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1106&cid=40942&categoryId=34083
카사노바
1725년 4월 2일 베네치아에서 출생하였다.
‘생갈트의 기사(Chevalier de Seingalt)’라는 이름은 그가 자칭한 것이다.
처음에는 성직자·군인·바이올리니스트 등으로 입신하려 하였으나, 추문(醜聞)으로 투옥되었다.
1756년 탈옥한 이후부터 생애의 3분의 2를 여행으로 유럽 전토를 편력하였다.
재치와 폭넓은 교양을 구사하여 외교관·재무관·스파이 등 여러 직업을 갖기도 하고, 감옥에 투옥당하는 등 그의 삶은 변화무쌍하였다.
그 동안 여러 계층의 사람들(君侯·귀족·문학가·과학자·예술가·희극배우·귀부인·천민·사기꾼·방탕아)과 두루 사귀었고
계몽주의 사상에도 접하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그는 보헤미아 둑스의 성에서 발트슈타인 백작의 사서(司書)로 쓸쓸히 죽었으나,
그의 저술가로서의 명성은 이 성에서 지루한 나날을 달래기 위해 쓴 《회상록 Histoire de ma vie》(12권, 1826∼1838) 때문이다.
이것은 18세기 유럽의 사회·풍속을 아는 데 귀중한 기록이 되었다.
또한 5부로 된 공상소설 《20일 이야기 Icosameron》(1888)는 쥘 베른의 《지저(地底) 여행》의 선구적 작품이라 일컬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지아코모 카사노바 [Giacomo Girolamo Casanova] (두산백과)
영어로는 베니스(Venice)라고 한다.
베네치아만(灣) 안쪽의 석호(潟湖:라군) 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물의 도시’라고 부른다.
대안의 메스테르와는 철교·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나, 철도역은 철교가 와 닿는 섬 어귀에 있고,
다리를 왕래하는 자동차도 시내에는 들어올 수 없다.
시가지는 본래 석호의 사주(砂洲)였던 곳에 들어섰기 때문에 지반이 약하고,
따라서 근래 지반침하와 석호의 오염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베네치아의 역사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灣)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6세기 말에는 12개의 섬에 취락이 형성되어 리알토섬이 그 중심이 되고, 이후 리알토가 베네치아 번영의 심장부 구실을 하였다.
처음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고,
도시공화제(都市共和制) 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다.
10세기 말에는 동부지중해 지역과의 무역으로 얻은 경제적 번영으로 이탈리아의 자유도시들 중에서 가장 부강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S자형의 대운하가 시가지 중앙을 관통하고,
출구 쪽의 운하 기슭에 장대한 산마르코 광장(廣場)이 자리한 기본적인 도시형태는
산마르코 대성당을 비롯한 교회·궁전 등과 더불어 13세기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5개의 원형 지붕에서 볼 수 있듯이,
베네치아의 몇몇 건축물에서는 동방의 영향을 반영하는 비잔틴풍(風) 또는 오리엔트풍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베네치아는 십자군(十字軍) 원정에 힘입어서 동방무역을 확대하고,
나아가서 현재 그리스의 여러 섬들을 비롯한 동부지중해 지역에 영토를 확대함으로써
14~15세기 초에 해상무역공화국으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 무렵의 베네치아 인구는 약 20만으로 추정된다. 공화국의 정치 중심이었던 두칼레 궁전이 완성된 것도 15세기였다.
16세기 이후, 투르크인에 의해 동부 지중해에서 세력이 약화되고,
따라서 베네치아는 점차 오늘날의 베네토주의 풍요한 농업지대의 중심 도시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도시경제의 쇠퇴와 페스트의 유행으로 16세기에는 인구가 10만으로 감소하였다.
1797년에는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점령되었고, 1866년에 이탈리아 왕국군에 점령되기까지 반 세기 이상은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 경제의 중심인 북부평야를 배후지로 하는 항구도시로 발전하였다.
상항(商港)은 서부의 철도역에 인접한 스타치오네 마리티마이나,
20세기에 들어와 대안에 공업항(工業港)으로 마르게라가 건설됨으로써,
마르게라·메스트레 등 대안(對岸) 지역이 근대공업지대로 발전하였다.
대안의 공업지구는 현재 행정적으로는 베네치아시에 포함되어 있고,
유리세공업(細工業)으로 유명한 무라노섬, 국제영화제 개최지 및 해수욕장, 카지노 등으로 유명한 리도 등도 베네치아시에 포함된다.
베네치아의 구시가지는 지난날의 공화국 번영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고,
산마르코대성당·두칼레궁전·아카데미아미술관 등은 미술·건축예술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다.
베네치아는 로마·피렌체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중요한 관광지이다.
대학 및 시(市) 동부의 현대미술전시장에서의 국제비엔날레, 리도의 국제영화제, 페니체극장에서의 음악 등 문화활동도 활발하다.
그러나 구시가지는 면적이 한정되어 있고, 현대생활에는 편리한 환경이 될 수 없으므로 대안부의 도시화가 현저하다.
대안부의 공업은 화학·기계공업이 중심이며, 공업항을 포함한 베네치아항의 취급물량은 이탈리아 제3위를 차지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네치아 [Venice] (두산백과)
탄식의 다리
두칼레 궁전과 작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나 있는 감옥을 잇는 다리이다.
1600년부터 1603년까지 안토니 콘티노(Antoni Contino)의 설계로 만들어졌다.
'10인의 평의회'에서 형을 받은 죄인은 누구나 이 다리를 지나 감옥으로 연행되었다.
죄인들은 이 다리의 창을 통해 밖을 보며 다시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탄식을 했다고 한다.
다리로 이어지는 감옥은 조반니 카사노바가 갇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탄식의 다리 [Ponte dei Sospiri] (두산백과)
두칼래 궁전
679년부터 1797년까지 1,100년 동안 베네치아를 다스린 120명에 이르는 베네치아 총독의 공식적인 주거지였다.
9세기에 처음 건설되었고, 현재의 외관은 14~15세기에 형성되었다.
최초의 건물은 마치 요새 같은 고딕 양식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고딕 양식을 잘 나타내면서도 비잔틴,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복합된 모습이다.
북방의 고딕 양식과 베네치아의 동방적 양식와 장식이 어우러진 모습을 베네치아 고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궁전은 베네치아 고딕의 조형미가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건물은 흰색과 분홍빛의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회랑은 36개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칼레 궁전에는 두 개의 정문이 있는데,
산마르코 대성당에 면한 쪽의 '문서의 문(Porta della Carta)'은 옛날에 정부의 포고문이나 법령 등을 붙이던 곳이다.
문 위에 보이는 날개가 있는 사자는 베네치아의 상징이다.
내부에는 총독의 방과 접견실, 투표실, 재판실 등이 있다.
가장 볼 만한 곳은 재판을 담당하던 '10인 평의회의 방'이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 중 하나로 유명한 틴토레토의 대벽화 《천》,
베네치아의 주요 역사를 그린 그림, 76인 총독의 초상화 등이 있다.
또 궁전 재판실에서 소운하를 사이에 두고 '탄식의 다리'라고 불리는 다리를 건너면 감옥이 있는데,
이곳의 감옥은 카사노바가 갇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궁전에서 감옥으로 넘어가는 다리에 '탄식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다리에 난 창으로 죄수들이 감옥으로 옮겨지면서
다시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베네치아의 총독은 선출되기가 힘들었던 데 비해,
평의회 의원의 참석 없이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고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의원이 동행해야만 베니치아를 벗어날 수 있었으며,
그의 궁전에서 열리는 모든 공식적인 축제의 비용을 시의 도움 없이 혼자서 지불해야만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칼레 궁전 [Palazzo Ducale] (두산백과)
산 마르코 광장
베네치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열주로 가득한 건물이 광장을 'ㄷ'자로 둘러싸고 있어 광장은 하나의 거대한 홀처럼 보이며,
나폴레옹은 이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홀)이라 불렀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베네치아의 수호신인 날개 달린 사자상과 성테오도르상이 있고 동쪽으로 산 마르코 대성당, 두칼레 궁전이 있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은 16세기 경 정부청사로 건립된 것으로 나폴레옹의 날개(알라 나폴레오니카)라고도 불리며,
현재는 박물관을 비롯해 오래된 카페, 살롱들이 들어서 있다.
그중 1720년에 개업한 카페 플로리안은 과거 바이런, 괴테, 바그너 등이 자주 들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마르코 광장 [San Marco Piazza]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