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06.09.03 낙원
  2. 2006.09.03 오스트리아_짤즈감머굿 1/2
  3. 2006.09.01 오스트리아_슈타트파크(비엔나)
  4. 2006.09.01 쉔부른 궁전 정원
  5. 2006.09.01 오스트리아_쉔부른 궁전(비엔나) 11
  6. 2006.08.30 오스트리아_비엔나

낙원

베스트 샷 2006. 9. 3. 08:47




'베스트 샷'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경 프라하성  (0) 2006.09.11
짤쯔부르그  (0) 2006.09.05
쉔부른 궁전 정원  (0) 2006.09.01
홍련  (0) 2006.08.31
필름 어부의 요새  (1) 2006.08.30
Posted by landart
,

006년 8월 16일

길겟 마을






모짜르트의 외갓집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성당




낙원이라는 생각이다.

산자와 죽은 자가구분 없이 공존하는..

우리의 묘지 문화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했다.















짤쯔감머굿 Salzkammergut
소금을 담고 있는 창고 ”의 뜻을 가진 짤쯔캄머굿은 짤쯔부륵 시내에서 20~30Km 동쪽에 있는 호수 밀집지역을 뜻한다. 오래 전 이 곳은 바다 속에 있던 지역인데 지구의 지각변동으로 인해 산 속에 소금광산을 갖게되어 불리운 명칭이다. 지각 변동은 소금광산 뿐 아니라 여러 개의 아름다운 호수도 만들어 바다가 없는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물이있는 휴양지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 하고있다. 1965년 영화”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아름다운 초원과 자연을 이 곳에서 촬영해서 더욱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몬트제 Mond see
물의 온도가 따뜻하고 천혜의 절벽과 호수가 어우러져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달의 호수”는 이 곳의 제후 오딜로(Odilo)가 사냥하는 동안 날은 어두워지고 지척은 분간 할 수 없는데 갑자기 커다란 보름달이 떠 올라 제후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걸 막았다 . 748년 제후는 이 곳에 감사의 표시로 수도원을 짓고 이 곳을 “달의 호수”로 부르게 했다 .
*성 미카엘 성당 st.Michaell
“사운드 오브 뮤직”의 결혼식 교회로 더 많이 알려진 미카엘성당은 12C 에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지어진 후 14C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고딕 성당으로 개축되었다가 지금의 바로크 양식은 17C 말~18C 초에 완성된 것이다 . 내부는 영화에서 처럼 검은색 벽과 조각에 금색 장식이 화려하고 특이하게 재대 앞까지 높은 계단이 있다.
*교회광장 Markt platz
미카엘 교회 앞 광장과 주변에 그림 같은 바로크 주택이 늘어 선 곳이다. 분홍색 , 하늘색, 연두색으로 칠해진 건물들은 카페와 식당이다. 원색의 꽃으로 꾸며진 테라스에서 커피 한 잔으로 경치예찬을 나눠도 좋다 .
*상트 길겐 St.Gilgen
짤쯔부륵에서 동쪽으로 25Km 거리에 있는 상트 길겐은 해발 550M 에 있다. 모짜르트 어머니의 고향이자 누나 난넬 Nannerl이 결혼식을 올린 곳 이다. 애기디우스 성인에게 바치는 교회가 지어지 면서 성인의 고향인 프랑스의 Saint Gilles로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그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으로 인해 유명 인사들의 거주지가 되고 있다 . 전 독일 수상 헬무트 콜의 여름 휴가지 이기도 하다 . 물론 이런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시민과 정부의 노력은 놀랍도록 치밀하다 .
*모짜르트 어머니의 생가
모짜르트의 아버지는 독일 출생이고 어머니는 이 곳 상트 길겐에서 태어났다 . 그의 누이 마리아 난넬 Nannerl은 이 곳을 많이 좋아하고 그리워 했다고 한다 . 지금 어머니 생가 건물은 관공서로 쓰이고 벽에 어머니와 란넬의 부조가있다 .
*모짜르트 광장과 분수
상트 길겐 시청 앞의 작은 광장에 모짜르트의 조각과 분수가있다 . 자랑스러운 천재를 기리기위해 어린 모짜르트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이다 .
*상트 길겐-볼프강제 유람선 관광
상트 길겐에서 볼프강제 선착장까지 약 40분간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둘러 볼 수있다 . 호숫가 절벽의 굽이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예쁜 집들과 절벽의 동굴에 얽힌 이 동네의 전설을 듣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 배 위에서는 음료수만 판매한다 .
*볼프강제 Wolfgangsee
볼프강 주교가 죽은 후 성인으로 추대되면서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에서 중요한 성지순례지가 되었다 . 1400년대 중반 까지 전성기를 누리다가 종교개혁등 어려운 시기를 거쳐 19세기 프란츠 요셉 왕이 이 근처에 여름 궁전을 지으면서 다시 활기를 띄게되어 지금은 중요한 휴양지로 발전했다 .
*성 볼프강 성당 St.Wolfgang Kirche
전설에 의하면 호숫가 중간에 위치한 활켄슈타인 산에서 자신의 교회를 어느 곳에 지을 지 열심히 기도한 후 들고있던 도끼를 던져서 도끼가 떨어진 곳에 교회를 짓기로하여 지금 이 자리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한다. 1052년 성인으로 추대된 후 1291년 교회 건축을 시작하여 15C 고딕 양식, 17C 바로크 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이 교회는 특이하게 고딕과 바로크 식의 두가지 제대를 가지고 있다. 이 제대들은 유럽에서 중요한 문화재이다. 지금도 이 교회는 연 2만~7만명의 순례자가 방문한다.
*샤프베르그 Schafberg
상트 길겐에서 유람선을 타고 볼프강 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보이는 “양 들의 산”이라 불리는 산이다. 높이 1,783 M 의 바위산은 산 정상 부분이 비스듬하게 평지를 이루어 초원이 펼쳐져있고 아래의 짤쯔캄머굿의 호수들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기막힌 경관을 갖고있다.
이 초원이 바로 영화“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가 춤추며 노래부르는 장면, 아이들과 피크닉 나온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이 아름다운 경치는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산 정상을 찾았다. 당시에는 의자에 손님을 앉히고 들어서 산 정상까지 올려다 주는 직업이 있었다고한다. 운송비에는 손님의 안전과 산 정상의 초원 위에 원하는 자리를 잡아주 는 비용이 포함되었다. 1836년 마침내 산위를 달리는 기차와 정상에는 숙소와 식당이 생겼다. <Schafberg Bahn> 이라고 쓰여진 선착장에서 내리면 바로 기차역이있다.













Posted by landart
,

2006년 8월 15일




요한스트라우스 황금동상







호이리게 저녁식사

귀에 익은 서양음악에서 시작하여 이어지는 우리 음악으로 순식간에 열광의 도가니...

정말 모처럼 맛있는 식사와 함께 신나게 놀았다.

Heurige

호이리게

빈에서 햇포도주를 마시며 여유로운 휴식 즐기기
'호이리게(Heurige)'라는 말의 어원은 호이리크(heurig 올해의)이며,
heuriger Wein(올해 만든 포도주)를 의미한다. 빈에서는 '그해의 햇포도로 담근 포도주'라는 뜻과 함께 '그해 새로 탄생한 포도주를 마시며 식사를 하는 레스토랑'을 동시에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호이리게 전통식 레스토랑은 비엔나 근교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해 마지막에 수확한 포도로 담은 술을 주로 소다수와 섞어 마시며, 거기에 뷔페식 음식이 준비되어 나온다. 뷔페식 음식은 쏘세지, 고기류, 야채 등이 포함된다. 식사도중에 아코디언과 기타로 연주되는 슈라멜(Schrammel) 음악이 연주되어 편안하고 흥겨운 분위기가 만들어지곤 한다.

호이리게 레스토랑이 밀접되어 있는 그린칭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오스트리아의 멋이 물씬 풍기는 곳으로 시내 전차 38번이 그곳까지 운행되고 있다.






Posted by landart
,


'베스트 샷'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짤쯔부르그  (0) 2006.09.05
낙원  (0) 2006.09.03
홍련  (0) 2006.08.31
필름 어부의 요새  (1) 2006.08.30
어부의 요새  (0) 2006.08.28
Posted by landart
,

2006년 8월 15일


6928















쉔브룬 궁전

'아름다운 샘'이란 의미의 화려한 쉔브룬 궁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전으로 매우 화려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쉔브룬이라는 이름은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도중 아름다운 샘(Schoenner Brunnen)을 발견한데서 유래하고 있다.


외부 건물은 크림색이며 내부는 18C 후반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수집한 동양의 자기나 칠기, 페르시아의 세밀화 등으로 우아하고 호화롭게 로코코식으로 꾸며져 있다. 왕궁정원은 약 1.7㎢에 달하는 바로크 양식으로 단장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다수의 분수와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44개의 대리석상들이 있다.
그외에도 그리스 신전 양식의 글로리에테, 궁정마차 박물관, 온실 등이 있다.





글로리에테(Gloriette)
1775년 마리아테레지아 여제가 프러시아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고 전몰자 위령을 목적으로 정원 끝언덕에 세웠다.








 

베스트 샷

http://landart.tistory.com/1157

Posted by landart
,

2006년 8월 15일



부다페스트의 일출

- 호텔 비상 탈출로를 이용하여 옥상에 올라



(Wien) 현지 가이드 : 일명 부루스 리(이용일)

요약

오스트리아의 수도. 면적 414.

설명

오스트리아의 수도. 면적 414.09㎢. 인구 160만 9631명(1998). 하나의 주를 이루기도 한다. 도나우강을 따라서 발달한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이며, 오랫동안 유럽 및 세계 정치·문화의 중심지의 하나였다. 그 중심지적 역할은 제2차세계대전 후부터 약화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국제회의의 개최지 및 음악의 도시이다. 빈의 발전은 그 지리적 위치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알프스와 카르파티아산맥 사이의 빈분지를 지나는 고대의 <호박(琥珀)의 길>이라는 남북교통과, 도나우강 동서교통의 교점에 위치한다는 것이 그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시의 중심부는 홍적세의 빙기에 형성된 몇 단의 단구 위에 있다. 평균기온은 1월 -1.4℃, 7월 19.9℃, 적설일수 41일, 연강수량 660㎜이며, 내륙지에 비해 기후가 온화하다. 시는 일찍이 켈트인 촌락으로 성립됐는데, 1세기 말무렵에 로마제국 북방에 대한 수비대사령부와 병영이 설치되었다. 이 도시는 1282년 이후 합스부르크가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1533년에는 합스부르크가의 수도가 되어 이후 400년 동안 유럽대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역할을 수행하였다. 2차례에 걸친 투르크의 공격으로 파손된 시가는 합스부르크가에 의하여 재건되었고 현재의 도시 기초가 형성되었다.

빈 시가
오스트리아공화국 정부·의회·최고법원 등의 주요 국가기관 외에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주청사 등도 있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시가는 23구로 나뉜다. 링로(路)는 1857년에 구시가를 둘러싸고 있었던 성벽·포대 등을 제거하여 만든 나비 57m, 길이 4㎞의 환상도로이며, 구시가와 이 가로에 따르는 지구는 빈의 중추부에 해당한다. 국회의사당·정부청사·시청사·증권거래소·빈대학·국립도서관 등의 시설 외에 시의 상징이라고도 할 성슈테판대성당·왕궁·미술사박물관·자연사박물관·국립오페라극장·부르크극장 등이 있다. 그 바깥쪽 환상도로와의 사이는 주택·상업지구이고, 남부와 도나우 대안부는 공장지구와 근로자의 주택지구이다.

빈의 생활·문화
빈은 숲의 도시로서, 도심부에 폴크스공원을 비롯하여 여러 공원이 있어 시민에게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며, 빈의 숲과 자연보호구, 누스도르프 등의 포도재배취락은 시민의 휴일 산책지이다. 인구는 제1차세계대전 이후 줄어들었다. 성(姓)에 외국계가 많은 사실로써 시민들의 출신지의 다양함을 알 수 있다. 빈시민은 특히 음악적 예술성이 뛰어나며 유머감각이 풍부하다. F.J. 하이든·W.A. 모차르트·L. 베토벤·F.P. 슈베르트·J. 브람스·J. 슈트라우스같은 작곡가들이 살았던 도시이다. 관광객은 연간 132만 정도이다.

빈의 산업
상업과 소비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도매업·소매업·금융업·서비스업이 성행한다. 오스트리아 제1의 공업도시이기도 하나 중소규모의 것이 많다. 주요 업종은 정밀기계·전자·금속가공·유리·도자기·의료품(衣料品) 등이다. 1921년 이래 중부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국제박람회가 개최되며, 수출진흥에 기여하고 있다.

빈의 역사
예로부터 동서교통로였던 빈은 발트해와 아드리아해를 맺는 요로이며, 중세부터는 독일인·슬라브인·마자르인의 접촉점이었다.

고대·중세
기원전에는 작은 마을이었으나, 마르코만넨전쟁(남하한 게르만인 마르코만니부족들에게 로마가 반격을 가한 전쟁) 말기인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가 이곳에서 전사했다. 3세기에는 로마의 자치도시였으나 민족이동기에 멸망하였고, 5세기에는 아틸라의 훈족과 이탈리아로 침입하기 전의 동고트족도 이 근방에서 나라를 형성했다. 8세기엔 성 루프레히트교회와 성 베드로교회가 건설되었고, 그 후 빈은 9세기에 오스트마르크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바벤베르크가(家) 밑에서 13세기에는 궁정기사문화도 꽃피웠다. 또 십자군의 통로가 되기도 하여,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한때 제국도시(帝國都市)로도 번영했다. 그러나 1251년 베멘왕 오타카르 2세가 남하하여 점령한 이래 빈은 영방군주(領邦君主)에게 종속되는 도시로 바뀌었다.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대공위시대가 지난 뒤 황제가 된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는 오타카르를 내쫓고 빈으로 입성했다. 그리고 13세기 말부터 교회가 많이 건설되어, 성 슈테판대성당은 고딕양식으로 재건되고 아우구스티누스교회도 창건되었다. 그러나 황제위를 둘러싸고 여러 왕가와 다툰 합스부르크가 밑에서의 빈도 15세기 후반에는 헝가리왕의 오랜 점령을 당했다. 합스부르크가는 결혼정책에 의해 에스파냐의 유산을 이어받고, 카를 5세하에서 세계제국을 실현했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계속되는 신교파의 대두뿐만 아니라, 상속에 따르는 에스파냐·오스트리아 양통분립(兩統分立), 대외적으로는 프랑스와 투르크의 위협으로 빈은 어려움을 겪었다. 오스트리아가는 보헤미아·헝가리의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1529년 빈은 투르크군에게 포위되었다. 1619년에는 빈의 신교도와 결탁한 토룬백작 마티어스의 공격을 받았고, 30년전쟁 때에 스웨덴군의 공격을, 1683년에도 다시 투르크군에게 포위당했다. 황제군은 빈 북쪽에서 승리하고, 반격으로 나온 뒤부터는 마침내 헝가리 전 국토를 확보할 수 있었고, 에스파냐를 배경으로 반종교개혁을 추진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밑에서 빈은 바로크문화를 꽃피웠다. 1740년에 모든 가령(家領)을 이어받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계승전쟁과 7년전쟁에서 슐레지엔을 빼앗기고 프로이센의 대두를 허용했으나 요제프 2세와 함께 계몽절대주의에 의한 근대화를 추진시켰다. 18세기 말에는 고전파의 전성기를 맞았다.

빈회의 이후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뒤인 1814∼1815년의 빈회의에서는 유럽의 군주들이 모였다. 복고주의와 정통주의에 의한 메테르니히의 반동체제하의 비더마이어문화(복고주의 예술양식) 속에서 슈베르트의 가곡과 왈츠도 태어났다. 1857년 오늘날의 합창단·관현악단 등이 많이 생겨났고, 브람스와 J. 슈트라우스의 왈츠, 오페레타의 황금시대를 맞았다. 이탈리아통일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에 패하여 헝가리의 독립을 인정한 뒤 이중왕국으로 다시 편성했으나 독일 통일로부터는 배제되었고, 1879년의 독일-오스트리아동맹은 독일제국에 대한 종속적 길을 트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독일인의 지도권이 상실되어 가는 가운데서 노동자운동도 격화하였으나, 사회민주당도 민족문제의 극복과 제국주의단계에서의 대응에 고민했다. 빈대학에서는 역사주의와 민족주의를 극복하려는 개인주의적인 새로운 학문이 탄생했다. 문화산업이 전개되었으나 후진자본주의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이중왕국의 모순은 컸으며,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시작되는 제1차세계대전을 맞게 된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제1차세계대전 패전에 따르는 합스부르크제국 해체로 인해 동·중유럽을 잃은 오스트리아는 독일과의 합방도 거부당함으로써 경제적·정치적 위기는 심각했다. 빈에는 하층시민과 실업자를 위한 가난구제시설도 많이 설치되었으나, 노동운동의 고조는 1927년에 이르러 노동자의 봉기로까지 발전했다. 1929년에 시작된 세계공황은 반볼셰비키·반나치스인 기독교사회당에 정권을 맡겨 E. 돌푸스의 독재를 낳았고 1934년에는 사회민주당도 비합법화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나치스는 같은 해 돌푸스를 왕궁 안의 총리관저에서 암살했으며, 히틀러는 1938년에 독일-오스트리아합방을 강행함으로써 1939년에는 제2차세계대전으로 돌입했다. 전쟁 말기에 빈은 1주일간의 소련군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1945년 4월 나치스독일로부터 해방되어 사회민주당의 K. 레너를 대통령으로 하는 신생 오스트리아의 수도가 되었고,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국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미·소 해빙분위기 속에서 1955년 5월 마침내 독립을 되찾게 되었다. 1961년 케네디·흐루시초프회담의 무대가 되었으며 이것이 쿠바위기 회피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 여행정보 http://www.hanatour.com/asp/travelinfo/if-12000.asp?country_code=AT











성 슈테판 성당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로서, 1147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을 시작하였고, 1258년 빈을 휩쓸었던 대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263년 보헤미아 왕에 의해 재건되었다. 1359년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헐어버리고 고딕 양식으로 개축하였고, 1683년에는 터키군, 1945년에는 독일군에 의해 많이 파괴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복구를 시작하여 대부분 옛 모습을 찾았다. 성당 이름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성인(聖人) 슈테판에서 딴 것이다.

옛 건물이 가득 들어찬 구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다. ‘빈의 혼(魂)’이라고 부를 정도로 빈의 상징으로 꼽힌다. 공사기간이 65년이나 걸렸으며 건물의 길이가 107m, 천정 높이가 39m에 이르는 거대한 사원이다. 높이 137m에 달하는 첨탑과 25만 개의 청색과 금색 벽돌로 만든 화려한 모자이크 지붕이 눈에 띈다. 보헤미아 왕이 세웠던 '거인의 문'과 '이교도의 탑'도 남아 있다.

건물 내부에는 16세기의 조각가 안톤 필그람이 만든 석조 부조의 설교대와 15세기 말에 만들어진 프리드리히 3세의 대리석 석관이 있다. 그밖에 마리아와 예수상이 있고,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매우 아름답다. 지하에는 1450년에 만든 지하유골 안치소 카타콤이 있는데, 페스트로 죽은 사람의 유골 약 2,000구와 합스부르크 왕가 황제들의 유해 가운데 심장 등의 내장을 담은 항아리 및 백골이 쌓여 있다. 모차르트의 결혼식(1782)과 장례식(1791)이 치러진 곳이며, 빈 시민들은 매년 12월 31일 슈테판대성당 광장에 모여 새해를 맞는다.







비엔나의 중심지, 케른트너 거리(Kerntner Strasse)
비엔나 관광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거리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립 오페라 하우스에서 시작하여 슈테판 대성당 광장에 이르는 비엔나의 중심가로 고품질의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상점들이 즐비하며 보행자 전용 거리인 그라벤과 콜마르크트로 이어진다. 쇼핑의 파라다이스라고 할 수 있는 거리로 세계 유명 디자이너의 상품, 가치있는 골동품 또는 재미있고 앙증스러운 기념품 등이 사람들의 시선을 멈출 수 없게 한다.






오스트리아 (Republic of Austria)

요약

유럽 중남부에 있는, 산이 많고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 정식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Resrepublik Österreich).

설명

유럽 중남부에 있는, 산이 많고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 정식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Resrepublik Österreich).

면적 8만 3855㎢. 인구 818만 8000명(2003). 동쪽은 헝가리·슬로바키아, 서쪽은 스위스·리히텐슈타인, 남쪽은 슬로베니아·이탈리아, 북쪽은 독일·체코와 접하고 있다. 수도는 빈.

오스트리아의 자연
국토의 2/3가 동부알프스산맥 지역이며, 동서로 뻗은 화강암류의 중앙알프스와 남쪽과 북쪽으로 나란히 달리는 남·북 석회암 알프스의 3산열(山列)로 이루어진다. 이에 속하는 산들은 해발고도 1500~3000m이며 최고봉은 그로스글로크너산(3797m)이다. 중앙알프스는 오랜 화강암·편마암·편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으로는 엔스·잘차흐계곡까지 뻗어 있으며 남으로는 드라바강에 면해 있다. 이탈리아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외츠탈과 호에타우레른 산령은 특히 험준하고 빙하의 침식을 받았으며 2700~2900m 높이에 설선(雪線)이 있다.

북동부를 흐르는 다뉴브강 이북은 보헤미아숲의 연장이며 고기(古期)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완만한 구릉과 넓은 평지는 빈분지로부터 노이지들러호(湖) 부근에만 있을 뿐이다. 다뉴브강은 독일의 파사우로부터 오스트리아 북동부를 지나 빈 동쪽에서 헝가리로 들어간다. 멜크로부터 하류 쪽으로는 단구가 있는 넓은 계곡이 있고, 상류는 협곡 사이로 흐른다. 주요 지류는 인·잘차흐·엔스·트라운·무르 등이며, 상류에는 아터호를 비롯한 많은 아름다운 호소(湖沼)가 있다. 산지에는 U자곡·빙퇴석(氷堆石) 등의 빙하지형이 남아 있고, 질브레타산군에는 빙하가 있다.

서유럽의 해양성기후와 동유럽의 대륙성기후의 점이지대(隷移地帶)를 이루고 있다. 동부에 있는 빈(해발고도 202m)의 1월평균기온 -1.4℃, 7월평균기온 19.9℃, 연평균기온 9.8℃, 연강수량 660㎜이다. 서쪽으로 가면서 기온이 낮아지고 비가 많아지며 중앙부인 잘츠부르크(430m)는 연평균기온 8.3℃, 연강수량 1359㎜이다. 산악지대는 알프스기후이며, 아를베르크(1220m)에서는 연평균기온 5.4℃, 연강수량 1957㎜이다. 고산지대는 기온이 더 낮고 강수량은 일반적으로 많으나, 인강 상류 계곡은 강수량 600㎜ 이하이다. 남동부는 스텝성 푄기후로 안다우에서는 연평균기온 9.7℃이나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우며 강수량 576㎜로 적다.

기후와 해발고도에 따라 1000m 미만에서는 너도밤나무를 주로 하는 활엽수림지대를 이루고, 1000m 이상에서는 가문비나무를 주로 하는 침엽수림대로 되어 있다. 그보다 위쪽은 소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수목한계는 설선보다 약 900m 낮고, 한계 부근에는 눈잣나무가 있다. 동부는 헝가리 초원의 연속으로 스텝황야를 이룬다. 숲은 광범위하게 벌채되었으나 아직도 국토의 44%를 차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지지
서부의 잘츠부르크·티롤·포어아를베르크 3주는 알프스지역 안에 있다. 잘츠부르크주는 암염과 글로크너 카프룬 수력발전소로 유명하다. 주도인 잘츠부르크시(인구 약 14만)는 호엔잘츠부르크성(城)과 예술제로 유명하다. 티롤주는 겨울스포츠의 메카이며 가옥과 자연이 아름다운 관광지이다. 주도 인스브르크(인구 약 12만)는 빈과 스위스를 잇는 동서교통로인 동시에 브레너고개를 넘어 독일과 이탈리아를 연결하는 십자로에 해당되어 역사적 기념물이 많다. 가장 서쪽에 있는 포어아를베르크주는 관광으로 번영함과 아울러 수원지대(水源地帶)이자 섬유공업이 활발하다. 보덴호에 면한 주도 브레겐츠(인구 약 2만)는 예술제로 알려져 있다.

알프스산맥 끝부분이 그 남쪽에 이르고 있는 오버외스터라이히주는 알프스와 비슷한 지형의 경승지가 많다. 다뉴브강 사이로 북부는 보헤미아숲 남단이 체코와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주도 린츠(인구 약 22만)는 다뉴브강의 하항(河港)으로, 이 시를 중심으로 철강업·화학공업이 발달해 있다.

부르겐란트·슈타이어마르크·케른텐·니더외스터라이히의 4개 주는 농림업지역이다. 헝가리와의 국경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은 부르겐란트주에서는 밀·옥수수·야채·과일이 풍부하게 생산된다. 작곡가 F.J. 하이든이 활동한 주도 아이젠슈타트에는 그의 묘지가 있다. 슈타이어마르크주는 임업이 성하고 또 에르츠베르거의 철광석과 마그네사이트를 원료로 하는 제철업, 기계공업, 종이·셀룰로오스공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도 그라츠는 인구 약 25만의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로 상공업 중심지이다. 케른텐주 서부는 알프스지역으로 산과 호수가 많고 주도 클라겐푸르트(인구 약 8만)에서는 국제재목박람회가 열린다. 납·아연·마그네사이트도 산출된다. 수도 빈(인구 159만, 1996)에는 총 인구의 22%가 모여 있고, 니더외스터라이히주와 더불어 공업이 활발하다. 빈분지 북부에는 천연가스와 석유자원이 있으며, 다뉴브강과 그 지류로부터의 전력공급도 풍부하다.

오스트리아의 역사

고대
선사시대부터 교통의 요지로서 여러 민족의 이동이 많았다. BC 8세기 무렵부터 할슈타트문화의 중심이 되어 정착한 켈트인이 BC 2세기에는 노리쿰왕국을 세웠다. 기원 전후 로마인도 다뉴브강 남쪽 연안에 이르러 노리쿰을 속주로 편입시켰고 뒤늦게 빈도보나(지금의 빈)를 건설하였다. 게르만인도 1세기에 이 지방으로 진출했다. 로마제국은 그 대응책에 고심하면서 4세기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훈족의 서진(西進)으로 435∼453년 아틸라의 지배를 받았으나, 그가 죽자 게르만부족들의 재편성과 자립화가 진행됐다. 그러나 동방으로부터 슬라브족을 동반한 아바르족이 진출하였고, 5세기 말 로마인이 철수했다.

오스트마르크의 성립
서쪽에서 5세기 후반 이래 왕국을 형성하고 있던 프랑크족은 6세기 로마교회와 손을 잡고 점차 남동쪽으로도 진출하여 카롤링거왕조의 카롤루스대제(재위 768∼814) 영도 아래 8세기 말 바이에른을 복속시키고 다시 동진하여 791∼796년 아바르족을 괴멸시켜 여기에 오스트마르크를 설치했다. 9세기 말부터 서진을 시작한 마자르인은 10세기에 이곳으로 진출하였다. 카롤링거왕조가 단절된 뒤 동프랑크왕국을 계승한 작센왕조 오토 1세(재위 936∼973)는 955년 마자르인을 격파하고 오스트마르크를 재건, 962년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였다.

바벤베르크가의 지배
사촌인 바이에른공과 싸워 이겨 황제가 된 오토 2세(재위 961∼983)는 976년 바이에른으로부터 오스트마르크를 분리시켜 변경백(邊境伯)의 영지로 삼아 이것을 바벤베르크가에게 하사했다. 바벤베르크의 군주들은 동방식민을 추진해서 경제발전을 꾀하였고, 서임권을 둘러싼 황제와 교황의 분쟁을 이용해 세습을 관행화하였으며, 슈타우펜가와 벨프가의 분쟁에서도 프리드리히 1세(재위 1152∼90)로부터 1156년 세습공령으로의 승격을 획득했고, 아울러 영역 내에서의 재판권을 인정받았다. 1192년 슈타이어마르크공령도 병합하여 남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했으나, 1246년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최후의 군주인 프리드리히 2세(재위 1230∼46)가 전사함으로써 오스트리아는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1246∼73)를 맞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 지배의 성립
주변 지역의 분쟁에 개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접 제후들의 무력개입을 초래했으나, 보헤미아(뵈멘)왕 오토카르 2세는 1251년 빈을 점령하고 아드리아해까지 진출해 동유럽에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1256년 독일의 대공위시대(1256∼73)에 때맞추어서 황제위를 요구하였다. 이에 반대한 독일 제후들은 1273년 알자스와 스위스 등지에 기반을 둔 합스부르크백작 루돌프를 황제로 선출했다. 황제 루돌프 1세(재위 1273∼91)는 제국영토의 반환을 거부한 오토카르를 1278년에 죽이고 오스트리아를 합스부르크가의 영지로 확보했다. 그러나 제후들은 너무 강대해진 합스부르크가에게 계속해서 황제위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1291년 이래, 특히 14세기에는 오랜 기간에 걸친 스위스독립전쟁으로 고초를 겪었을 뿐 아니라, 카를 4세(재위 1347∼78) 밑에서 번영한 룩셈부르크가와도 대립, 1356년 금인칙서(金印勅書)에서도 7선제후(七選帝侯)에서 배제되어, 룩셈부르크왕조가 후스전쟁(1419∼36)으로 단절되고 알브레히트 2세가 1438년 즉위한 뒤에야 합스부르크가가 황제위를 독점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1453년 대공령으로 승격하였다.

결혼정책과 세계제국의 성립
합스부르크가의 아들들에 대한 분할상속 전통은, 결과적으로는 결혼정책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으나 영토분할과 계승권분쟁이 생김으로써 통일국가로 나아가는 데에는 방해가 되었다. 1477년 부르군트공주와 결혼한 황제 막시밀리안 1세(재위 1493~1519)는 1495년 독일제국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좌절되었다. 1496년 그의 아들 필립이 에스파냐 왕녀와, 1515년 그의 손자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헝가리 왕녀와 결혼했다. 이 결혼정책은 프랑스와의 대립을 장기화시키면서 프랑스와 동맹관계에 있는 오스만투르크와 대립을 가져와 합스부르크가는 동·서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었으나, 필립의 장남 카를 5세(재위 1519~1556)가 프랑스왕과의 전쟁에서 이겨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 합스부르크세계제국이 출현했다.

종교개혁과 오스트리아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룩한 세계제국도 1521년 에스파냐계와 오스트리아계로 분할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재위 1556~1564)는 농민전쟁에도 직면했으나 오스만투르크의 북상으로 헝가리왕 라요시 2세(재위 1516~1526)가 1526년 모하치에서 죽자, 보헤미아·헝가리 두 왕국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1529년 빈을 포위당해 겨우 격퇴하고 1531년 독일왕이 되었으며 헝가리에서는 얼마 되지 않는 북서부를 지배했을 뿐이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화의(和議) 뒤 1556년 카를 5세로부터 제위를 승계받았으나 종교쟁의에는 간섭할 수 없었다. 합스부르크가의 내분 뒤 페르디난트 2세(신성로마황제, 재위 1619~1637)가 1617년 보헤미아왕이 되어 반종교개혁을 강행하자, 1618년 30년전쟁(1618~1648)이 일어났다.

봉건반동과 계몽전제주의
30년전쟁은 단순한 종교전쟁이 아니라 자본주의 탄생의 태동이기도 하였으며 체크민족주의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열강의 간섭 속에서 오스트리아의 군주들은 반종교개혁을 통해 농노제를 다시 확립하였고, 서방에서는 영국과 결탁해 루이 14세의 침략을 막았으며, 동방에서는 1683년 오스만투르크의 빈 포위를 반격하여 헝가리 전토를 확보하였다. 권력집중을 도모하고 영토통합을 꾀하였으며, 산업육성·농민보호에 힘썼으나 에스파냐계승전쟁에서는 해외 진출을 단념하고 에스파냐왕위를 포기하였으며,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 영토를 확보하였다. 오스트리아계승전쟁(1740~1748)에서는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을 빼앗겼으나 영토분할을 막기 위한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이 인정되어, 마리아 테레지아(재위 1740~1780)에게 상속시켰다.

1756년 프랑스와의 동맹에 성공했으나 7년전쟁(1756~1763)에서도 슐레지엔을 수복하지 못했고, 오히려 헝가리귀족과 타협해 동방에서의 러시아진출과 독일에서의 프로이센 발흥을 도운 셈이 되었다. 전중·전후의 부흥을 위해 행정·재정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 요제프 2세(재위 1765~1790) 치하인 1781년 <농노해방령>과 <관용령>을 발포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1790년 요제프 2세의 죽음으로 개혁정책도 좌절되었다.

나폴레옹전쟁과 메테르니히체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에 직면한 합스부르크가는 영토를 유지하기 위하여 나폴레옹이 대관하기에 앞서서 1804년 오스트리아황제라고 칭했고, 슬라프코프에서 참패한 1806년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K.W.N.L. 메테르니히는 1810년 황녀 마리아 루이자와 나폴레옹의 결혼을 추진하는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교묘히 해방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빈회의(1814∼1815)를 주최하고, 복고·정통·연대를 기조로 반동체제를 국내적·국제적으로 확립해 자유의 움직임을 탄압했다.

3월혁명과 반혁명의 승리
메테르니히체제 아래에서도 산업발전에 따라 시민의 힘이 강해졌다. 1848년 프랑스 2월혁명의 영향으로 빈 등지에서 3월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는 망명했다. 혁명의 전면에 하층시민이 부상하자 산업시민층은 혁명에서 후퇴해 10월 말 반혁명의 승리로 끝나고, 1851년 이후로는 신절대주의 A. 바흐 체제가 되었다. 혁명 뒤에는 농민해방을 정착시키면서 산업 근대화를 추진시켰기 때문에 산업혁명이 전개되면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영토의 기반을 동·중유럽에 두었기 때문에 전형적인 다민족국가가 되었고 혁명은 여러 민족의 독립운동을 표면화시켰다. 헝가리 토지귀족의 독립운동은 러시아군대의 원조로 1849년 진압되었으나, 체크의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는 슬라브 여러 민족에 영향을 주었다. 크림전쟁에서의 외교적 실패와 고립화 속에서 이탈리아의 운동은 1859년 독립전쟁으로까지 고조되었고, 그 패전으로 바흐체제는 붕괴되었다.

이중제국과 그 붕괴
위기에 직면한 오스트리아는 여러 민족의 요구를 참작, 1860년 연방주의적인 10월 칙서(Oktoberdiplom)를, 1861년에 2원제의회를 인정하는 2월헌법(Februar-Patent)을 반포하여 부르주아적 권력의 강화를 시도했지만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에서 완패하자 헝가리 토지귀족과 제휴, 그 왕국을 인정해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제국을 성립시켰다. 이 노선은 반발하는 슬라브 여러 민족의 요구를 억압하고 1873년 공황을 거쳐 1879년 독일-오스트리아동맹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운동의 고조와 함께 노동운동도 성장하였다. 이 해에 <모든 민족과 정당을 대표하는 황제내각>이 성립되자, 이로 인한 독일인과 체크인의 민족적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보헤미아에서는 <언어령(Sprachenverordnung)>이 되풀이되었지만 대립은 일상생활로까지 번져 격화를 거듭하였다. 1888년 결성된 사회민주당은 1907년 보통선거제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1909년 민족별로 분열되자 민족주의가 고양되어 혼란에 말려들었다. 발칸으로의 진출은 범슬라브주의와 대립되었고, 1914년 사라예보사건을 계기로 제1차세계대전에 돌입했다.

제1·2차세계대전과 전후(戰後)
제1차세계대전으로 제국은 해체되고 1918년 사회민주당 주도로 공화국이 성립되어, 국민의회 결의에도 <독일계 오스트리아는 독일공화국의 한 구성요소>라고 명기되었으나 이 합병은 전승국들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특히, 산업이 앞선 보헤미아의 상실, 전후 경제혼란과 1929년 대공황에 따라 그리스도교사회당이 대두하였다. 1932년 C.E. 돌푸스내각은 사회공산당과 더불어 합병을 주장하는 나치스를 탄압했다. 독일민족주의자들은 나치스에 가담해 1938년 독일-오스트리아합방을 단행하고, 1939년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나치스 독일이 패배하는 가운데, 1945년 3월 빈에 소련군이 진주하였고, 전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 점령 아래 마셜플랜을 받아들였으며, 4개국회의를 거쳐 1955년 오스트리아국가조약으로 자유영세중립국으로 주권이 회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외교
입헌제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연방공화국으로서 3권분립을 견지하고 있으며 헌법은 1920년 제정되었다.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국가를 대표하며, 총리를 임명하고, 총리의 제청으로 국무위원을 임명하며, 국민의회의 소집·해산권을 가진다. 3선 이상은 금지되어 있고, 헌법재판소의 탄핵을 받으면 국민투표에 의해 파면될 수도 있다. 국회는 양원제로서 국민의회(하원)와 연방의회(상원)로 구성된다. 국민의회는 임기 4년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비례대표제에 의해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정원 183명이며 1986년 총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제1당의 자리를 유지하였고 K. 발트하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7년 1월 사민당·인민당의 연립내각이 이루어졌다. 인민당은 제2차세계대전 전의 가톨릭적 보수당의 노선을 따르고 있으며 사민당은 사회민주노동자당의 후신으로 각기 1945년 결성된 이래 의회의 주요 세력으로 국정을 안정·발전시켜 왔다. 인민당의 토마스 클레스틸이 1992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 1998년 4월 대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하였다. 대독일주의를 제창하는 자유당 등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으나 대다수 국민은 중도노선을 취하여 왔다.

1999년 10월 총선에서 자유당이 급부상, 2000년 2월 극우파 자유당과 보수파 인민당의 연립정부가 국내외 비난에도 불구하고 정식 출범하였다. 새 내각 총리로 W. 쉬셀 인민당 당수가 취임했다. 최근 환경문제가 대두되면서 녹색당의 활동이 눈에 띄고 있다. 1999년 선거결과 사회민주당 65석, 인민당 52석, 자유당 52석, 녹색당 14석을 차지했다. 연방의회 의원은 빈과 8개 주에서 인구수에 비례하여 각 지방의회가 간접선거로 선출하며, 정원 64명이다. 국민의회와 연방의회 모두 법안제출권이 있고, 법안은 양원을 모두 통과해야 하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국민의회에 우선권이 있다. 선전포고 등 중대안건의 결정에는 양원 의원으로 구성되는 연방회의가 소집된다. 헌법 개정은 국민투표에 의한다.

내각은 총리·부총리 외에 대통령의 임명을 받은 국무위원으로 구성된다. 국민에게는 기본권과 자유의 권리가 있다. 그 기초는 1867년 <국가기본법>에 근거하고 있으며, 1948년 제2공화국시대에 입법화되었다. 성(性)·출생·인종·언어·신분·계급·신앙 등의 차별은 인정되지 않으며 언론·집회·결사는 법률 내에서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 각주와 빈은 역사적으로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서, 주민이 선출한 주의회가 있고 의회가 선출한 주의 장관이 행정을 집행한다.

사법권은 연방에 속해 있고, 4단계로 나뉜 보통재판소가 설치되어 있다. 그 밖에 헌법재판소와 행정재판소가 있어 위헌심사와 행정권 감독을 담당하고 있다. 외교의 기본방침은 모든 나라와의 평화적 공존을 추구하는 영세중립을 표방하고 있다. 1955년 5월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체결된 <오스트리아국가조약>으로 주권·독립을 회복하면서, 독일과의 합방과 나치즘 및 군국주의를 금지하고 인권을 존중할 것을 서약하였다. 국민의회는 1955년 10월 26일 <영세중립에 관한 법률>을 채택, <스스로의 의지로 영세중립을 지키고 어떠한 군사동맹에도 가입하지 않으며 또한 영내에 외국군의 기지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에 의거하여 정부 및 국민은 동·서의 인접국과 우호를 증진하고, 국제연합(UN)의 임무에 협력하고 있다. UN사무총장으로 발트하임이 취임하기도 하여 사무국에 요원을 보내거나 UN군에 감시단이나 구호반을 파견하는 등 분쟁해결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빈은 동·서 수뇌회담이나 각종 국제회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원자력기구(IAEA)·국제연합공업개발기구(UNIDO) 등의 본부가 있어서 1979년 국제센터를 건설하려는 도시계획이 수립되었다. 이같은 선린외교를 추진하고는 있으나 남티롤지방은 이탈리아와의 분쟁지역이다. 제1차세계대전 뒤인 1919년 이 지역은 이탈리아에 할양되었으나, 주민의 90%를 차지하는 오스트리아인에 대한 탄압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의 원인이 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뒤에는 독일어가 공용어로 되고 자치권이 부여되었으나 아직 이탈리아령으로 남아 있어, 분쟁은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군사
국가의 방위와 안전을 위하여 오스트리아연방군이 조직되어 있다. 군대의 최고지휘권은 대통령에게 있지만 실제적인 지휘는 국방장관이 한다. 국민개병제도로서 17세 이상 61세 미만의 남자는 병역의무가 있어 7개월간의 복무 뒤에는 60일간의 훈련에 참가해야 한다. 양심상 이유에 의해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비군사적 근무에 복무할 수 있도록 <병역대체복무법>이 제정되어 있다. 총병력은 육군 3만 4600명, 공군 6500명(2001)을 보유하고 있다. 국방비 지출액은 1985년 19억 1300만 달러(GDP의 1.2%)에서 2000년 16억 900만 달러(GDP의 0.8%)로 낮아졌다.

오스트리아의 경제·산업
제2차세계대전으로 산업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전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한 분할점령과, 특히 소련의 생산시설 반출, 동·서진영의 대립 등으로 부흥이 늦어졌다. 1949년 마셜플랜에 의한 유럽부흥기금을 받아, 1955년 완전독립을 이룩한 뒤에는 경제가 급속히 회복되어 1950년대에는 연평균 6%에 이르는 경제성장률을 이루었다.

이후 계속된 경제성장으로 2002년에는 국내총생산 2277억 달러, 1인당 국내총생산 2만 7900달러를 기록했다. 그 원동력은 옛 독일제국 자산의 반환에 따른 공업의 국유화와 기술혁신, 수출증대 등이었으며 그것을 뒷받침한 것은 국내의 자원과 에너지의 공급, 안정된 정치, 사회조건 등이었다.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를 취하는 한편, 기간산업은 국유화되고 있다. 국영기업은 철강, 비철금속, 기계·조선 및 전기, 석유·화학, 석탄의 6분야로 되어 있고, 오스트리아산업관리주식회사(ÖIAG)가 관리한다. 국영공업종사자는 11만 5000명, 매출액 1200억 실링이며 32%가 수출되었다(1978).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제조업은 비율은 전체 산업에서 25.7%를 나타냈으며, 농업 3.5%, 3차산업 70.9%를 나타내었다(2004). 산업별 인구 구성에서는 2001년 현재 1차산업 4%, 2차산업 29%, 3차산업 67%를 나타내고 있다. 2004년 경제활동인구는 총 342만 5000명이었고, 2004년 실업률은 4.4%를 나타내었다.

농림업
주요 생산물은 사탕무·감자·옥수수·보리·밀 등이다. 야채로는 양배추 등이 있으며 과일로는 포도·사과·배 등이 생산된다. 포도는 주로 동부의 구릉경사면에서 재배되어 백포도주로 양조된다. 가축으로는 소·돼지·닭이 많다. 서부산지에서는 한때 알름(Alm;여름철의 고원목장)에서 소를 이목(移牧)하여 사육하고, 일부는 여기에서 채유하여 직접 치즈를 생산하기도 했다. 도로사정이 좋아지고 교통이 편리해짐에 따라 품이 많이 드는 산에서의 치즈생산은 줄어들었고 산기슭 공장으로 우유가 운반되어 가공되고 있다. 사료작물의 생산성도 향상되어 방목(放牧)이 쇠퇴하였고 산간마을에서는 관광업이 번창하게 되었다.

국토의 39%에 해당되는 328만 ㏊가 임야이며, 임업은 높은생산액을 올리는 중요한 산업이다. 보안림을 제외한 317만㏊가 벌채·제재의 대상이 되어, 각주에서 임업이 성하다. 그 가운데서도 슈타이어마르크주(45%)·케른텐주·포어아를베르크주는 삼림면적 비율이 매우 높다. 삼림면적의 약 1/2이 농가 소유이고, 약 1/3이 대지주 소유, 나머지가 국·공유림이다. 삼림의 84%가 침엽수림으로 가문비나무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낙엽송·젓나무·북가시나무 등이다. 임산물은 땔감으로도 쓰이나 펄프와 제지공업의 원료로 중요하다.

광업·에너지
에너지자원의 2/3는 수입하고, 1/3은 자체생산하고 있다. 주요 수입에너지원은 석탄과 석유인데, 석유 14%와 천연가스 44%를 자급한다. 그리고 총에너지의 12%를 차지하는 수력자원으로 증가하는 에너지수요와 석유가격 상승을 완화시키고 있다. 유전과 천연가스 산출지는 모두 빈분지에 있으며, 개발되지 않은 자원도 확인되고 있다. 주요 발전소는 다뉴브·엔스·일·드라우·인 등 여러 하천에 건설되어 있다. 주로 산출되는 금속자원은 철광석 및 각종 자철광상을 비롯하여 납·아연·안티몬 등이고 비금속으로는 석고·활석·고령토·암염 등이다. 철강업원료로 약 360만t의 철광석이 매년 수입되고, 크롬광석·납광석·보크사이트 등도 수입하고 있다. 에르츠베르거 등지에서 채굴되는 철광석은 철분함유량 26%, 매장량 약 26억t이다.

공업
제조업 종사자 수는 전 산업 종사자의 29%(2001)이며, 제조업은 제철·기계·화학 등의 중공업과 요업·섬유·식품가공 등의 경공업이 활발하다. 중공업은 철광석·전력 등의 자원에 기초를 두고 석유·천연가스 등 원료의 일부를 수입, 제2차세계대전 뒤 국영화되어 발달했다. 국영공업은 1946년 7월 26일 연방법에 의해 발족, 1970년 ÖIAG에 이양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철강·석유·화학·전기·기계 등이 포함된다. 빈·린츠 등 동쪽의 주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국영대기업을 주로 하는 중화학공업에 비해 중·소규모의 경공업이 각지에서 발달하고 있어 국민생활과 관광에 도움을 주고 있다. 제분·제당·양조를 비롯하여 제빵·제과 등 식료품제조업은 빈 등 도시의 주변이나 교통요지에 입지하고 있다. 섬유공업은 대소비지인 빈 교외 노이슈타트에 면방공장이 입지해 있고, 서부 산기슭지대에는 여성 노동력에 의한 마방·직물·자수 등의 공장이 있다. 또, 의류공업은 빈·린츠·인스브루크 등지에 집중되어 있다.

상업·무역·금융
최근 제3차산업의 발달이 두드러진다. 특히 상업 및 서비스업은 전체 산업의 70.9%(2004)를 차지한다. 도·소매업은 도시에 모여 있고 대개는 영세한 규모이나, 1000명 이상의 종업원이 있는 기업도 있다. 무역총액은 수출 727억 800만 달러, 수입 718억 4000만 달러(2002)이다. 수입품목은 자동차·섬유제품 등이며, 수출품목은 자동차·전기제품·기계·철강 등이다. 세목별로 볼 때 수입이 많은 것은 과일·야채·커피·차·코코아 등의 식료품, 연사(撚絲)나 광석 등의 공업원료, 자동차, 의류 등이며, 섬유·의류·전기기계·철강부문은 수출이 많다. 무역상대국은 독일이 수출입 모두에서 가장 많고 이어 이탈리아·스위스·영국의 순이다.

관광업
음악과 역사의 도시 빈을 비롯하여 산악·호수의 경승지가 많고 세계적인 스키장이 있어서 관광객이 많이 찾아온다. 관광수입은 100억 달러(2000)를 상회한다. 주별로는 티롤이 전체의 약 33%를 차지하고 잘츠부르크·케른텐이 이를 뒤따른다. 여름이 겨울의 약 2배가 되는데 최근 겨울철 관광객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여름철 숙박인의 70%, 겨울철 숙박인의 50%가 외국인인데, 독일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유럽 각국 및 미국인이며 소수의 동유럽인들도 찾아온다. 케른텐주 호반이나 잘츠카머구트지방 등지에는 별장이 늘어나고 있고 전국 별장의 15%는 외국인 소유이다. 겨울철 관광객의 증가로 많은 외화수입을 올리고 있다. 특히 포어아를베르크주에서는 총 숙박의 45%가 겨울의 스키철에 이루어진다. 키츠뷔엘, 장크트안톤 등은 스키장으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의 사회
평균 인구밀도는 97.6명/㎢(2003)이지만, 인구분포는 지역차가 크다. 빈분지에서는 인구밀도가 1㎢에 200명에까지 이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부 산악지대는 주택이 드문드문 있고 겨울에는 눈이 많은 임업지·관광지이다. 출생률은 1971년 14.6%에서 1996년 1.08%로 떨어졌고 사망률은 13%에서 0.99%로 내려갔다. 그 결과 1996년 자연증가율이 -0.09%로 감소했다. 고령층의 비중이 크고 중간 연령층의 비중이 눈에 띄게 작은 방추형 연령구성에서 제2차세계대전의 상흔을 엿볼 수 있다.

독일문화와 로마가톨릭의 정신적 지주 위에 1920년에 이루어진 헌법에 의한 민주주의의 세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다. 그것은 서유럽사회가 지니고 있는 특색과 거의 같지만 사회복지·사회보장 등에서는 진보한 나라의 하나이다. 이같은 제도는 19세기 후반 제정시대에 시작되어 제1차세계대전 뒤의 변혁으로 진보하였다가 제2차세계대전 뒤에 마무리되었다. 노동관계에서는 노동기본법이 제정되어, 주 40시간 노동을 법제화한 데 따르는 임금, 유급휴가, 소년·여성의 노동 등이 법률로 규정되어 있다. 국민은 또 건강·재해·실업·연금의 각 보험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다. 신체장애자와 전쟁희생자에 대한 배려, 아동양육을 위한 가족수당 지급, 지방자치단체가 세운 연금생활자 숙소, 긴급아동보호소 설치, 보건위생센터, 병원, 온천요양소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국가의 보조를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회복지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1972년 연방보건환경보호부가 설치되었다.

교육제도는 6~15살까지 총 9년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그 뒤에는 중학교나 공과과정(工科過程)의 상급학교에 진학하며, 그 위에 2~4년의 직업학교·중급교원양성소가 있다. 또, 기초학교 4년에 이어 일반교육을 실시하는 중·고등학교 9년제가 설치되어 있다. 종합대학·단과대학은 이들 위에 있으나,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처럼 직업선택과 학습능력에 따라 교육은 복선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스포츠는 겨울철의 스키와 회원 20만이 넘는 축구가 가장 인기 있으며, 스키·스케이트·등산은 국민스포츠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주민의 98%가 독일계로,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어는 부르겐란트주에서, 슬로베니아어는 케른텐주 남부에서, 마자르어는 부르겐란트 및 빈에서, 체크어는 빈에서 각각 조금씩 사용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인은 게르만민족에 속하지만 빈이 유럽의 정치·문화의 중심도시였기 때문에 현재 독일 게르만민족들과는 다른 국제성과 낭만적 정서를 지니고 있다.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가톨릭교는 연중행사·풍속·습관에 뿌리박고 있다. 몸짓이나 예의범절, 인간관계에도 가톨릭적인 것이 남아 있으며, 지방풍속에는 보수성이 짙다. 로마가톨릭 신자가 전인구의 90%를 차지하며 프로테스탄트나 유대교 신자가 약간 있다.

음악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예술로서, 독일음악을 기초로 슬라브와 헝가리의 민속음악적 요소를 가미한 밝은 선율을 특징으로 한다. 빈을 중심으로 활동한 음악가로는 C.W. 글루크·하이든·W.A. 모차르트를 비롯해 L. 베토벤·F.P. 슈베르트·J. 브람스·G. 말러·A. 쇤베르크·A. 베베른 등 서양음악사의 대표적인 음악가들을 들 수 있다. 특히 빈왈츠를 완성시킨 J. 슈트라우스 2세의 곡은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빈국립오페라극장은 오페라 역사를 장식하는 수많은 무대를 탄생시켰다. 그것을 지탱한 것은 궁정과 귀족의 후원과 시민들의 참여였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1786 초연)》은 부르크극장에서 초연되었으나, 19세기 후반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창조적 연주를 보인 것은 말러·R. 슈트라우스 등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해서 파괴된 오페라극장은 2억 6500만 실링을 들여 재건하여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상연하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그 연주는 K. 뵘·H. 카라얀·힐베르트 등으로 계승되었다. 빈에는 수많은 음악학교가 있고 그 정점에 음악·연극아카데미가 있다. 여러 음악제·예술제 가운데서도 1920년 시작된 잘츠부르크예술제와 헤르부른축제가 유명하다. 새로 시작된 것으로는 브레겐츠예술제가 있는데, 호수 위에 무대를 꾸며 오페라나 발레를 상연하고 있다.

국토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각지에 로마시대의 유적이나 교회·수도원·왕궁·성채 등 역사적 기념물이 많아 박물관으로 이용되거나 순례지나 관광지로 되어 있다. 건축양식으로는 로마네스크·고딕·르네상스·바로크 등이 있다. 고딕건축의 대표적인 거물은 빈에 있는 성(聖) 슈테판대성당으로 1304년 건축되었는데, 제2차세계대전으로 피해를 입었으나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보수되었다. 바로크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는 빈 교외에 있는 쇤브룬궁전과 다뉴브강변 단구 위에 있는 멜크수도원이다. 잘츠부르크 구릉에 우뚝 솟아 있는 호엔잘츠부르크성은 11세기에 착공된 성채이다. 이러한 건축물과 함께 회화·조각·가구·조원(造園) 등의 예술·기예(技藝)가 발달하였고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근대미술 및 건축의 새로운 경향을 시도한 사람들도 나타났다. G. 클림트·E. 실레·O. 코코슈카 등의 현대화가들은 독특한 화면을 이루어내었다. 빈의 서민적 희극을 토대로 극작을 한 F. 그릴파르처, 오페라 《장미의 기사》 등을 슈트라우스와 합작한 H. 호프만슈탈을 비롯해 A. 슈니츨러·F. 카프카 등은 세기말과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학술 수준도 높아서, 평화상을 받은 2명은 별도로 치더라도 생리학·의학·물리학·화학·경제학에 걸쳐 14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유전학 G.J. 멘델, 심리학 S. 프로이트, 인류학 W. 슈미트, 지질학 E. 쥐스, 경제학 A. 멩거 등은 큰 공헌을 한 학자들이다. 빈대학을 비롯해 12개 종합·단과대학이 있으며, 6개 예술대학이 있다. 박사과정 수료자의 연구기관으로는 빈고등학술연구소(사회과학), 빈외교아카데미가 있다. 학술의 최고결집체는 1847년 창립된 오스트리아학사원과 1960년 창립된 루트비히볼츠만협회가 대표적이다. 또, 동·서 13개국이 국제기관으로 설립한 국제응용시스템연구기관 등 수많은 연구·정보센터가 있다.

오스트리아와 한국과의 관계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한국과는 1963년 5월, 북한과는 1974년 12월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한국과는 무역협정(1971)·사증면제협정(1979)·항공협정(1979)·2중과세방지협정(1985)·투자보장협정(1991)·과학기술협력협정(1995) 등을 체결하였으며, 2001년 대한수입 2억 2356만 달러, 대한수출 2억 8496만 달러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교민 327명, 체류자 1282명(2003)이다. 북한과는 민간무역협정(1960), 무역협정(1969), 무역 및 지불에 관한 협정(1978), 항공운수협정(1979) 등을 체결하였다.

연표
750 초기철기시대, 할슈타트문화(~BC 400)
150 켈트인, 노리쿰왕국 창건
BC 15 로마, 노리쿰을 속주로 삼음
AD 100 로마의 성채로 빈도보나 건설. 빈의 기원
435 훈족의 왕 아틸라의 지배(~453)
791 카를 1세 아바르족 정벌. 오스트마르크 설치(~796)
955 오토 1세, 마자르인 격퇴
962 신성로마제국 성립
976 오스트마르크를 변경백(邊境伯) 영지로 삼아 바벤베르크가에 봉토로 줌
1077 성직서임권 투쟁(~1122)
1156 황제 프르드리히 1세, 오스트리아를 세습공령으로 승격시킴
1192 오스트리아공령에 슈타이어마르크공령을 합병
1246 오스트리아 대공위시대(~73)
1251 보헤미아왕 오토카르 2세, 빈 점령
1273 합스부르크백작 루돌프 1세, 독일황제로 선출됨
1278 루돌프 1세, 오토카르 2세를 패사시킴
1282 루돌프 1세, 아들들에게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를 다스리게 함.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 지배가 시작됨
1291 스위스독립전쟁 시작됨
1356 룩셈부르크가 황제 카를 4세, 금인칙서(金印勅書) 내림
1438 합스부르크가 알브레히트 2세, 황제가 됨
1477 합스부르크가 막시밀리안 1세, 부르군트 공주와 결혼
1496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필립, 에스파냐왕녀와 결혼
1515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페르디난트 1세, 보헤미아-헝가리왕녀인 안나와 결혼
1519 황제 카를 5세(~56), 합스부르크제국 실현
1521 합스부르크가, 에스파냐계와 오스트리아계로 분립
1526 모하치 싸움에서 보헤미아-헝가리왕 라요시 2세 패사.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헝가리 두 왕국 상속
1529 오스만투르크(제국), 제1차 빈 포위
1555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和議)
1556 페르디난트 1세, 황제 등극
1618 30년 전쟁(~48)
1667 루이 14세 침략전쟁(67~68 플랑드르, 72~78 네덜란드, 88~97 프팔츠)
1683 오스만투르크(제국), 제2차 빈 포위
1699 카를로바츠 화약(和約), 오스트리아·헝가리 전토 확보
1701 에스파냐계승전쟁(~14)
1713 카를6세,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 제정
1740 마리아 테레지아 즉위, 오스트리아계승전쟁(~48)
1756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동맹에 성공. 7년 전쟁(~63)
1781 요제프 2세, 농노제폐지령과 관용령 발표
1789 프랑스혁명 일어남
1804 나폴레옹, 황제에 추대됨. 프란츠 1세, 오스트리아황제가 됨
1806 독일 황제 프란츠 2세, 신성로마제국 붕괴 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남
1810 나폴레옹, 합스부르크가 마리아 루이자와 결혼
1814 빈회의(~15). 그뒤로 K.W.N.L 메테르니히 반동체제 이어짐
1848 프랑스 2월 혁명. 독일·오스트리아 3월 혁명
1851 반혁명 승리로 신절대주의 바흐체제 출범
1859 이탈리아통일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패전
1860 10월칙서
1861 2월헌법
1866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참패
1867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제국 성립
1871 포로이센-프랑스전쟁 끝남. 독일제국 성립
1879 독일-오스트리아동맹, 82년 이탈리아를 가입시켜 3국동맹 성립
1888 오스트리아사회민주당 결성
1891 러시아-프랑스 동맹
1904 영국-프랑스협상
1907 보통선거제 실지
1909 영국-러시아협상, 그 뒤 3국협상 결성됨. 오스트리아사회민주당에서 체코슬로바키아사회민주당 분당
1914 사라예보사건, 제1차세계대전 일어남(~18)
1918 합스부르크가 황제 카를 1세 퇴위. 오스트리아공화국 성립
1919 생 제르맹조약에 따라 합스부르크제국 해체
1932 기독교사회당 C.E. 돌푸스내각 성립
1938 독일-오스트리아 합방
1939 제2차세계대전 일어남(~45)
1945 소련군, 빈 점령. 4개국점령시대 이어짐
1955 오스트리아국가조약 조인. 영세중립국으로 주권회복
1972 유럽공동체(EC)와의 자유무역협정 조인
1983 총선거에서 사회당 단독과반수 얻음
1986 사회당 K. 발트하임내각 성립.
1989 EC 가입
1992 T. 클레스틸 대통령 취임
1995 EU 가입
1998 T. 클레스틸 대통령 재선
2000 극우파 자유당과 보수파 인민당 연립정부 공식 출범
Posted by landar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