는 유적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이 곳은 원래 모압왕국에 속했었는데 아모리 왕국에 의해 정복되었다. 모세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도중에 당시 이 곳을 차지하고 있던 아모리 왕국의 시론왕에게 모세가 사신을 보내 아모리 왕국의 영토안에 있는 왕의 대로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해 줄 것을 부탁하지만 시론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아모리 왕국의 시론왕은 군대를 이끌고나와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민족과 전투를 치른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여 이 곳을 차지하고 있던 아모리 왕국 사람들을 몰살하고 이 곳을 비롯하여 주변의 모든 도시를 차지한다.

이스라엘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는 이스라엘 12지파중 하나인 르우벤 지파가 이 곳을 분배받게 되는데 이 지역은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고 농업과 목초 재배에 유리하여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AD106년 로마가 이 지역을 정복한 후 기독교가 전파 되었고 로마에 의해 탄압을 받으면서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순교하게 된다.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7세기까지 많은 교회가 세워졌으며 5세기 부터는 이 곳에 주교가 임명되어 주재하게 된다.

기독교 도시로 번성하던 이 곳은 7세기 중반, 현재의 요르단, 팔레스타인, 시리아에 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대규모 지진으로 인하여 도시가 파괴되어 1000년 이상을 폐허화된 곳으로 남아 있다가 1800년대 말 마다바에서 남쪽으로 80km지점에 위치한 케락이라는 도시에서 200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집단으로 이 곳으로 이주하면서 도시가 재건되는 계기를 맞는다. 당시 아랍 전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 터키는 이주민들에게 교회는 8세기 경까지 이 도시에 많이 있던 교회터를 찾아서 그 위에 짓도록 함으로써 비잔틴시대의 교회들이 발굴되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1896년 경에 발굴된 성 조지(St.George) 교회이다.

이 교회 바닥에서는 550년에 만들어진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모자이크 지도가 발견되었는데 이 지도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서 모자이크 지도로 유명하다. 이 지도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중근동 지역의 성지와 주요 도시를 200여 만개 이상의 다양한 색상의 돌을 이용하여 16 x 6m짜리 지도를 제작하였는데 일부가 훼손되어 현재는 3분의 1 정도만 남아 있다. 지도의 가장 중심점인 위치에 예루살렘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사해, 요단강, 예수님 세례터, 아르논 강, 세렛강, 시내산, 나일강 등이 선명히 남아 있어 성서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다바는 성 조지(St.George) 교회를 비롯하여, 300여 미터 근처에 위치한 고고학 박물관, 그리고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마다바 박물관 등이 볼거리이다. 자동차로 15분 거리에는 모세가나안 땅을 바라만 보고 그 근처에서 죽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느보산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다바 [Madaba] (두산백과)

 

 

 

 

 

 

 

 

 

[파노라마] 협곡(와디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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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장치 없이 노트북으로 다이렉트 녹음한 것입니다.

아쉽더라도 많은 이해 청합니다.

 

 

 

요르단 [ Jordan ]

 
위치

중동, 사우디아라바이아의 북서쪽, 이스라엘과 이란의 사이

  • 경위도

    동경 36° 00", 북위 31° 00"

  • 면적

    89342㎢

  • 수도

    암만(Amman)

  • 종족구성

    아랍인(98%), 체르케스인(1%), 아르메니아인(1%)

  • 공용어

    아랍어

  • 종교

    수니파 이슬람교(92%), 기독교(6%), 기타(2%)

  • 건국일

    1946년 05월 25일

  • 국가원수/국무총리

    압둘라(ABDALLAH II) 국왕 (99.2.7 즉위)

  • 정체

    입헌군주제

  • 통화

    요르단 디나르(JD)

  • 인터넷도메인

    .jo

  • 홈페이지

    http://www.jordan.gov.jo

  • 기타

    ISO3166-1 : 400
    ISO3166-1Alpha-3 : JOR
    1인당명목GDP : 4,901(2012년)
    1인당구매력평가기준GDP : 6,044(2012년)

  • 인구

    6,508,887(2012년)명

  •  수출규모

    79.63(2011년)억$

  • 수입규모

    162.70(2011년)억$

 

정식명칭은 요르단 하심왕국(The Hashemite Kingdom of Jordan)이다. 북쪽으로 시리아, 북동쪽으로 이라크, 동쪽과 남쪽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서쪽으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 국경을 접한다. 사해 해안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아카바만(灣)은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와 함께 소유한다. 요르단강(江) 서안 지역에 유대·그리스도·이슬람 세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이 있으며,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 후 한때 이스라엘에 점령당해 팔레스타인 갈등의 초점이 되고 있다. 행정구역은 12개 무하파자(muhafazah)로 되어 있다.


 

 

 

암만 [ Amman ]  

  • 위치

    요르단강 동쪽 75km 지점

  • 면적

    1680㎢

  • 시간대

    UTC+3, Summer: UTC+3

  • 홈페이지

    www.ammancity.gov.jo

  • 인구

    1,919,000(2010년)명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요르단강 동쪽 75km 지점, 아라비아 고원의 서쪽 끝 높이 약 800m의 대지에 자리잡고 있다. 암만은 BC 5세기경부터 있었던 옛 도시로, 성서의 라바트암몬과 일치하나, 유적으로는 몇 개의 분묘만이 발굴되었을 뿐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 2세가 도시를 재건했고, 그 후 로마 ·비잔틴 시대에는 필라델피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으며, 특히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과 헤라클레스 신전 및 해안에 있는 님프의 폐허가 유명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아밀 압둘라가 이곳에 정부를 수립하고 수도로 정했으며, 팔레스타인 전쟁 때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 세력의 중심지로 아랍 군단이 주둔하기도 했다.

인산염 ·건축용 석재 ·채소 ·과일 등의 집산지이며, 사막의 주민과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 중심지이다. 시내에는 궁전 ·관청 ·법원 ·병원 ·의회 등을 비롯하여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으며, 특히 고대의 성채는 고고학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건물의 대부분은 석조건물로, 도시의 남서쪽에는 대리석 채석장이 있다. 예로부터 성지 메카와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의 숙박지로 발달하였다. 현재는 순례철도가 다마스쿠스로부터 이곳을 지나, 남쪽의 만 ·아슈타르로 이어진다. 포장도로로 다마스쿠스 ·만 ·예루살렘 ·바그다드 등지에 연결되며 암만 국제공항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암만 [Amman] (두산백과)

 

 

 

 

 

 

 

남문, 하드리안 개선문

 

제라시 유적 [ Jerash Ruins ]

제라시는 해발 600m에 위치한 유적도시로 선사사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으며 1∼3세기에는 로마제국의 동방거점도시였다. 지금까지 로마시대의 화려한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AD 129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지은 개선문(Triumphal Arch), 주피터신전과 아르테미스신전, 1만 5000명 수용규모의 전차경기장인 히퍼드롬(Hippodrome), 5,000명 수용규모의 원형 야외극장, 거대한 욕탕, 시장터, 타원형 광장, 화려한 코린트식 대리석 돌기둥을 양쪽으로 세워놓은 열주(列柱)거리 등이 유명하다.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향하는 길목의 열주도로는 바닥에 돌이 꼼꼼하게 박혀 있다. 기초 구조와 일부 관중석만 남아 있는 히포드롬에서는 현재 로마시대 복장 군인과 검투사가 참여하여 전차경주 등을 재연하는 공연이 진행된다. 유적 대부분은 1900년대 초부터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전체 유적지의 20% 정도만 발굴되었을 정도로 규모가 방대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라시 유적 [Jerash Ruins] (두산백과)

 

 

 

 

 

 

 

 

 

 

 

 

 

 

 

 

 

파노라마

 

 

 

 

 

 

 

 

 

 

 

 

 

 

 

 

 

해그림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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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그림 작

 

 

해그림 작

 

 

 

 

 

 

 

 

 

 

 

 

 

 

 

 

 

 

성 테오도르 성당

 

 

 

성 코스마스 다미안 교회

 

 

 

 

 

 

 

 

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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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안자르 유적 [ Ruins of Anjar ]

  • 대륙

    아시아

  • 위치

    레바논>베카아 계곡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984년

  • 저자

    루신다 혹슬리

우마이야 왕조가 세운 도시가 남긴 훌륭한 자취

태양이 비치는 레바논 하늘을 배경으로 헐벗은 해골처럼 서 있는 이 웅장한 유적은 이 지역의 역사를 돌이켜 보게 해 주는 흥미진진한 흔적이다. 오늘날 안자르의 인구는 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가 데려온 아르메니아 이민자로 이루어져 있다. 아르메니아인이 도착했을 때, 도시는 인적 없고 황량한 사막과도 같았다. 피난민은 텐트 안에서 살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 이후 그들은 안자르를 고향으로 삼아 다시 녹색이 감도는 경작 지역으로 바꾸어 놓았다.

안자르의 전성기는 우마이야 왕조 시대(660~750)였다. 칼리프 왈리드 1세가 이 도시를 지었으며 곧 번영하는 떠들썩한 도시가 되었고, 6천 개 이상의 상점이 들어선 극히 중요한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안자르를 사냥 별장이자 여름의 가장 더운 몇 달을 보내기 위한 휴양처로 이용했다.

우마이야 왕조가 세운 이 도시의–주민들에게는 '게르하'라 알려져 있었다–최초 발굴 작업은 1949년에 시작되었으며 아직도 진행 중이다. 상점의 우아한 아케이드를 형성했던 높은 기둥과 늘씬한 아치 길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목욕탕, 주택, 궁전, 모스크, 수크(무슬림 국가의 야외 시장), 잘 포장된 도로의 유적도 남아 있다. 도시는 강력한 요새 설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아직도 웅장한 관문들과 탄탄하게 지어진 감시탑들을 볼 수 있다. 안자르는 시냇물 근처에 건설되었고, 물을 끌어오기 위해 홈통과 파이프가 설치되었다.

안자르의 건축 양식에는 토착 양식과 외부에서 들여온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며, 성벽의 석조 세공에서는 그리스, 로마, 초기 기독교 건물이 지닌 요소를 종종 찾아볼 수 있어 옛 건축물의 자재를 재활용했으며 전리품들을 건축 양식에 통합해 넣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지금은 머리가 사라졌으며, 풍성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조각된 커다란 조각상이 황폐해진 유적 위로 망을 보고 있다. 가까운 곳에는 이보다 더 오래된 문명의 규모가 크게 줄어든 유적인, 로마 시대 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자르 유적 [Ruins of Anjar]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1.20, 마로니에북스)

 

 

 

 

 

 

우마이야 왕조 [ Umayyad dynasty , ─王朝 ]

요약
무아위야 1세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여 세운 이슬람 칼리프조(661∼750).
 

우마이야 왕조는 정통칼리프 시대에 이어 아랍-이슬람 제국의 2번째 칼리프조로서, 우마이야 가문에 무아위야에 의해 세워졌다. 우마이야 가문은 예언자 무함마드와 같은 쿠라이쉬 부족에 속해있으며, 전승에 따르면 같은 조상인 압두 무나프(Abu Munaf)의 후손들이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압두 무나프의 아들 중 하쉼(Hashim)의 혈통을 이은 하쉼 가문에 속했으며, 우마이야 가문은 압두 샴스(Abd Shans)의 혈통을 이은 가문이었다. 하쉼 가문과 우마이야 가문은 메카의 정치, 경제적 주도권을 두고 경쟁관계에 있었으며, 특히 우마이야조의 제 1대 칼리프 무아위야(Mu'awiyah)의 부친 아부 소피얀(Abu Sufyan)은 무함마드의 이슬람 포교 초기에 가장 대표적인 반대인물이었다. 아부 소피얀을 비롯한 우마이야 가문은 여러 차례의 전투를 거친 끝에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며, 빠르게 팽창하는 이슬람 제국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정치적, 외교적 기술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면서 이슬람 공동체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이은 정통 칼리프조 말기, 이슬람 신앙의 동요와 잇따른 음모로 혼란이 거듭되었다. 제 3대 칼리프 오스만이 새벽기도 중 암살당하고, 그 암살의 배후가 밝혀지기 전에 알리가 제 4대 칼리프로 선출되었다. 그러자 오스만의 6촌 동생이자 당시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있던 우마이야(Umayyah) 가문의 무아위야(Mu'awiyah)가 오스만의 복수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며 알리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알리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아위야군과의 첫 전투인 낙타전투(A.D. 656년)에서 승리했으며, 두번째 전투인 십핀전투(A.D.657년)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자 불리해진 무아위야군은 협상을 요구했으며, 협상 과정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했다. A.D. 661년, 이라크 지역으로 돌아간 알리가 카와리지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힘의 균형은 우마위야에게 기울었으며, 그는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는 한편 칼리프위에 올라 우마이야 왕조를 세웠다. 후에 안달루스 지방에 성립한 ‘후기 우마이야조(757-1031)’와 구별하여 이것을 ‘전기 우마이야 왕조’라고도 한다.

우마이야 왕조의 제 1대 칼리프 무아위야(A.D.661-680년 재위)는 선출로 칼리프를 뽑는 전통을 무시하고 아들 야지드(Yazid)에게 칼리프위를 세습했다. 이로서 칼리프제는 선출에 의해 지도자를 뽑던 전통적 관행을 깨고 세습제로 전환되었다. 그는 또 군사조직도 비잔틴 양식에 따른 새 편제로 바꾸었다. 이것은 강력한 중앙정권의 수립과 제국이 계속 영토확장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무아위야는 668년 비잔틴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섰다가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아랍-이슬람 제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무슬림의 단결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전성기는 제 5대 칼리프 압둘 말리크와 그의 아들인 왈리드 1세 때이다. 특히 칼리프 왈리드 1세(705-715 재위) 때에는 아랍의 정복사업이 매우 활발하게 펼쳐졌다. 첫째, 이라크 동북쪽 중앙아시아 방향으로 꾸타이바 빈 무슬림 장군의 주도 하에 진행된 정복활동으로서, 705년에서 712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 결과 메르브, 발크, 부카라,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여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방과 옥수스 강 건너편까지 제국이 확장되었고, 이 지역이 이슬람화되었다. 둘째, 이라크 동남쪽 인도 방향으로의 원정으로, 무함마드 빈 알 까심이 맡아 하였다. 710년에서 712년 사이에 진행되었으며, 발루치스탄과 펀자브 지방까지 제국이 확장되었다. 셋째는 북아프리카 서쪽과 유럽 지역으로의 정복활동으로, 무사 빈 누사이르와 그의 부하 따리크 빈 지야드에 의해 이루어졌다. 710년에는 북아프리카 전역이 아랍-이슬람화 되었으며, 711년에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 아랍군에 의해 서 고트 왕국이 멸망하고 스페인 전역이 우마이야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그동안 완비된 역체제도(驛遞制度) ·밀정사찰(密偵査察)제도는 칼리프의 독재군주권을 강화하였고, 종래의 잡다한 통화(通貨)는 중앙정부가 발행한 순수한 아라비아풍의 디나르 금화(金貨)와 디르함 은화로 통일하였다. 무거운 지조(地租)의 부담을 면하기 위하여, 다수의 비(非)아라비아계 주민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마왈리[被護民]가 됨으로써 국가에 대한 세수입(稅收入)이 대폭 감소하였다. 때문에 이라크 총독 하자지는 그들을 농지로 되돌려 보내고, 당초 부담한 지조와 인두세(人頭稅:Jizyah)에 해당하는 고액의 공조(貢租)를 부과하였으므로 마왈리의 불만이 증대하였다. 특히 우마르 때 지조의무를 지닌 토지소유자가 개종할 때 그 토지는 이슬람공동체의 공유재산으로 하고 원래 소유주는 차지인(借地人)의 입장에서 경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정책은 성공하지 못하였고 뒤에 수정된 하자지의 제도로 복귀하였다. 결국 징세(徵稅) 때문에 궁핍화한 피정복민의 울분과 호라산의 반란을 이용한 압바스가(家)의 흥기(興起)로 마침내 멸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마이야 왕조 [Umayyad dynasty, ─王朝] (두산백과)

 

 

 

 

 

 

 

 

 

 

 

 

 

 

 

 

 

 

 

 

 

 

 

 

 

 

 

 

 

 

 

 

 

시리아가 내전 중이라 이스라엘을 돌아 시나이 반도를 거쳐 요르단 암만 공항으로 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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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산맥을 넘어

 

 

 

 

 

채석장

 

 

 

 

 

 

 

 

 

 

 

 

 

 

 

 

바알베크 [ Baalbek ]

요약
레바논의 베이루트 동북쪽 약 65km 지점에 있는 고대도시. 그리스시대 헬리오폴리스로 알려진 페니키아의 도시로 로마시대에 세워진 쥬피터 사원이 있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은 누구나 알지만 그보다 더 장대한 규모인 바알베크의 유피테르 신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늘날의 레바논 즉 중동 지역에 위치해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던 데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불안정한 정세로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해도 이곳 바알베크의 신전군은 로마 제정 시대 최대의 건축물임에 분명하며, 거대한 규모와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또한 이 지역 신전들은 토착 신앙과 로마 종교가 조화롭게 결합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든 흡수하고 받아들여서 새로운 것으로 창조하는 로마 제국의 관용과 포용력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알베크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동북쪽으로 약 6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고대도시다. 바알베크가 위치한 베카 평원은 레바논 산맥과 안티레바논 산맥 사이에 있는 고원 지대로 땅이 비옥해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페니키아 시대부터 농경과 관련된 종교가 발달하였다. 바알베크(Baal-Bek)라는 명칭 또한 바알(Baal, 페니키아의 신)이라는 신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이집트 프롤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바알베크의 이름은 ‘태양신의 도시’라는 의미의 헬리오폴리스로 바뀐다. 바알베크가 로마제국의 영토가 된 것은 기원전 64년이었다. 로마인들은 지역의 토착 종교를 인정하면서 로마 종교와 결합시켜 이 곳을 제국 최대의 신전군으로 발전시켰다. 물론 건축 양식에 있어서도 동서양이 혼합된 헬레니즘의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바알베크의 신전들은 신전 터가 고르지 않아 높낮이를 맞추기 위해서 높은 단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무게가 750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돌들이 기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바알베크에 거대한 로마 신전 건축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은 바로 아우구스투스 황제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하는 유피테르 신전이 바로 그것이다. 유피테르 신전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직접 설계했다고 하는데, 네로 황제 때인 60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건물은 대부분 무너져서 넓은 터와 6개의 거대한 기둥만이 남아 있다. 기둥은 높이가 20미터가 넘고 지름이 2.4미터(m)에 이르는데 원래는 54개의 기둥이 있었으며, 높이도 40미터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전 안뜰 중앙에는 2개의 제단이 설치되고, 좌우에는 연못이 있었다. 이 신전에는 유피테르 신 이외에도 페니키아 토착 농업 신들이 함께 안치되었다. 각각 아버지, 어머니, 아들을 상징하는 하다드(하늘과 폭풍의 신), 아타르가티스(물과 풍요의 신), 알리얀(식물의 정령 신) 세 신이 모셔졌다.

유피테르 신전 남서쪽에 있는 바카스 신전은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사원이다. 유피테르 신전보다 조금 늦은 2세기경에 건립되었으나, 지붕 이외에는 원형이 그래도 보존되고 있다. 신전 안에는 신상이 안치된 지성소가 있는데 이는 페니키아적인 건축 요소이다. 이외에도 3세기 초에 건립된 베누스 신전, 메르쿠리우스 신전 유적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3세기 중반까지 로마 황제들의 신전 건축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세기에 로마가 그리스도교 공인하고 국교로 삼으면서 신전 건설이 중단되었다. 7세기 이후에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받으면서 도시의 원래 이름인 바알베크로 불리게 되었으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중세를 지나는 동안 신전들은 관리의 손길이 없이 비바람에 풍화되어 갔다. 이후 1759년 대지진 등 여러 차례 이 지역을 덮친 지진으로 신전 유적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16세기 유럽인들이 바알베크 유적에 관심을 가졌으나, 실질적인 발굴이 이루어진 것은 20세기 초에 와서다. 반세기 이상 계속된 레바논 내전 또한 바알베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1970년 대에는 신전 유적지가 게릴라들의 훈련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전쟁의 혼란 속에 귀중한 문화유산이 국외로 반출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알베크 [Baalbek]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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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커스신전 [ Temple of Bacchus ]

요약
레바논의 고대도시 바알베크(Baalbek)에 세워진 신전.

 

150년경 로마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유피테르 신전 옆에 정면 36m, 측면 68m로 거대하게 보존되어 있다. 앞뒤로 8개씩, 양옆으로 15개씩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데 지붕을 빼면 내부가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화려한 코린트식으로 지어진 벽기둥의 머리는 식물문양으로 장식되어 있고 제단은 벽감 속에 들어가 있다.

신전 안에서 바커스 신과 뮤즈 신의 조각상을 볼 수 있고 베누스 신을 상징하는 상당수의 내부 장식물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사람들이 내세 구원을 믿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유피테르 신전에서 제사를 지낸 뒤 이곳에서 성대한 잔치를 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너편에 작지만 섬세한 비너스 신전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커스신전 [Temple of Bacchus] (두산백과)

 

 

 

 

 

 

 

 

 

 

 

 

 

 

프로필라이온 [ propylaion ]

요약
고대 그리스의 성지 입구에 세운 문으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의 것이 대표적인데, 도리스식의 중후함과 이오니아식의 우미함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테네 ·올림피아 ·에피다우로스 ·엘레우시스 등의 모뉴먼탈한 문은 일반적으로 복수(複數)로 프로필라이아(propylaea)라고 한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의 것으로, 건축가 무네시클레스가 BC 437∼BC 432년에 건조하였다. 이 거대한 문은 도리스식과 이오니아식을 병용, 남북에 주랑익(柱廊翼)을 두고, 북익(北翼) 앞에 다시 피나코테크(繪畵收藏室)를 비치하였다. 천장은 격자인데 현재까지도 부분적으로 당시의 채색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도리스식의 중후함과 이오니아식의 우미함의 아름다운 조화는 파르테논 신전과 더불어 고대건축의 일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로필라이온 [propylaion] (두산백과)

 

 

 

 

 

 

 

 

 

 

파노라마

 

 

 

유피테르 신전

 

유피테르신전 [ Temple of Jupiter ]

요약
레바논의 고대도시 바알베크(Baalbeck)에 가장 거대하게 세워진 신전.
페니키아 사람들이 자신들의 태양신 바알에게 제사를 지내던 자리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 신이 세계 제일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직접 설계했다고 전하며, 네로 황제 때인 60년에 완성되었다. 로마의 신인 유피테르 신과 페니키아의 농업 신들인 하다드(하늘과 폭풍의 신), 아타르가티스(물과 풍요의 신), 알리얀(식물의 정령 신) 등 세 신을 함께 모셔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신전 입구와 육각형의 앞마당, 정교하게 장식된 반원형 벤치들로 둘러싸인 가로 104.5m, 세로 103m 크기의 직사각형의 그레이트 코트(Great Court)와 신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전 건물의 크기는 정면 48m, 측면 88m로 그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크다. 직사각형의 그레이트 코트 서쪽 끝 높은 단 위에 높이 40m가 넘는 커다란 기둥 54개가 세워져 있고 신전 안뜰 중앙에는 2개의 제단과 좌우에는 연못이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 무너져 높이 18.9m, 지름 2.4m인 기둥이 6개만 남아 있다. 주변에 바커스신전, 비너스신전 등이 함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피테르신전 [Temple of Jupiter] (두산백과)

 

유피테르 [ Jupiter ]

요약
로마 신화의 최고신(最高神).
 

'주피터'는 영어 발음이다. 원래는 천공(天空)의 신이며, 그리스신화의 제우스에 해당한다. 온갖 기상 현상을 지배하며, 비와 폭풍과 천둥을 일으키는 신이다. 로마에서는 예로부터 카피톨리노언덕 위에 유피테르의 큰 신전이 건립되어 있어, 집정관(執政官:콘술)이 취임하면 우선 이 신전참배하였으며 또 원정에서 돌아온 장군의 개선(凱旋)행렬도 이 신전으로 향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최고 최선의 유피테르'라고 불리며, 전쟁에서는 로마에 승리를 가져다주는 수호신일 뿐만 아니라, 정의와 덕을 다스리고 서약과 법률을 지키는 신으로 모셨다. 또한 미래를 내다보는 힘이 있어 인간의 미래를 여러 가지 전조(前兆)나 하늘을 나는 새의 특징을 보아 예언한다고 믿었다. 맑게 갠 보름날 달밤에 제사를 지냈는데, 흰색이 신성시되어 신관(神官)과 참배하는 집정관은 반드시 흰옷을 입었으며, 또한 흰 동물을 제물로 바쳤다. 또한 신 자신은 4마리 백마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닌다고 여겨졌다. 여신 유노(주노)는 유피테르의 아내로 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피테르 [Jupiter] (두산백과)

 

 

 

 

 

 

 

 

 

 

 

 

 

 

 

 

 

박물관

 

 

 

 

 

 

8월의 눈(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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