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로....

 

 

 

 

 

 

 

 

 

 

 

 

 

 

 

 

 

 

 

 

 

 

 

 

 

 

 

 

 

 

 

 

 

 

 

 

 

 

 

 

 

 

 

 

 

 

 

 

원본 : http://blog.naver.com/iamqueena?Redirect=Log&logNo=130179751023

 

 

 

 

 

 

 

 

 

 

 

 

 

 

 

 

 

 

텔아비브야파 [ Tel Aviv-Yafo ]

요약
이스라엘 텔아비브 지역의 중심도시.
 위치

이스라엘 텔아비브 지역

  • 경위도

    동경34°48′0 북위32°5′0″

  • 면적

    50.6㎢

  • 시간대

    UTC+2

  • 홈페이지

    http://www.tel-aviv.gov.il

  • 인구

    384,276(2006년)명

'아름다운' 이라는 뜻을 갖고있는 이스라엘 제1의 도시이다. 야파는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지중해의 관문이자 이스라엘 지중해 해안평야의 중심지로 중요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항구이다. BC 2000년 무렵에 있었던 유대인 취락으로 BC 15세기경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에게 점령당했다. 그 후 페르시아인들이 지배했으며 BC 350년경 독립했다. 17세기 말에 이르러 야파는 항구로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1909년 그 북쪽에 이주자들이 새로 텔아비브 시가를 건설하였다. 텔아비브는 이스라엘 건국(1948)부터 1950년까지 수도로서 세계 각지로부터의 귀국자를 맞이하여 급속히 발전하였다. 1949년에는 야파를 합병하였다.

상가와 번화가의 중심을 이루는 시의 북부와 남부는 공업지대이며, 주종은 섬유·약품·식품·가구 등이다. 주변의 도시화가 진척되어 라마트간·베네베라크·홀론 등 인접한 위성도시와 시가지가 이어져 광대한 도시권을 형성하고, 철도·도로교통의 중심지로 리다 공항이 있다. 텔아비브대학·박물관·미술관 등 문화시설이 많이 있으며, 텔아비브항(港)과 야파항은 연안 어업무역의 기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텔아비브야파 [Tel Aviv-Yafo] (두산백과)

 

 

 

 

 

 

 

 

 

 

 

 

 

 

 

 

 

 

 

 

 

 

 

 

 

 

 

 

 

 

 

 

 

 

 

 

 

 

 

 

 

 

 

 

 

 

 

 

 

 

 

 

 

 

 

 

 

 

 

 

 

 

 

 

 

 

 

 

 

 

 

 

 

 

 

 

 

 

 

 

 

 

 

 

 

 

 

 

 

 

 

 

 

 

 

 

 

 

 

 

 

 

 

 

 

 

 

 

 

 

 

 

 

벤구리온국제공항 [ Ben Gurion International Airport ]

요약
이스라엘 텔아비브(Tel Aviv) 부근에 있는 국제공항.
 

텔아비브에서 15km 떨어진 로드(Lod)시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헤브루어로는 ‘나트바그(Natbag)’라고도 불린다. 1936년 리다공항(Lydda Airport)으로 처음 설립하였으며 1948년부터 1973년까지 로드공항으로 불리다가 이후 이스라엘 초대수상 벤구리온(David Ben Gurion, 1886~1973)의 이름을 따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붐비는 공항으로, 이스라엘 공항공사(Israel Airports Authority)가 운영을 맡고 있다. 2007년 한해 동안 국내외를 합하여 약 1,050만 명의 승객이 오고 갔으며 약 8만 5,000편의 비행기가 착륙하였다. 2007년 현재 국제선은 3공항터미널, 국내선은 1공항터미널을 사용한다. 활주로는 상업용, 개인용, 군용 등 3개가 있으며 길이는 1,780m, 3,657m, 3,112m 규모이다. 부근에 예루살렘-텔아비브 간 1번과 40번 고속도로가 인접해 있으며 버스와 철도 승용차, 택시도 이용하기 쉽다. 공항 치안을 경찰과 이스라엘 군대가 담당하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공항 중 하나로 손꼽힌다.

[네이버 지식백과] 벤구리온국제공항 [Ben Gurion International Airport] (두산백과)

 

 

 

엄중한 검문 검색

우리는 엊그제 팔레스타인 지역의 호텔에서 묵었다는 것은 감추고

일행이 입을 맞췄다.

"예루살렘의 샬롬 호텔"

 

그리고 조신하게 이스라엘을 탈출했다.

 

귀국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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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의 벽 [ Wailing Wall ]

요약
이스라엘 예루살렘 서쪽 성벽 일부의 명칭.
 

구약성서에 의하면 솔로몬왕은 예루살렘에 장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성전은 전쟁 등으로 파괴되었으나, 헤로데스 왕이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재건하였다. 이 벽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전의 서쪽 일부라 여겨 '서쪽벽(Western Wall)'이라 불렸다.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란 명칭도 자주 사용하는데 이 용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래가 전해진다. 하나는 예수가 죽은 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데, 이같은 비극을 지켜 본 성벽이 밤이 되면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는 설에서 유래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이 성벽 앞에 모여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다.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사이의 오랜 분쟁거리로 남아있다. 유대인들에게 이 벽은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의 상징이지만,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바위 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에 속한 이슬람 성지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어 1929년에는 '통곡의 벽 사건'이라 불리는 폭력 및 대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종교 분쟁은 1928년 9월 일부 유대교 신자들이 남녀가 따로 모여 앉아 예배를 올려야 한다는 유대교식 집회를 위해 벽에 막과 분리대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자신들이 성지라 여기는 곳에 일방적으로 공사를 하는 유대인들에게 큰 분노를 느꼈고 돌을 던지며 이를 제재하려고 했다. 당시의 분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유대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적 감정이 크게 악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요르단으로 분할되면서 이 성벽은 요르단에 속하였으나, 1967년 6월의 제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점령하여 성벽은 이스라엘로 넘어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통곡의 벽 [Wailing Wall] (두산백과)

 

 

 

 

 

 

 

 

 

 

 

 

 

 

 

 

 

 

 

 

 

 

 

 

 

 

 

 

 

 

 

 

 

 

 

 

 

 

 

 

 

 

 

 

 

 

 

 

 

 

 

 

 

 

 

 

 

 

 

 

바위 사원 [ Dome of the Rock ]

요약
이스라엘 예루살렘 구(舊)시가지에 있는 모스크이다.
 

이슬람 대사원으로, 구시가지(Old City)에서 가장 높은 성전산(Temple Mount)에 위치한다. '오마르 모스크(Mosque of Omar)'라 부르기도 하며, 지붕이 황금으로 되어 있어 '황금 사원' 이라고도 한다. 건물은 8면체로 되어 있는데, 윗 부분은 면마다 다른 타일을 붙였고, 아라비아 문자로 코란이 새겨져 있다. 돔 내부 한가운데 목책으로 둘러싼 바위가 바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눕혔던 장소로서, 고대 신전의 제단이다.

북쪽 문 정면의 바닥에 천국의 타일이라는 녹색의 바위가 있다. 마호메트가 이 바위에 19개의 금못을 박았는데, 이것이 다 없어지면 지구는 다시 원초의 혼돈상태인 카오스로 돌아간다고 한다. 현재 못 3개가 남아 있다. 내부의 홀을 받치는 대리석 기둥은 높이나 두께, 색깔 등이 가지각색이어서 건물의 복잡한 역사를 말해준다. 바위 밑 동굴은 예배소이다. 안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하고 복장은 단정해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위 사원 [Dome of the Rock] (두산백과)

 

 

 

 

 

 

 

 

 

 

 

 

 

 

 

 

 

 

 

 

 

 

 

 

 

 

 

 

 

 

 

 

 

겟세마네 동산

겟세마네(Gethsemane)라는 것은 헤브라이어로 <올리브유골 골짜기>를 의미하며, 그 이름대로 예루살렘 동쪽의 기드론 계곡을 가로 막은 올리브산에 있는 동산. 『마태복음』 26장 36절에 이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예수가 유대 교도들에게 잡히는 전날 밤 <땅에 엎드려서> 기도했다는 곳. 『요한복음』 18장 1~2절에 의하면 예수와 제자들은 가끔 이 동산에 모였다. 현재 부근에는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아르메니아교회의 교회당이 세워져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 관련된 미술주제에는 ①갯세마네의 기도와 그에 이은 ②그리스도의 포박(유대의 접물)이 있다. ①은 올리브산을 시사하는 바위산 앞에서 그리스도가 무릎을 꿇고(또는 지면에 엎드려서) 기도하고, 하늘에 나타나는 신(상방신 또는 오른손으로 시사된다)이나 성배를 가진 천사(십자가수난구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에 의해서 힘이 주어진다. 그리스도 아래의 동산에는 베드로, 야곱, 요한(때로 12사도)이 일군이 되어서 가끔 잠들며, 그들을 일으키는 그리스도와 기도하는 그리스도가 동일 구도로 두 번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②는 유대가 그리스도에게 배반의 접물을 하는 순간에 의해서 표현되는 경우가 많으며, 두 명의 주위를 병사나 사도가 둘러싼다. 베드로가 마르코스의 귀를 잘라서 그리스도가 그것을 치유하는 삽화, 옷을 벗어던지고 도망하는 젊은 사도의 삽화(모두 복음서에 이야기되고 있다) 등이 도입되는 경우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겟세마네 동산 (종교학대사전, 1998.8.20, 한국사전연구사)

 

 

 

만국교회 [ church of all nations ]

요약
겟세마네 동산에 예수가 체포되기 전 고뇌와 기도의 밤을 보낸 곳으로 알려진 장소를 기념하여 세워진 교회. 16개국이 교회 건립 성금을 내었다 해서 만국교회로 불리운다.

만국 교회

예루살렘 올리브산 기슭에 위치한 만국교회는 겟세마네 교회로도 불린다. 겟세마네는 히브리어로 ‘올리브 정권’을 의미한다. 이 곳에서 예수가 로마군에 체포되기 전 최후의 밤을 고되속에서 기도하며 보냈다고 전해지며, 기도 자리로 추정되는 바위를 중심으로 비잔틴 시대에 A.D. 379년 교회가 최초로 세워졌다(요한복음 18:1, 마가복음 14:32-42, 26:36).

614년 페르시아에 의해 교회 일부가 훼손되었으며, 746년에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12세기에 십자군들이 재건했으나 다시 파괴되었다. 1345년에 파괴되었다. 그 후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1919년에 16개 국가의 성금과 건축자재 및 이탈리아 건축가 안토니오 바를루치(Antonio Barluzzi, 1884-1960)의 설계로 교회 재건이 시작되었다. 기초공사를 하던 도중 중세 십자군 시대의 지하 예배실, 석조지반,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등이 발굴되었다. 그 뒤로 새로 지은 건물 기초를 걷어내고 중세의 것을 복원했으며, 고대 교회의 흔적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교회 건축은 1922년 4월부터 다시 시작되어 1924년 6월에 완공되었다. 16개 국가(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멕시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영국, 벨기에, 캐나다, 독일, 미국, 아일랜드, 헝가리, 폴란드, 오스트레일리아)가 성금을 모아 지었기 때문에 만국교회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로마 카톨릭의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12개의 돔 모양의 지붕을 중심으로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 중앙에는 예수가 기도했다고 전해지는 바위의 일부가 철제 가시관으로 둘러싸여 보존되고 있다. 벽에는 이탈리아의 화가 줄리오 바르젤리니(Giulio Bargellini, 1875-1936)가 고안한 예수의 고통과 세상의 고통을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의 정교한 모자이크가 있다. 교회 천정은 아름다운 보라색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어두운 빛으로 내부를 비추고 있으며, 교회 재건을 위해 기부한 16개 국가의 표지가 새겨져 있다. 교회 내부는 예루살렘 북서부의 리프타(Lifta)의 석재로, 외부는 베들레헴의 붉은 빛의 석재를 사용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만국교회 [church of all nations] (두산백과)

 

 

 

 

 

 

전쟁의 흔적

 

 

 

 

 

 

 

 

 

 

성모승천 성당

 

 

성모 승천 성당 [ Church of the Assumption ]

  • 대륙

    아시아

  • 위치

    예루살렘

  • 저자

    레이첼 라우즈

성모 마리아의 무덤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가 모두 경배하는 성모 승천 교회('성모 마리아의 무덤'이라고도 알려져 있다)는 예루살렘 키드론 골짜기에 있는 올리브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의 역사는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 자리에는 여러 채의 교회가 지어졌다가 파괴되곤 했는데, 최초의 교회는 5세기 초반에 지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의 바위를 깎아내어 그 속에 세운 작은 사각형 예배당이 성모 마리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표시해 준다. 같은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다른 무덤들로는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 십자군 여왕인 멜리센데(1161년 사망), 그리고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무덤이 있다.

교회 안에는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특징들이 함께 모여 있다. 건축 양식은 비잔틴과 십자군 정복 시대의 것이며, 제단들은 그리스, 아르메니아, 에티오피아에서 왔다. 교회의 파사드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군 건축 양식을 보여 주는 가장 오래된 본보기 중 하나이며, 11세기에 건축되었다.

40개의 계단을 내려가면 비잔틴 교회의 흔적이 나온다. 메카 방향을 향하고 있는 '미라브'(기도용 벽감)는 이 장소가 지닌 이슬람교적인 중요성을 나타낸다. 이슬람교도들은 무함마드가 메디나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밤길에 성모 마리아의 무덤에서 빛을 보았다고 믿는다. 매년 8월 15일이면–이 날짜는 로마 가톨릭에서 '축복받은 성모 마리아의 승천 축일'로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그리스인들과 아르마니아인들은 교회 안에서 축제를 열어 성모 승천을 축하한다.

이곳에 정말로 마리아의 유해가 묻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이곳을 찾는 수천 명의 방문자들은 이곳이 정말로 예수 어머니의 무덤이었다고 믿으며, 이 교회는 천국으로 승천한 마리아를 기념하는 성당이자 기념관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모 승천 교회 [Church of the Assumption]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1.20,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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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우리는 들어 섰고

아라파트와 현수반의 사진이 로비에 당당히 걸려 있는 호텔

주변의 묘한 느낌에 거리에 나서기도 저마 스러웠다.

 

출국 심사시 우리 일행은 여기서 잤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교육을 가이드로 부터 받았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Palestinian Authority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팔레스타인의 합법적 정부.

1948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되고, 제1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하자 팔레스타인인 90만명은 유랑민으로 전락하였다.

이에 1964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결성되었고, 1969년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가 PLO의장으로 선출되면서 항공기 납치, 뮌헨올림픽 대학살, 자살특공대 차량폭탄테러 등 서방국가에 대한 무차별 테러를 자행해 악명을 떨치며 팔레스타인 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끌어냈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아라파트는 PLO가 국제테러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 국제사회가 PLO를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1974년 10월 아랍정상회담에서 PLO를 400만 팔레스타인인의 유일한 합법기구로 인정하였고, 12월 국제연합(UN)도 PLO를 UN의 정식 옵서버로 인정하였다.

이후 1993년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은 상호 실체를 인정하고 테러 중단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 가자지구와 예리코에서 이스라엘군 철수, 5년내 추가 철수 등을 규정한 협정(오슬로평화협정)에 서명했다.

그리고 1994년 아라파트 의장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수립을 공식 선언했으며, 1996년 선거를 통해 자치행정부 대표와 자치평의회 의원 88명이 선출되어 자치정부가 본격 출범했다.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는 자치지역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등 6,170㎢에 달하며, 인구는 약 323만명이다. 임시 행정수도는 요르단강 서안 자치지역의 '라말라(Ramallah)'이다.

정부형태는 대통령(행정수반) 중심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대표였던 야세르 아라파트(Ysir Araft)로 1996년 선거를 통해 초대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되었으며, 2004년 아라파트의 사망 이후 마흐무드 압바스가 2대 수반에 올랐다.

자치정부에는 외교와 대외적인 치안권(국방권)을 제외한 입법과 행정권한이 부여되어있으며, 팔레스타인의 대외관계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본부의 정치국이 맡는다.

당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자치정부 수립 협정시 1994년부터 5년 동안의 자치기간을 거쳐 1999년 5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선포하기로 했으나, 최종 평화협상 과정에서 서로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 현재까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수립은 실현되지 않고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팔레스타인해방기구

[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 ─解放機構 ]

요약
전세계적으로 445만 명으로 추산되는 팔레스타인인을 대표하는 정치조직이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기.

  • 구분

    정치조직

  • 설립일

    1964년

  • 설립목적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건설

  • 규모

    445만 명

  • 소리듣기

    팔레스타인해방기구

팔레스타인인은 1948년 이스라엘이 수립되기 이전에 총독령 팔레스타인지역에 살고 있던 아랍인과 그들의 후손들이다. PLO는 이전에 비밀저항운동을 전개하던 다양한 팔레스타인조직의 지도부를 통일, 1964년 결성되었으나 그것이 외부로 부각된 것은 67년 6월에 발발한 중동전쟁 직후였다. PLO는 민주적이고, 세속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PLO헌장은 이스라엘의 제거를 요구하고 있다.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과 계속된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아랍국가들은 선도적으로 투쟁을 이끌었으나 팔레스타인계 아랍인은 다소 소극적이었다. 1967년 6일전쟁에서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에 패배한 후 PLO는 팔레스타인인의 대변자 겸 팔레스타인 이데올로기의 주창자로서 재조직되었다. PLO 내에서 활동하거나 관련을 맺고 있는 단체로는 파타(Fatah),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 팔레스타인 해방인민민주전선(PDFLP)이 있다.

또한 PLO와 연관된 테러조직으로는 파타의 검은구월단(Black September)과 PFLP의 총사령부가 있다. 1969년에 팔레스타인 조직 가운데 가장 큰 집단인 파타의 지도자 야시르 아라파트가 PLO의장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대 후반 PLO는 요르단에 본거지를 두고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조직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1970년 요르단 정부와 PLO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1971년에 PLO는 요르단 군대에 의해 강제적으로 요르단에서 추방되어 레바논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1974년부터 아라파트는 PLO가 이스라엘과 관련없는 국제 테러리즘에는 더 이상 개입하지 말아야 할 것과 국제사회가 PLO를 팔레스타인 국민의 정당한 대표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74년 아라파트의 요청은 아랍국가들의 지도자들에 의해 수용되었고, 1976년 PLO는 아랍연맹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1988년 11월 PLO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립을 천명했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한 점이다. PLO는 이스라엘을 제거한다는 목표를 포기하고 대신에 독립적인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고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는 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993년 9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에 평화협정이 맺어져 PLO의장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의장으로 취임했다.

1996년 1월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위한 총선거에서 아라파트 의장이 88%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자치정부 초대 행정수반이 되었다. 그러나 2000년 미국의 대통령으로 조지 워커 부시가 당선되면서 PLO와 아라파트는 정치적으로 더 고립되었다.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2004년 11월에 사망했다. 현재는 아라파트의 뒤를 이어 온건파로 분류되는 압바스가 PLO를 이끌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解放機構] (두산백과)

 

 

 

 

 

 

 

아침에 주변의 주택가를 산책했다.

그곳의 꽃들의 그 어는 곳보다도 잘 관리 되고 있었고 아름다웠다.

 

 

 

 

 

 

 

 

 

 

 

 

 

 

 

 

 

 

 

 

 

 

 

 

 

 

 

 

 

 

 

 

 

 

 

 

 

 

 

 

 

 

야세르 아라파트

요약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의장. 1988년 11월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PNC)를 통해 팔레스타인 독립국을 선포하고 대(對)서방외교를 강화해 독립을 승인 받았다. 또 이스라엘 총리 Y.라빈과 팔레스타인 자치원칙선언을 주 내용으로 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팔레스타인 첫 총선이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 원어명

    Yāsir ‛Arafāt

  • 출생-사망

    1929.8.4 ~ 2004.11.11

  • 활동분야

    민족운동

  • 출생지

    이집트 카이로

  • 주요수상

    노벨평화상(1994)

이집트 카이로에서 출생했다. 카이로대학교를 졸업하고, 토목기사가 되었다. 그후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학생연합’에 가입, 1952~1956년 회장을 역임하고, 쿠웨이트로 건너가 알파타(팔레스타인민족해방운동)를 결성하였다.

1969년 PLO 의장이 되었으며, 1971년 ‘팔레스타인혁명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974년 라바트의 아랍정상회의에서는 PLO가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대표’로 인정받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해 11월 국제연합 정기총회에서는 처음으로 비정부조직인 PLO의 대표로 연설하였다.

그러나 1982년 이후에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PLO 내의 시리아파 반란군의 공격 등으로 팔레스타인의 민족주의 지도자로서의 입지가 한때 약화되었다. 그후 PLO 지도부 내의 갈등이 해소되면서 지도력을 회복하여 1988년 11월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PNC)를 통하여 가자지구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영토로 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대(對)서방외교를 강화하여 서방국가 60여 개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다. 또한 1993년 9월에는 이스라엘 총리 Y.라빈과 팔레스타인 자치원칙선언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1994년 라빈과 이스라엘 외무장관 S.페레스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하였다. 팔레스타인 첫 총선이 실시된 1996년 1월 20일 대통령 선거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2004년 11월 11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야세르 아라파트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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