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

베스트 샷 2013. 11. 20.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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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레아 국립공원  [ Caesarea National park ]

요약
이스라엘 지중해안에 위치한 카이사레아 국립공원은 고대부터 항구도시로 발전해왔으며, 성경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 역사깊은 장소로, 오늘날까지도 고고학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카이사레아 국립공원은 이스라엘 지중해안의 샤론평야 북부지대의 크로코다일 강과 하데라강 사이에 위치해 있다. 카이사레아 지역은 침식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항만을 따라 있는 곳으로 고대부터 인류가 자연히 항구로 사용되어왔으며, 성경에도 여러 차례 언급되어있다(사도행전 8장-27장).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최초로 이 곳을 항구로 사용했으며, 스트라톤 망대(Straton Tower)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헬레니즘 시대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B.C.90년에 알렉산더 야누스(Alexander Jannaeus)에 의해 정복되어 하스모니아 왕국의 영토로 병합되었다. B.D.63로마가 이 지역을 점령한 뒤 B.C.40년경에 실질적인 통치권을 헤롯에게 위임했다. 헤롯은 이 곳을 항구도시로 발전시켰으며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서 ‘카이사레아’라고 명명했다. 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A.D.37-100)의 ‘유대전쟁사’에는 헤롯이 흰 석재로만 도시를 재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유대전쟁사 I:21:5). 카이사레아는 신전, 원형극장, 시장, 주택지들이 계획적으로 건설된 설계도시였으며, 도시 가 완공되는데 12년이 걸렸다고 한다. B.C.10세기 이후 도시는 크게 발전하여 상업중심지로 성장했으며, 기원후부터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는 로마 총독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3-4세기에 이르러서 카이사레아는 유대인, 기독교인, 사마리아인 등이 공존하는 국제적 상업도시가 되었으며, 비잔틴 시대까지 계속 번영을 누렸다. 6세기 말엽에는 도시를 둘러싸고 성벽이 건설되었는데, 당시 주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640년에 아랍의 정복에 의해 카이사레아는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을 상실하고,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며 쇠락한다.

9세기에 이르러 해상무역이 다시 활발해지면서 카이사레아의 항구도시로서의 역할이 재개되었다. 그 후 1101년 5월 17일에 십자군들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가니에(Garnier) 기사단이 카이사레아를 통치했으며, 1251년에는 프랑스의 루이 4세 황제에 의해 성벽이 증축되었다. 1265년에 맘룩조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당시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19세기까지 방치되어있던 카이사리아에 오스만터키 제국은 보스니아 출신 무슬림 난민들을 정착하게 했다. 그 결과 십자군 시대의 성채 일부가 보수되고, 새로운 집과 건물들이 들어서며 새로운 행정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40년에 카이사리아 바로 남쪽에 기브츠 '스도트 얌(Sedot Yam)'이 형성되었으며, 주변으로 새로운 주택지들이 조성되고 있다.

1873년 최초로 과학적인 고고학 발굴이 실시되었으며, 그 결과 십자군 성채, 원형극장, 경기장, 수로, 성벽, 주거지 등의 유적과 수많은 석상 및 비문들이 발굴되었다. 1947년 이래로 아주 부분적으로 발굴되다가 1959년부터 1964년까지 이탈리아 조사단에 의해서 대대적인 발굴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원형극장과 도시 성벽이 완전히 발굴되어 일부 복원되었으며, 발굴작업이 끝난 뒤 주요 유적지를 중심으로 카이사레아 지역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 이후로도 미국과 이스라엘 조사단을 중심으로 항구 주변과 도시 주변에 대한 발굴이 계속되어 왔으며, 1992년 이후로는 하이파 대학(Haifa University)과 이스라엘의 ‘골동품 관리국(the Antiquities Authority)’을 중심으로 확대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이사레아 국립공원 [Caesarea National park]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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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강 세례터 "야르데니트"

 

 

 

 

 

모자이크 성서 지도 [ Mosaic Holy Place Map ]

요약
요르단 마다바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모자이크 성서 지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중근동 지방의 성지를 표현하고 있는데 현재는 원래의 3분의 1만 남아있다. 지도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사해, 요단강, 예수님 세례터, 시내산, 여리고 등 성경의 주요 지역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마다바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남쪽으로 30여km 떨어지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 마다바의 성조지교회(St.George Church)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모자이크 성서지도가 있다. 이 지도는 AD 400년대 말에서 500년대 초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의 규모는 16m x 6m였을 것으로 보는데 현재는 3분의 1정도만 남아있다. 모자이크는 로마 제국에서 유행하던 장식의 한 형태였는데 이것이 로마 제국의 전역으로 전파되었으며 다양한 색상의 돌들을 0.5cm~1cm의 크기로 잘라서 건물 바닥이나 벽면을 장식하였다. 성서지도의 원래 크기는 약 200만개 이상의 돌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는 성경이 귀하고 글을 아는 사람들이 적었을 당시에 신도들에게 시각적으로 주요 성지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지 훌륭한 성경공부 교재라고 할 수 있다.

지도는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겨지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동으로는 요르단의 케락, 서로는 레바논지중해, 남으로는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와 시나이반도, 북으로는 요르단강과 얍복강을 포함하여 그 안에 있는 성지를 다양한 색상의 돌을 이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현재 지도에는, 예루살렘은 전체가 그대로 완벽하게 남아 있고, 예수님 세례터, 여리고, 길갈, 케락, 베들레헴, 시내산, 나일강 삼각주, 세렛강, 사해, 요르단강, 아르논강, 롯 동굴 등을 들 수 있다.

이 지도를 통하여 그 당시의 자연 환경도 알 수 있다. 요르단강에는 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2군데 표현되어 있는데 모두 노가 없이 줄을 당겨 건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도 요르단강이 그리 큰 강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요르단강이 사해로 들어 가는 부분에 물고기가 거꾸로 올라 가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사해가 일반 바닷물보다 8~9배 짜기 때문에 물고기가 살수 없는 곳임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 세례터 주변에는 사슴이 뒤쫓아 오는 사자를 뒤돌아 보며 도망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근처에는 지금도 멧돼지, 여우, 하이에나 등의 맹수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사슴 주변에는 검은 색의 나무를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르단강을 건너기 전에 마지막으로 진을 친 곳이며 그 범위가 씻딤계곡까지 미쳤다고 되어 있는데(민 33:47-49) 씻딤은 사막아카시아 나무를 의미하며 그림 속의 검은 나무가 씻딤 나무이다. 그리고 이 곳은 모세가 3번에 걸쳐 고별설교를 한 곳이다. 또한 이 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저질러 여호와의 저주로 염병에 걸려 24,000 명이 죽은 곳이기도 한다(민25:1-9).

예루살렘은 지도의 중심임을 감안하여 실제보다 훨씬 크고 자세하게 과장되어 있다. 북쪽의 다메섹문, 동쪽의 황금문, 남쪽의 분묘문 등이 그려져 있고 예수님 무덤교회 등 주요 교회도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 중앙과 윗쪽의 흰선은 로마시대의 중앙 열주대로인데 고고학자들이 이 지도상의 위치를 참고하여 실제로 대로의 일부를 발굴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지도 제작 기준으로 평가하면 많은 오류가 있지만 1500년전에 만들어 졌다는 것과 정확한 위치 전달보다는 신자들에게 제한된 화면 안에 주요 성지를 보여 주기 위한 성경교육 교재였음을 감안하면 오류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자이크 성서 지도 [Mosaic Holy Place Map] (두산백과)

 

 

 

 

 

 

 

 

 

 

 

 

 

 

 

 

 

 

 

 

 

 

 

 

 

 

 

 

 

 

 

 

 

 

 

 

 

 

 

수박

 

 

 

 

 

 

 

 

 

 

 

 

 

 

 

 

 

 

 

 

 

마리아의 우물

 

마리아의 샘 [ Mary'Spring ]

요약
이스라엘 북부 나사렛에서 티베리아스(Tiberias)로 가는 길가에 있는 샘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이 샘에서 물을 길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건축물은 1862년에 조성되었는데, 돌로 만든 벽에 꼭지가 달려 있다. 샘물은 50m 정도 떨어진 성가브리엘교회의 지하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두산 백과]

 

 

 

 

 

 

 

 

 

 

 

 

 

 

수태 고지 성당

 

수태고지교회 [ Church of the Annunciation ]

요약
이스라엘 나사렛(Nazareth)에 있는 대성당이다.
 

중근동에서 가장 큰 삼각지붕의 대성당으로 프란체스코가톨릭수도회 소속이다. 교회 지하에는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았던 동굴(Grotto of the Annunciation)이 보존되어 있다. 이 동굴 위에 비잔틴시대와 십자군시대, 18세기에도 계속 교회를 세웠는데, 오늘날의 건물은 5번째 교회로 이탈리아 건축가 조반니 무치오(Giovanni Muzio)가 설계하여 1969년 완공한 것이다.

교회 지붕은 백합 모양으로 설계하였는데,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성모 마리아의 상징이 백합이었다고 한다. 교회 정면 윗부분에는 마리아가브리엘천사의 모습, 중간 부분에는 4복음서의 상징, 출입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부조로 묘사해 놓았다. 성당 2층에는 한국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내온 성화가 전시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태고지교회 [Church of the Annunciation] (두산백과)

 

 

 

 

 

 

 

 

 

 

 

 

 

 

 

 

 

 

 

예수 잉태 동굴

 

 

 

 

 

 

 

 

 

 

 

 

 

 

 

 

 

 

 

 

 

 

 

 

 

 

 

 

 

 

 

 

 

 

 

 

 

 

 

 

 

 

 

 

 

 

 

 

 

 

 

수태 고지 교회 [ Church of the Annunciation ]

  • 대륙

    아시아

  • 위치

    이스라엘>나사렛

  • 저자

    레이첼 라우즈

성모 마리아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

로마 가톨릭 전승에 따르면, 수태 고지 교회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찾아와 신의 아들을 낳게 될 거라고 말했던 장소라고 한다. 이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이 장소에 건설되었던 여러 채의 교회는 파괴되었다. 세 번째 교회는 12세기 초에 갈릴리 공 탄크레드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1263년까지 서 있다가 이집트 술탄인 바이바르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이 1730년 이 부지에 새로운 교회를 지었는데, 이는 1955년 오늘날의 교회를 짓기 위해 철거되었으며 교회는 1969년 축성되었다.

최근의 '수태 고지 교회' 건물은 이탈리아 건축가 조반니 무치오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그는 이 지역에 깃든 역사적인 요소들을 유지하면서 로마 교회가 지닌 다양한 성격을 나타내기를 바랐다. 교회의 옆벽은 두 층으로 나뉘어 있는데, 남아 있는 오래된 교회 벽 위에 새로이 쌓았기 때문이다. 중앙 출입구는 바이바르스가 파괴하지 못했던 유일한 부분인 '수태 고지의 돌집'으로 이어지는데, 바로 성모 마리아가 수태 고지를 받았다고 하는 장소이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성경에 나오는 장면들을 나타낸 오래된 모자이크로 장식된 이 교회는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남긴 매우 다양한 작품들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1955년 행해진 발굴 작업은 연결망을 이룬 동굴들과 기름 짜는 기계, 주거지, 물탱크, 곡식 창고 등을 발굴해 냈는데, 이러한 유물 중 일부는 교회에서 볼 수 있다. 수태 고지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법에 따라 소(小)바실리카라는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정교의 전승에서는 마리아가 나사렛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을 때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왔다고 하여, 수태 고지 교회 대신 성 가브리엘의 교회에서 마리아의 잉태를 기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태 고지 교회 [Church of the Annunciation]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1.20,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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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고기를 잡았다는 갈릴리 호수

 

 

 

 

 

 

 

 

 

 

 

 

말로만 듣던 집단 농장

세월에 순응하여 펜션 사업등으로 확대 했지만

아직도 기본 이념을 유지하고 있는 그들이 신기(?) 했다.

 

 

키부츠 [ kibbutz ]

요약
이스라엘 집단농장의 한 형태.
농업뿐만 아니라 식품가공 ·기계부품제조 등의 경공업을 포함하는 경우도 많다. 기존 경지(耕地)의 집단화가 아니라 계획적인 입식사업(入植事業)인 점, 철저한 자치조직에 기초를 둔 생활공동체이기도 한 점이 특색이다. 1909년 어려운 시오니즘운동 중에서 최초의 키부츠가 탄생, 근래에는 약 230을 헤아리며 그 구성원은 8만 명이 넘고, 전농업인구의 약 17%를 차지한다. 키부츠의 구성원은 60∼2,000명으로 일정하지 않다.

키부츠 구성원은 사유재산을 가지지 않고 토지는 국유(國有), 생산 및 생활재(生活財)는 공동소유로, 구성원의 전수입은 키부츠에 귀속된다. 키부츠의 재정에 의해서 부부단위로 주거(住居)가 할당되는데, 식사는 공동식당에서 조리·제공되며, 의류는 계획적인 공동구입과 평등한 배포 등의 관리로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18세까지 부모와 별개의 집단생활을 하며, 자치적으로 결정된 방침에 따라서 집단교육된다. 아랍과의 긴장관계하에서 민병적(民兵的)인 군사적 의의를 가지는 것도 주목된다. 또한 키부츠 이외에 생산만을 공동으로 하는 모샤브 셰트피, 판매·구매를 공동으로 하는 모샤브 오브딤 등의 집단형태도 있으며, 집단간의 상호이행(相互移行), 가입·탈퇴는 자유롭다.

[네이버 지식백과] 키부츠 [kibbutz] (두산백과)

 

 

 

 

 

 

 

 

 

 

 

갈릴리호 [ Sea of Galilee ]

요약
이스라엘 북동부에 있는 호수.
모양이 하프와 비슷하기 때문에 구약성서에서는 ‘키네렛 바다’라고도 하고, 신약성서에서는 ‘게네사렛 호수’ 또는 ‘티베리아 바다’라고도 한다. 호면은 -212m. 주위 52km. 깊이 약 50m. 대지구대 안에 있기 때문에 호면이 해면보다 낮다. 성서와 관계가 깊은 호수이며, 호반(湖畔)에는 예수가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한 가버나움과 예수의 제자인 시몬,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이 태어난 막달라가 있다. 요르단강은 호수의 북쪽에서 흘러들어 남쪽으로 나와 사해(死海)를 향하여 흐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갈릴리호 [Sea of Galilee]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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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 가는 길 주변의 대추 야자 농장

 

 

 

 

 

 

 

 

 

맛사다

 

 

마사다 유적[ Masada , ─遺蹟 ]

요약
이스라엘의 사해(死海) 해안에 있는 배 모양의 구릉(丘陵)을 이용한 자연 요새지로 이스라엘 왕국의 파멸, 이스라엘 민족과 로마군과의 전쟁과 관련된 상징물이다. 곳곳에 공격 램프와 같은 로마 포위 흔적이 남아 있다.
 
  • 지정일

    2001년

  • 분류

    문화

  • 테마분류

    도시역사지구

  • 소재지

    Tamar Region

  • 좌표

    N31 18 48.6 E35 21 09.9

장엄하고 아름다운 최후의 항전지

메마른 황야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바위 산 위에서 사해(死海)를 내려다보고 있는 마사다 유적지는 장엄하고 아름답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인데 꼭대기는 평평한 메사(mesa) 지형 위에 자리잡아 ‘천혜(天惠)의 요새’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하지만 난공불락일 것 같은 천연 요새도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 군대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곳은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 유대 저항군들이 마지막까지 로마군에 항전했던 곳이다.

풍부한 물과 곡식을 갖춘 이들은 2년이 넘게 로마군의 포위공격을 견뎌냈으나,

공격용 경사로를 타고 진격해오는 로마군에 의해 요새가 함락되기 직전 집단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유대전쟁사>에 따르면

당시 자결한 유대인의 수는 967명이다. 이는 다윗이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한 뒤로 1000년 동안 이어진 이스라엘 왕국이 사라지고,

이후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세계를 떠돌게 되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을 비감하게 장식한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의 자존심이자 긍지가 되다

이런 이유로 구체적인 장소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오래 전부터 마사다 항전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이자 긍지요,

저항정신의 상징이 되었고, 20세기 중반 현장이 발굴된 뒤에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해발고도 434m인 마사다 유적지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배(船) 모양을 하고 있으며,

평균 너비 120m, 길이 620m, 둘레 1,300m이다. 기원전 2세기경 하스몬가(家)의 지배자가 이곳에 최초로 요새를 만들었고,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 기원전 35년에 개축하였다.

20세 중반에야 발굴된 마사다 유적지(아랍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곳을 ‘저주받은 땅’이라고 불렀다)에는

주로 헤롯 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각종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로마 초기 양식으로 호화롭게 지어진 왕궁(2채)은 물론 행정청사, 목욕탕, 곡물창고, 성곽과 망루 등이 놀라울 정도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75만ℓ나 되는 물을 저장하는 물 탱크에 연결된 수로(水路)와 귀중한 파피루스 문서의 단편(斷片)도 발굴되었다.

더구나 로마군이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술을 동원해 만든 공격용 경사로가 그대로 남아 있어

기록에서만 보던 로마 포위 공격의 전형적인 형태를 짐작하게 해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사다 유적 [Masada, ─遺蹟] (두산백과)

 

 

 

 

 

 

 

 

 

 

 

 

 

 

 

 

 

 

 

 

 

 

 

 

 

 

마사다 [ Masada ]

  • 대륙

    아시아

  • 위치

    이스라엘>마사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2001년

  • 저자

    엘리자베스 팜버그

유태인 역사 속에서 가장 극적인 에피소드 중 하나를 상징하는 곳

사해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고원에 위치하고 있는 마사다는 기원전 37년 유대의 헤롯 대왕이 지은 요새화된 궁전이다.

헤롯이 죽은 이후 로마 주둔군이 마사다를 차지했으나,

이곳은 로마 통치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66년에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온 유태인 열심당원('시카리')의 피난처가 되었다.

73년, 유태인 반란 최후의 보루인 마사다를 점령하기 위해 로마 제10군단이 파견되었으며,

그 결과 900명 이상의 열심당원들이 죽었다. 이들은 항복을 앞두고 집단 자살을 택했던 것이다.

사해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마사다는 고원의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고원의 길이는 304m, 가장 넓은 곳의 너비가 608m로, 해발 고도 396m의 높이로 솟아 있다.

절벽 위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이 궁전은 사해와 유대 사막이 보이는 훌륭한 경치를 지니고 있다.

헤롯 대왕이 산꼭대기 서쪽 면에 자신의 궁전을 짓기 시작했을 때, 이곳에는 이미 기원전 100년에 지어진 건물이 있었다.

마사다는 호화로운 저택으로, 암반 북쪽 끝에는 높이가 낮아지는 세 개의 테라스가 있었고,

로마 양식의 목욕탕, 창고, 주택, 방어탑이 있는 성벽, 그리고 시나고그(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가 있었다.

헤롯의 가장 뛰어난 건축 계획은 요새에서 필요한 물을 댈 수 있도록 지은 진보적인 물 공급 체계였다.

각각의 용적이 4,000㎡인 열두 개의 저수지가 바위 속에 파여 있다.

오늘날 마사다는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이다.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에서 1960년대 초에 이 지역에서 발굴 작업을 행했다.

마사다 궁전은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성소이며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사다 [Masada]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1.20, 마로니에북스)

 

 

 

 

 

 

 

 

 

 

 

 

 

 

 

 

 

 

 

 

 

식량으로 사용 한 비둘기 집

 

 

 

 

 

 

 

 

 

 

 

 

 

 

 

 

로마군이 마사다를 함락하려 쌓아 올렸던 흙 언덕

 

 

 

 

 

 

 

 

 

 

 

 

 

 

 

 

 

내려오면서 나의 느낌은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 이런 사람이다. 건들 지 마라."는 소리가 귀에서 맹맹 거렸고

그 협박을 들으러 돈을 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우리 민족이 이스라엘 사람 정도의 정신력으로 무장하면

그들과 맛짱 떠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어 동행인에게 얘기 했더니

"전라도 사람들 처럼 화끈 하면 된다." 하신다.

얼핏 듣기는 거북 했지만 말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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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국경 알렌비 통과

요란한 검문 검색에 입국 조차가 쉽지 않았다.

 

 

 

 

 

사해 수영 체험장

 

 

사해 [ Dead Sea , 死海 ]

요약
이스라엘과 요르단에 걸쳐 있는 염호(鹽湖)이다. 요르단 강이 흘러드나,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없고 유입량과 같은 량의 증발이 일어난다. 염분은 표면에서 해수의 5배인 200‰정도로 생물이 살지 못하여 사해라는 이름이 붙었다.
 

표면 면적 810㎢. 최대깊이 378m, 평균깊이 118m. 대함몰지구대에 있기 때문에, 호면은 해면보다 395m 낮아 지표상의 최저점을 기록한다. 이스라엘요르단에 걸쳐 있으며 북으로부터 요르단강이 흘러들지만, 호수의 유출구는 없다. 이 지방은 건조기후이기 때문에 유입수량과 거의 동량의 수분이 증발하여 염분농도가 극히 높아 표면수에서 200‰(해수의 약 5배), 저층수에서는 300‰이다. 따라서 하구 근처 외에는 생물이 거의 살지 않으며, 사해라는 이름도 이에 연유한다.

예로부터 높은 염분 때문에 사람 몸이 뜨기 쉬운 것으로 유명하다. 또 이 해수에는 유용광물이 함유되어 있으며, 특히 브롬의 함유량이 많아 보통 해수의 100배나 된다. 그 보급원은 갈릴리호(湖)의 바닥에 있는 지하온천일 것으로 생각되며, 이것이 요르단강에 의해 사해로 운반된다고 한다. 또 브롬의 기원을 고대의 달팽이 퇴적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사해 주변은 고대문명, 특히 초대 그리스도교가 발생·발전한 곳으로 유명하며 구약성서에서도 사해가 ‘소금의 바다(Yam ha-Melah)’ 등의 이름으로 종종 나온다. 서안(西岸)에는 1947년 이후 ‘사해사본(死海寫本)’이 발견된 쿰란 동굴과 로마군이 멸망시킨 유대인의 마사다 성채 유적 등이 있다. 칼리야와 남단의 소돔 등지에서는 호숫물의 염분에서 염화칼륨·브롬 등을 생산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해 [Dead Sea, 死海] (두산백과)

 

 

 

 

 

사해

(Dead Sea)

서(西)아시아 요르단과 이스라엘 국경에 있는 염호(鹽湖). 면적 1,020, 동서 15km, 남북 80km로 호수의 모양은 길쭉하다.

지중해 연안에서 약 100km 내륙의 요르단 지구대 남부에 위치한다.

아프리카 대지구대(大地溝帶)의 일부를 구성하기 때문에 호면은 해면하 396m로 지구상의 최저지점을 이루며, 최대수심은 399m, 평균수심은 146m이다.

요르단강이 흘러들지만 호수의 유출구는 없고, 건조기후하에 있기 때문에 유입수량(流入水量)과 거의 같은 양의 수분이 증발한다.

그 때문에 염분함유율이 높아 표면수에서 20%(해수의 약 5배), 저층수에서는 30%이다.

따라서 생물이 생존하지 못하며, 사해라는 이름도 이에 연유한다.

또한 염분농도가 높기 때문에 인체가 가라앉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호수의 염분에는 여러 유용광물이 내포되어 이스라엘에서는 그 채취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북단의 카리아, 남단의 소돔 등에 채취공장이 있으며, 칼륨·취소(臭素)·소금 등이 산출되고 있다.

주변지역에서는 천연 가스의 개발도 진척되고 있다.

사해의 연안지대는 고대문명이 발전한 곳으로〈구약성서〉에도 사해는「소금의 바다」「아라바의 바다」등의 이름으로 등장하며, 신께서 고모라에 유황불로 심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서안에는「사해문서(死海文書)」가 발견된 쿰란 동굴과 로마군에 멸망된 유태인의 마사다 성체 유적 등이 있다.

 

 

 

 

 

사해 [ 死海 ]

 

 

사해 문서사해 문서 원본의 일부이다. 사해 문서는 고대 언어인 히브리어와 아람어 등으로 쓰여 있다.

어차피 죽은 바다인데 또 죽는다고? 사해에 유입되는 수량이 갈수록 줄어들어 1년에 평균 80센티미터 가량씩 수면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비율로 낮아진다면 얼마 안 가 사해는 바다는커녕 소금밭으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가 팽배하고 있다.

사해(死海)라! 죽어 있는 바다란 말인가, 아니면 죽이는 바다란 말인가? 둘 다 맞다. 그러니까 명실상부하게 사해요, 영어로도 데드 시(Dead Sea, 죽은 바다)인 셈이다. 이런 무서운 명칭이 붙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에 위치한 사해는 엄밀히 말하면 바다가 아니라 호수다. 그러나 예로부터 사해라는 명칭을 써 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사해는 수면이 해수면에 비해 약 400미터 정도 낮다. 수면의 높이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지만 여하튼 해수면에 비해 너무 낮은 까닭에 주위에서 유입되는 물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특히 세계에서 수면이 가장 낮은 요르단 강으로부터 유황과 질산 성분을 함유한 수백만 톤의 물이 날마다 이곳으로 들어오는데, 당연히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는 못한다. 따라서 사해에서는 수분이 증발될 뿐 수분 가운데 함유되어 있던 염분 등은 고스란히 이곳에 남게 된다. 이렇게 유입되는 양에 비해 더 많은 양이 증발함으로써 수면은 점차 낮아졌고, 수백만 년 동안 지속된 이런 상황으로 인해 사해의 크기는 줄어들었고, 퇴적층의 두께는 점차 두꺼워졌다.

오늘날 사해의 염분 농도는 약 26~33퍼센트 정도로, 다른 해수의 평균 농도 5퍼센트에 비해 여섯 배가 넘는다. 따라서 특수한 염생식물과 세균을 제외한 어떤 생물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호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이로울 때도 있으니, 피부병을 구성하는 세균들도 이 물속에서는 살기가 힘들어 세계적인 피부병 치료 장소로도 이름이 높다. 그뿐만이 아니다. 최근 들어 사해는 자원의 보고로도 한몫 톡톡히 하는데, 이곳에서 산출되는 브롬이 세계 생산량의 1/4 정도에 달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해 주변의 검은 진흙이 미용 효과가 뛰어나다고 알려지면서 이를 이용한 화장품 공장이 설립되기도 했다. 한편 염분의 밀도가 너무 높아 사람이 팔을 젓지 않아도 그냥 물에 떠 있을 수 있어 사해에 가면 누구라도 수영 선수가 될 수 있다.

사해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하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이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고 전해지는 만큼 사람들은 두 도시가 사해 어느 곳에 수몰되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언젠가 두 도시가 수몰될 당시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발굴되어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줄지도 모르겠다.

한편 ‘사해 문서’라고도 부르는 고대 필사본 사해두루마리가 사해 주변 동굴에서 발견되어 그 시대의 역사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양피지 또는 파피루스에 기록된 사해두루마리는 팔레스타인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해서도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1947년 양 치던 아랍 베두인족 청년들이 사해 북서쪽의 키르바트 쿰란(Khirbat Qumran) 동굴에서 발견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 후에도 그 부근에서 많은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현존하는 성서를 구성하는 내용과 함께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내용도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들어 사해에 대해서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다름 아닌 사해가 죽어가고 있다는데···. 어차피 죽은 바다인데 또 죽는다고? 사해에 유입되는 수량이 갈수록 줄어들어 1년에 평균 80센티미터 가량씩 수면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50년 전에 비해 20미터 이상 낮아진 수면이 현재와 같은 비율로 낮아진다면 얼마 안 가 사해는 바다는커녕 소금밭으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가 팽배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스라엘과 요르단과 세계은행 등에서는 사해로 유입되는 수량을 늘리기 위해 이념과 민족간 적대감까지 옆으로 밀어둔 채 협력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해 [死海] (세상의 모든 지식, 2007.6.25,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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