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대로에 위치한 카락성은 전략적인 요충지역이다. 993m의 해발과 협곡 사이에 위치해 있다.

  성은 십자군 성과 유럽,비잔틴,아랍 식의 혼합된 건축물의 주목할 만한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아라비아늬 로렌스'의 로렌스는 1909년 학술여행을 하면서 이성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 여러 날 머물면서 터널과 지하 감옥을 탐험하고 성의 모습을 그림에 담기도 했다.

  성의 정상으로 올라 가면 사해와 왕의 대로를 비롯한 멋진 정경을 조망할 수 있다.

 

 

 

 

 

 

 

 

 

 

 

 

 

 

 

 

 

 

 

 

 

 

 

 

 

 

 

 

 

 

 

 

 

 

 

 

 

 

 

 

 

 

 

 

 

 

 

 

 

 

 

 

 

 

 

 

 

 

 

 

 

 

 

암만 호텔 입구의 바리케이트

주차장 출구쪽으로 진입은 절대로 할 수 없을 것 같다.

아직도 중동의 살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베스트

 

http://landart.tistory.com/880

Posted by landart
,

 

 

 

와디 럼 [ Wadi Rum ]

요약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남쪽으로 320km지점에 위치한 사막지대이며 곳곳에 거대한 바위산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2011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와디(Wadi)는 아랍어로서 비가 오는 겨울에는 강이 되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 우기에는 마른 계곡이나 땅이 되어 버리는 곳을 말한다. 와디 럼(Wadi Rum)은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에서 남쪽으로 320km지점에 위치한 곳인데 1998년에는 요르단 정부에 의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총 720평방km의 넓은 지역이며 약 3억 년전 지각 작용으로 이루어진 곳이며 아래층에 화강암층이 있고 그 위에 석회암 그리고 가장 상부에 사암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745m의 럼 마운틴(Rum mountain)이며 평지로 보이는 곳도 해발 1000m정도이다. 와디 럼은 오래전부터 아라비아 상인들의 교역로 역할을 하였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올라 오는 카라반(대상)들이 시리아레바논이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였고 당시에 이들이 남겨 놓은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뿐 아니라 선사시대에도 유목민들이 이곳을 통과하면서 남겨 놓은 암벽화 등을 여기 저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와디 럼은 1916년부터 아랍 지역에서 활동했던 아라비아의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가 이곳을 통과하여 요르단 최 남단의 아카바 항구를 점령하는 장명이 나오는 아라비아 로렌스 영화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와디 럼을 찾는 여행객들에게는 트레킹이나 암벽 등반 또는 낙타나 자동차를 이용한 사막투어 등을 즐길 수 있고 베두윈 텐트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베두윈식의 식사와 밸리 댄스 및 아랍전통 음악 연주와 노래도 즐길 수 있다. 트레킹이나 암벽등반의 경우는 반드시 현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행동해야 안전하다. 이 지역은 자연 보호구역일 뿐 아니라 베두윈들이 생활을 하고 있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와디 럼을 찾는 한국관광객들은 일반적으로 2시간 코스의 짚 투어를 즐기는데 6명이 탈 수 있으며 3곳을 정차한다. 처음 정차하는 곳은 로렌스가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는 산 중턱에 있는 로렌스의 샘이며 현재도 물이 나오고 있다. 그 아래 평지에는 선사시대 유목민들이나 카라반들이 남겨 놓았다는 암벽화(사실은 기호나 글자)가 있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두번째 정차하는 장소는 알가잘리로 알려져 있는 계곡인데 일반인들은 계곡입구에서 100여미터 정도를 들어 갈 수 있다. 들어 가는 좌우 바위벽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려 놓은 암벽화가 여기 저기 있으며 계곡안쪽에는 위에서 떨어지는 물에 의해 파여진 바위로 만들어진 웅덩이들이 있어 오랜세월동안 흘러내린 물의 위력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차하는 곳은 알가잘리 계곡에서 그리 멀지 않아 보이는 곳에 위치한 모래 언덕이다. 이 곳은 멀리서 또는 바로 밑에 가서 보더라도 별로 높아 보이지 않지만 모래언덕이기 때문에 오르기는 상당히 힘들다. 특히 봄, 여름, 가을철에는 오전 10시만 되어도 모래가 달구어져 맨발로 올라가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뜨겁고 화상을 입을 위험도 있다. 반면에 겨울에는 너무 차가워서 맨발로 올라 가는 것이 곤란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와디 럼 [Wadi Rum] (두산백과)

 

 

 

 

 

 

아라비아의 로렌스 [ Lawrence of Arabia ]

요약
아랍 민족운동의 원조자인 영국군 장교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일생을 그린 작품.
  • 제작년도

    1962년

  • 감독

    데이비드 린(David Lean)

  • 각본

    로버트 볼트(Robert Bolt)

  • 출연

    피터 오툴(Peter O'Toole), 알렉 기네스(Alec Guinness), 클라우드 레인 (Claude Rains), 앤터니 퀸(Anthony Quinn)

  • 상영시간

    216분

  • 제작사

    미국 컬럼비아 영화사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8년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영국과 터키가 대치하고 있을 때 영국은 아랍의 참전 및 지원을 요구하기 위해 정보국 소속의 로렌스(피터 오툴)를 아랍에 파견한다.

로렌스는 자국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아랍 지도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싸워 분열된 아랍군을 통합하고 드디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여 아랍 민족으로부터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웅적인 칭호를 받게 된다. 그런데 아랍 민족의 독립을 논의할 시점이 서서히 다가오자 열강국들은 아랍의 분할통치 음모를 기도한다.

이에 로렌스는 영국에 항의하고 아랍 민족에게도 단결을 호소하지만 소용없다. 영국의 소환 명령을 받고 런던으로 돌아가지만 중동으로 다시 보내줄 것을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중동 문제는 이미 정치적으로 타결된 이후이므로 로렌스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드디어 로렌스는 오토바이를 광적으로 몰다 교통사고로 죽는다.

주인공 로렌스는 열강국 출신답지 않게 약소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낭만적인 직업 군인이라고 볼 수 있고, 사막에서 아랍 낙오병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은 아랑곳하지 않는 면이 있지만 적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영화사상 '생각하는 인간 서사시'라고 평가받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70mm 화면에 담은 광활한 사막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모리스 자르와 런던 필하모니 교향악단이 연주한 음악은 고독한 영웅 로렌스의 심정과 유목민의 변화무상한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로렌스 역을 맡은 피터 오툴은 비록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지 못했지만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1963년 제3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촬영, 편집, 미술, 음악, 녹음 등 7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라비아의 로렌스 [Lawrence of Arabia] (두산백과)

 

오아시스-로렌스의 샘

 

 

 

 

 

 

 

와디 럼 보호구역 [ Wadi Rum Protected Area ]

요약
자연 및 문화 복합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이 74,000㏊인 이 유산은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 접경의 요르단(Jordan) 남부에 있다.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는 좁은 협곡(gorge), 자연적으로 생긴 아치형 지형, 우뚝 솟아오른 절벽, 비탈면, 대규모 경사면 붕괴(landslide), 동굴 등 다양한 사막 경관을 보여 준다. 암각화(Petroglyph)와 비문(inscription) 그리고 여러 고고학적 유산들은 약 12,000년 동안 인간이 이곳에서 거주하며 자연 환경과 상호 작용하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20,000여 점에 이르는 비문과 25,000여 점의 암각화를 통해 인류 사상의 진화와 초기 문자의 발전을 짐작할 수 있다. 유산은 이 지역의 목축, 농경, 도시 활동의 발전 과정을 뚜렷이 보여 준다.
  • 국가

    요르단(Jordan)

  • 좌표

    N29 38 23, E35 26 2

  • 등재연도

    2011년

  • 등재기준

    (ⅲ), (ⅴ), (ⅶ) *참고: 세계유산 등재기준

  • 유산면적

    74,180㏊

  • 완충지역

    59,177㏊

탁월한 보편적 가치

와디 럼 보호구역(Wadi Rum Protected Area, WRPA)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과 가까운 요르단 남부에 있다. 위치상으로 암만(Amman)에서 약 290㎞ 남쪽, 해안 도시 아카바(Aqaba)에서 약 60㎞ 정도 북동쪽에 해당하는 와디 럼 보호구역은 총면적이 74,200㏊에 달한다. 유산의 범위는 남북으로 약 42㎞, 동서로 약 33㎞ 지점까지 펼쳐져 있다. 일부 제외된 지역을 포함하여 너비 약 5㎞, 총면적 60,000㏊의 완충지역이 유산을 둘러싸고 있다.

와디 럼은 요르단 지구대(地溝帶, Rift Valley) 동쪽, 중앙 요르단 고원의 가파른 경사면 남쪽에 있는 힘사(Hisma) 사막 안쪽의 주요 특징을 나타낸다. 이곳의 자연적 가치는 대륙성 사암(sandstone) 지대에 발달한 사막 지형을 포함하고 있다. 수백만 년 동안 계속된 풍경의 진화를 나타내는 이 지형은 암석의 구조와 급격한 융기, 수많은 단층(fault)과 절리(joint)를 포함한 지각 활동, 그리고 과거의 습윤 기후(humid climate)를 비롯하여 사막 기후와 연관된 풍화 작용(weathering)과 침식 작용(erosion)을 포함한 지형 형성 과정 등과 같이 복합적이고 다양한 지배적 요인의 영향 아래 발전했다.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는 암각화와 비문 그리고 여러 고고학적 유산들은 약 12,000년 전에 인간이 이곳에 거주하며 자연 환경과 상호 작용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이 유산은 아라비아 반도(Arabian Peninsula)와 이 지역에서 발전한 목축, 농경, 도시 활동의 모습을 보여 준다.

완전성

이 유산은 중요한 문화적·자연적 특성들을 갖추고 있으며 훌륭하게 설계되어 있다. 인구 밀도가 낮고 개발로 인한 영향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와디 럼 보호구역은 상대적으로 훼손되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문객들과 차량 통행이 미치는 영향들, 그리고 럼 마을의 잠식, 지역 주민들에 의한 지하수 개발과 땔감 채집 등 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위협 요소들이 많다. 유산의 경계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으며, 유산을 둘러싸고 있는 5㎞ 너비의 완충지역은 유산 경계의 외부에서 발생하는 위협들에 대처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진정성

암면 미술(rock art)은 비바람에 의해 침식되는 풍화 작용으로 인해 일부 구별하기 힘든 것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변경되지 않고 처음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일부 암면 미술의 경우에는 현대적인 낙서(modern graffiti)들이 추가되었지만, 아주 많은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문화적 전통을 전달하는 당시 사람들의 능력을 파악하고 충분히 연구할 수 있다.

보존 및 관리체계

와디 럼 보호구역은 사막 지형과 생태계 및 문화적 가치가 있는 관련 유적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1997년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유산은 아카바특별경제구역(Aqaba Special Economic Zone, ASEZA) 내에 있으며, 두 단계에 걸쳐 영구적인 특별규제지역(Special Regulations Area)으로 지정되었다. 1997년에 54,000㏊가 영구적인 특별규제지역으로 지정되었고 2002년에 18,000㏊가 추가로 지정되었다.

요르단 내 보호구역에 대해 관리 체제가 강력한 특별규제지역에는 유산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와디 럼 보호구역(WRPA) 관리 및 개발에 대해 지침을 제공하는 주요 계획은, 아카바 전체 관리 방침을 규정한 아카바 특별경제구역(ASEZA) 토지 이용 계획이다. 유산은 유지 보수 작업이 필요하며, 지속적으로 갱신함으로써 관리 계획을 효과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등재기준

기준 (ⅲ) : 와디 럼 보호구역은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암각화와 비문의 특별한 증거를 간직하고 있다. 20,000여 점의 비문과 25,000여 점의 암각화가 혼재한다는 점, 그리고 적어도 12,000년 동안 그것이 지속되었다는 점으로 인해, 와디 럼은 다른 암각화나 비문 유적들보다 특별하다. 인간과 동물을 표현한 암각화는 둥근 바위나 절벽에 새겨져 있다. 이것으로 인류의 사상과 아라비아 반도에서 행해졌던 목축, 농경, 도시 활동 유형들 및 온대 습윤 기후에서 반건조(semi-arid) 기후로 변화된 이 지역의 독특한 환경사(環境史, environmental history)의 발전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암각화는 정교한 미적 감각과 회화적 문화를 보여 주고 있다. 북아라비아의 서로 다른 네 가지 문자로 된 수많은 비문들을 보면 알파벳(alphabet)이 초기에 표현 양식으로 등장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목축 사회에 널리 퍼진 문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준 (ⅴ) : 와디 럼의 다양한 지형은 인간의 정착을 촉진했으며, 많은 암각화와 비문에 기록된 바와 같은 복잡한 지적 활동 발전에 핵심적인 요소였다. 수천 년 동안의 다양한 문화적 전통과 문명을 보여 주는 이 생생한 증거(암각화와 비문)는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기록 유산 중 하나이다. 청동기 시대(Bronze Age)에 기후가 건조해진 이후,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희소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인간의 적응 능력과 창의력을 보여 주는 이 유산은 사막 지형에서의 정착 생활과 이동 생활의 연속적 형태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이처럼 풍부한 정보를 간직한 자료는 세계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기준 (ⅶ) : 상징적인 사막 경관으로 전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와디 럼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산과 계곡, 자연적으로 생긴 아치형 지형, 좁은 협곡, 우뚝 솟아오른 절벽, 대규모 경사면 붕괴, 동굴 등 극적인 풍화 형태가 나타내는 장엄한 풍경으로 유명하다. 다양한 지형과 거대한 규모를 비롯하여 모자이크와 같은 색채, 좁은 협곡과 거대한 와디에서 볼 수 있는 멋진 전망, 거대한 규모의 절벽 등이 유산에 미적 가치를 더해 주는 핵심 요소들이다.

유산은 장엄한 벌집 모양의 풍화 지형을 비롯하여 물이 흐르면서 만들어진 지형, 염분과 생물학적 과정 및 기타 과정에 의해 심하게 풍화된 지형, 그리고 이 풍화 작용에 의해 침식된 가파른 사암 절벽 등이 한곳에 모여 독특한 경관을 보여 준다. 유산 지정 시 강조되었던 토머스 에드워드 로런스(T.E. Lawrence, 영국 고고학자) 작품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더욱 확실한 입지를 갖게 되었으며, 아랍 국가들 내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전형적인 사막 경관으로 명성을 높이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와디 럼 보호구역 [Wadi Rum Protected Area] (유네스코, 유네스코한국위원회(번역 감수))

 

 

 

 

 

 

 

 

 

 

 

 

 

 

알가잘리

 

 

 

 

 

 

 

 

 

 

 

 

 

 

 

 

 

 

 

 

 

 

 

 

 

 

 

 

 

 

 

 

 

 

 

 

 

 

 

 

 

 

 

 

 

 

 

 

 

 

 

 

 

 

 

 

베스트

 

http://landart.tistory.com/878

 

Posted by landart
,

 

 

여행사 프로그램으로는 온종일 페트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나름 큰 특징이었다.

그것도 간밤과 오늘밤의 숙소가 버스로 10여분 거리이니.....

6km 정도를 엄청난 더위와 함께 주파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페트라 여한은 없다.

 

 

세계의 걷고 싶은 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80&contents_id=1399

 

 

 

 

 

 

 

 

 

 

 

대신전

 

 

 

 

 

 

 

 

 

 

 

 

 

 

 

 

 

 

 

 

 

 

여기가 끝이다

돌아서 나갔다.

 

 

 

 

 

 

 

로마 열주로

 

도대체 로마의 경계는 어디까지 일까?

그들의 흔적으로 먹고 사는 나라는 도대체 몇개국일 까?

인류 역사에 그들 이상의 강국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나오면서 다시 보는 알카즈네

낙타등과 대비해 보면 그 스케일을 짐작할 수 있다.

 

 

 

 

 

 

 

 

 

 

 

호텔 앞의 모세의 샘

모세가 이용했단다.

지금도 약수터(?)로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관리 상태는 많이 아쉬웠지만

물이 귀한 나라를 생각하면 신비스러웠다,

 

베스트샷

http://landart.tistory.com/874

Posted by landart
,

 

 

알 카즈네를 돌아 더 들어 섰다.

 

 

 

 

 

 

 

 

 

 

 

 

 

 

수박? 아주 작았지만 분명 수박이었다.

 

 

 

해태상...

 

 

 

 

 

 

 

 

 

 

 

 

 

 

 

 

 

 

 

 

 

 

 

 

 

 

 

 

 

 

 

 

 

 

 

우리는 계곡, 깊숙이 더 들어 갔다.

 

베스트 샷

http://landart.tistory.com/872

 

Posted by landart
,

 

 

우리가 묵었던 호텔

 

 

 

 

 

매표소

 

 

 

 

페트라 [ Petra ]

요약
요르단 남부에 있는 대상 도시유적.

페트라 시크

영국의 시인 존 윌리엄 버건이 '영원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라고 노래한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산악도시이다. 나바테아인은 BC 7세기부터 BC 2세기경까지 시리아와 아라비아반도 등지에서 활약한 아랍계 유목민이다. 이들은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붉은 사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에 도시를 건설하여 일세를 풍미했던 것이다.
 
암벽 속에서 꽃피운 나바테 문명
페트라는 이집트, 아라비아, 페니키아 등의 교차지점에 위치하여 선사시대부터 사막의 대상로를 지배하여 번영을 누렸던 캐러밴 도시이다.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않은 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다. 협소한 통로와 협곡으로 둘러싸인 바위산을 깎아 조성된 페트라의 건물들은 대부분 암벽을 파서 만들어졌다.

이곳은 기원전 1400~1200년 경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에 자리했으며, 구약에서는 '에돔의 셀라'라고 지칭하고 있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를 의미하고, 셀라는 히브리어로 '바위'를 뜻하니 페트라는 바위의 도시인 셈이다. 애급(埃及, 이집트)을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던 모세와 그 추종자들에게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유목생활을 하던 나바테아인이 BC 7세기 무렵 페트라를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나바테 문명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106년에는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땅을 빼앗겼다가, 하드리아누스가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하드리아누스의 페트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후 6세기경 발생한 지진에 의해 도시 전체가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잊혀진 도시, 120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내다
다마스쿠스에서 카이로로 향하는 탐험 도중 젊은 탐험가 부르크하르트는 페트라에 엄청난 유적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듣고 아랍인으로 변장한 후 이곳을 찾아 나선다. 1812년 그는 잊혀진 도시를 발견하였고, 이후 그의 여행기를 통해 페트라를 유럽에 알렸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이곳은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트라 [Petra] (두산백과)

 

 

 

 

 

페트라 시크 입구

 

 

 

 

 

 

 

 

 

 

 

 

 

 

 

 

 

 

 

 

 

 

 

 

 

 

 

 

 

 

 

 

 

 

 

 

 

알카즈네

Al Khazneh

요약

요르단 페트라에 있는 고대 신전 유적.
 

길이1.2km에 이르는 좁은 ‘시크(Siq, 협곡)’가 끝나는 지점에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BC 1세기 무렵에 건설한 나바테아(Nabatea) 왕, 아레타스 3세(Aretas Ⅲ)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높이 43m, 너비 약 30m 규모의 2층 신전 형태의 건축물이다.

1층 부분은 6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1층 중앙 기둥 좌우에는 제우스 신의 쌍둥이 아들인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 기마상을 새겨놓았다. 맨 위쪽에는 파손된 채로 있는 독수리상 2개가 있고 2층 중앙의 원형으로 만든 톨로스(tholos)에는 ‘알-우자(Al-Uzza, 풍요의 여신)’가 조각되어 있다. 이 거대한 기둥들과 다양하고 정교한 조각 장식들은 따로 만들어 세운 것이 아니라 사암 절벽을 파고 다듬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사각 모양의 방이 있고 그 안쪽으로는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뚫려 있다.

‘카즈네(Khazneh, 베두인어로 보물창고라는 뜻)’란 명칭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곳에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전설이 사막 유목민인 베두인족들에게 전해져 비롯되었다고 한다. 알카즈네로 가는 길에는 페트라 시티 센터(Petra City Center)와 알 데이르(Al-Deir)수도원 등의 유적지들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카즈네 (두산백과)

 

 

 

 

 

 

 

 

 

 

 

 

 

 

 

 

 

 

 

 

 

 

 

 

보통 페키지 여행은 여기까지.

우리는 한참을 쉬고..

더 깊숙이 들어 간다.

 

베스트 샷

http://landart.tistory.com/868

 

 

Posted by landart
,

 

 

 

 교황청이 지정한 요르단 내 5대 기독교 성지

 

· 모세가 죽은 느보산(Mt. Nebo): 암만 남쪽 20km 마다바 근처에 소재

· 예수가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받은 베다니(Bethany): 암만 남쪽 30km 사해 입구 근처 소재

· 세례요한의 순교지 마케루스궁터(Macherus 또는 Mukawir): 암만 남쪽 40km 지점(마다바에서 20km)

· 선지자 엘리야의 고향(Tel Eliyas): 암만 북쪽 50km 지점(제라쉬에서 20km)

· 성모마리아의 성소를 모신 안자라교회(Anzara Church): 암만 북쪽 40km(아줄룬 근처)

[네이버 지식백과] 요르단의 주요 명소 (요르단 개황, 2007.1, 외교부)

 

 

 

느보산 [ Nebo Mt. ]

요약
요르단왕국 마다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10km 지점에 있는 산.
위치

요르단왕국 마다바 읍의 북서쪽

  • 높이

    835m

구약성서에 따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지 40년 만에 이 산에 당도하여 가나안 땅을 바라본 다음 거기서 120세로 죽었다(민수 27:12~14, 신명 32:48~52, 34:1~8)고 한다. 이 산은 3개의 중요한 봉우리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높은 봉우리가 니바(Ras al-Niba)로 높이 835m이고, 두 번째 높은 봉우리는 높이 790m 무카야트(Khirbetel-Mukhayyat),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는 높이 710m의 시야가(Ras Siyagha)이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다는 비스가 봉우리는 이 산의 세 번째 봉우리인 시야가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실제로 시야가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에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사해(死海)와 그 서북면에 위치한 초기 예수 시대의 유대교 수도원 유적지 쿰란동굴, 오아시스 도시 예리고와 요르단강, 요르단강과 예루살렘 사이의 유대사막, 그리고 예루살렘의 동부 구릉에 있는 올리브산 꼭대기 등을 훤히 바라다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시야가 봉우리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프란체스코회(프란치스코) 성서연구소에서는 1933년부터 1976년에 걸쳐 시야가를 발굴, 많은 건축물을 발굴해냈다. 모세의 죽음을 기념하여 4세기에 세운 소성당과 제의방과 세례당, 장례당을 두루 갖춘 대성당이 발굴되었다. 이 대성당은 5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제의방에서는 시골 풍경과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모자이크가 발굴되었다. 이 모자이크는 531년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함께 발견되었다.

한편, 구약성서에 따르면, 모세가 느보산에서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기만 하고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유에 대해 두 가지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 그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반도에서 야훼께 반역한 죄 때문이라고 한다(신명 1:37, 4:2). 다른 하나는 모세가 시나이반도 씬 광야 카데스에서 하느님의 명을 어긴 죄 때문에 가나안 땅을 밟을 수 없었다고 한다. 즉,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백성을 불러모은 뒤 바위를 향해 물을 내라고 명령하라고 했는데, 모세는 이를 따르지 않고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내리쳤다고 한다(민수 20:1~13). 이 불충으로 모세는 느보산에서 임종하였다고 한다(민수 27:12~14, 신명 32:48~52, 34:1~8).

[네이버 지식백과] 느보산 [Nebo Mt.] (두산백과)

 

 

모세 [ Mose(s) ]

요약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이자 민족적 영웅이다. 호렙산에서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음성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와 파라오와 싸워 이겨서 히브리 민족의 해방을 이룩하였다.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 40여 년 간 광야를 유랑하지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그 내용이 모세와 관련되는 바가 많아 ‘모세 오경(五經)’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출애굽기》 《민수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레위기》 《신명기》의 율법(律法)은 ‘모세의 율법’이라 일컬어진다.

최근의 고고학적·금석문학적(金石文學的) 연구 결과 성서에 기술된 이집트 입국, 이집트 탈출, 야훼 종교의 채용, 가나안 정복 등은 그 대체적인 줄거리가 역사적 사실에 아주 가까운 것으로 인정되어, 이 역사적 사실의 중심인물로서의 모세의 실재성이 매우 높아졌다. 상당수의 학자들이 모세라는 인물을 람세스 2세 시대인 기원전 13세기경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이자 민족 영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모세가 활동한 정확한 시기나 그와 관련된 일들을 완전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은 강제로 노역에 동원되는 등 파라오의 박해를 받았다. 이스라엘 레위족 집안에서 태어난 모세는, 이스라엘의 사내 아이는 태어나는 즉시 모두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을 피하여 나일강에 버려졌는데, 다행히 파라오의 딸에게 구출되어 왕궁에서 양육되었다. 그는 40세 때 동포가 몹시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유목민 미디안족(族)의 사제(司祭) 이드로(르의엘)의 딸 시뽀라를 아내로 맞아 게르솜과 엘리에젤이라는 두 아들을 얻었다.

80세 되던 해 호렙 산에서  신(神) 야훼에게서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음성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와, 형 아론의 협조를 얻어 파라오와 싸워 이겨서 히브리 민족의 해방을 이룩하였다. 이어 시나이산(山)에서 야훼한테서 십계명(十誡命)을 받고,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契約)의 중개자가 되었다(출애 20:1∼17, 신명 5:6∼21, 출애 34:14∼33).

그후 모세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에돔·모압의 광야에서 40년에 걸친 유랑생활을 계속하지만, 가나안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모세는 야훼의 명에 의하여 요르단강을 건너기 전 예리고 맞은 편 모압 땅의 느보산(山)에서 향년 120세에 죽었다(신명 33 ·34장).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인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세 [Mose(s)] (두산백과)

 

 

프란체스코회 [ Franciscan Order , ─會 ]

요약
1209년 아시시의 프란체스코(프란시스코)가 창립한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
구분

수도회

  • 설립일

    1209년

  • 설립목적

    그리스도의 사랑 전파

  • 주요활동/업무

    설교, 평화운동, 구라사업, 기타 자선사업

  • 소재지

    이탈리아

1209년에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에 의해 ‘작은 형제회’로 창설되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승인을 얻어 복음을 받들고, 특별히 청빈정신을 주창하며 편력설교(遍歷說敎)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탁발수도회로 출발했다. 프란체스코 자신은 자연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으며, 청빈을 부정적 금욕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환희로 돌려 수도생활의 이상을 실현했다.

창립 초기에는 프란체스코의 행동이 곧 회칙이 되었지만, 수도회가 발족한 지 10년 안에 회원수가 5,000명이 넘으면서 회칙을 제정하게 되었다. 1223년에 최종 확정된 회칙이 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승인을 얻었다. 수도회는 1세기 사이에 놀랄 만한 성장을 거듭하여 1300년 전후에는 회원이 3∼4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청빈’의 해석을 둘러싸고 내부 갈등이 생겼고, 그 결과 ‘엄격파’와 ‘온건파’, 그리고 ‘이완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짐으로써 분규가 계속되었다.

13세기 후반에 프란체스코회의 제2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보나벤투라(Bonaventura)가 총회장직을 맡으면서 수도회 영향력은 전 유럽에 미쳤으며, 시리아아프리카 등지에까지 선교사가 파견되었고, 파리와 옥스퍼드 등에 있는 수사들의 집을 기반으로 신학교가 세워졌다. 그러나 청빈의 실천을 두고 회칙엄수파와 온건파 사이의 갈등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교황 레오 13세 때인 1897년 양파가 통합되어 관구(管區)의 합병과 개편이 이루어졌다.

종래의 수도사가 주로 농촌을 그 기반으로 삼은 데 비해, 이 탁발수도회는 도시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전통적으로 설교·평화운동·구라사업(救癩事業) 및 기타 자선사업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또한 성탄절의 구유, 십사처(十四處), 삼종기도 등 가톨릭교회의 여러 의식을 정착시켰다. 보나벤투라, J.둔스스코투스(J.Duns Scotus), 윌리엄 오브 오컴(William of Ockham) 등 스콜라철학의 학자들을 배출했고, 해외선교를 통해 교육과 학문 분야에 많은 기여를 했다. 제2프란체스코회(클라라관상수녀회), 재속형제회(在俗兄弟會)인 제3프란체스코회가 있다.

한국에는 1937년 9월, 캐나다 관구 소속의 수사 두 사람이 파견되어 대전광역시 목동에 자리잡고 ‘작은형제회’를 설립함으로써 시작되었으나, 일제강점기6·25전쟁으로 폐쇄되었다가 1955년에 다시 입국했다. 1969년에 한국 준관구로 승격되었고, 1987년 12월에 한국 진출 50주년을 기념하여 총본부로부터 ‘한국 순교성인 관구’로 인가받았다.

한국의 작은형제회(프란체스코회)는 성소계발 및 본당사목 외에도 나환자복지·노인복지·빈민복지·재가복지 등 복지사업을 펼친다. 또한 카자흐스탄·일본·중국·러시아 등의 해외 선교사업도 활발히 하고 있으며, 본부에서는 수도자신학원과 프란체스코 사상연구회를 운영한다. 2000년 현재 전국에 17개 수도원이 운영되고 있으며, 본부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란체스코회 [Franciscan Order, ─會] (두산백과)

 

 

 

 

가나안 [ Canaan ]

요약

기원전 18세기 설형문자로 기록된 마리문서에 처음 등장하며 팔레스타인 서쪽 해안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며 또한 노아의 손자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요르단 서쪽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언어는 셈어족의 북서쪽 방언에 속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수메르어나 아카드어에 속한다는 견해도 있다. 가나안의 그리스 명칭은 페니키아이며 자주빛의 색을 의미한다. 그리스 사람들이 페니키아로 부른 것은 가나안지역에서 자주빛 염료의 생산지로 인식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또한 가나안은 상인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아마르나 문서(이집트의 고문서)에 따르면, BC 3000년 무렵 셈족이 가나안에 거주했고, BC 2200∼BC 2000년 이집트인이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였으며, BC 15세기에는 이집트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그 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가 혼란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BC 11세기에는 이집트 세력이 가나안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곧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와 지배하였다. 이 지역은 문명의 교차로로 자리잡고 있어 이집트 ·미케네 ·크레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으며, 주신 옐을 비롯하여 비와 풍요의 신 바알, 옐의 아내 아세라, 풍요를 주관하는 아스타르테 등이 있다. 고대 셈족에는 카리스마적인 형태와 정치적 형태라는 두 지배체제가 있었는데, 전자는 신적인 영력(靈力)을 받은 권위로써 민중을 지도하고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서의 판관(判官)이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창세기에 언급된 가나안은 노아의 아들인 함의 아들, 즉 노아의 손자로 등장하는데 포도주에 취한 노아를 함이 조롱하자 노아는 함에게 저주를 내려 함의 아들이 종이되리라고 하였다. 후일 노아의 예언대로 가나안의 후예인 가나안 족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타락한 민족이 되어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되었다고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나안 [Canaan] (두산백과)

 

 

 

 

 

 

 

놋뱀 [ brazen serpent ]

요약
청동으로 만든 뱀의 형상.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느님에게 불평하여 불뱀이 그들을 물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낫게 하기 위하여 모세가 하느님의 지시로 놋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보는 자는 살게 된다고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다.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본 자는 모두 치료되었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었는데, 히스기야는 이것을 부수어 버렸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열왕기하 18:4)고 기록되어 있다.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는 자기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고, 영적 의의를 모세 때 있은 놋뱀사건을 인용하여, 부활의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고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나타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놋뱀 [brazen serpent] (두산백과)

 

 

모세 기념 성당은 재건축 중이었고...

 

 

 

 

 

 

 

성 조지 교회_그리스 정교회

 

마다바 [ Madaba ]

요약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에서 남쪽으로 30m지점에 위치한 마다바는 1500년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서 모자이크 지도로 인해 모자이크 도시로 유명하다.
마다바는 암만에서 30km지점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서 현재는 인구가 5만명 정도되는 중소규모의 도시이다. 해발 700~800미터 고원 평지에 위치해 있는 이 곳은 4000년전 부터 존재하던 '왕의대로(고대 국제무역 통상로: King's High way)'상에 위치한 곳으로서 성경 구약에는 메드바라는 도시로 나오며 4500년 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마다바에서 발굴되는 유적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이 곳은 원래 모압왕국에 속했었는데 아모리 왕국에 의해 정복되었다. 모세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도중에 당시 이 곳을 차지하고 있던 아모리 왕국의 시론왕에게 모세가 사신을 보내 아모리 왕국의 영토안에 있는 왕의 대로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해 줄 것을 부탁하지만 시론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아모리 왕국의 시론왕은 군대를 이끌고나와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민족과 전투를 치른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여 이 곳을 차지하고 있던 아모리 왕국 사람들을 몰살하고 이 곳을 비롯하여 주변의 모든 도시를 차지한다.

이스라엘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는 이스라엘 12지파중 하나인 르우벤 지파가 이 곳을 분배받게 되는데 이 지역은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고 농업과 목초 재배에 유리하여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AD106년 로마가 이 지역을 정복한 후 기독교가 전파 되었고 로마에 의해 탄압을 받으면서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순교하게 된다.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7세기까지 많은 교회가 세워졌으며 5세기 부터는 이 곳에 주교가 임명되어 주재하게 된다.

기독교 도시로 번성하던 이 곳은 7세기 중반, 현재의 요르단, 팔레스타인, 시리아에 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대규모 지진으로 인하여 도시가 파괴되어 1000년 이상을 폐허화된 곳으로 남아 있다가 1800년대 말 마다바에서 남쪽으로 80km지점에 위치한 케락이라는 도시에서 200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집단으로 이 곳으로 이주하면서 도시가 재건되는 계기를 맞는다. 당시 아랍 전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 터키는 이주민들에게 교회는 8세기 경까지 이 도시에 많이 있던 교회터를 찾아서 그 위에 짓도록 함으로써 비잔틴시대의 교회들이 발굴되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1896년 경에 발굴된 성 조지(St.George) 교회이다.

이 교회 바닥에서는 550년에 만들어진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모자이크 지도가 발견되었는데 이 지도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서 모자이크 지도로 유명하다. 이 지도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중근동 지역의 성지와 주요 도시를 200여 만개 이상의 다양한 색상의 돌을 이용하여 16 x 6m짜리 지도를 제작하였는데 일부가 훼손되어 현재는 3분의 1 정도만 남아 있다. 지도의 가장 중심점인 위치에 예루살렘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사해, 요단강, 예수님 세례터, 아르논 강, 세렛강, 시내산, 나일강 등이 선명히 남아 있어 성서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다바는 성 조지(St.George) 교회를 비롯하여, 300여 미터 근처에 위치한 고고학 박물관, 그리고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마다바 박물관 등이 볼거리이다. 자동차로 15분 거리에는 모세가나안 땅을 바라만 보고 그 근처에서 죽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느보산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다바 [Madaba] (두산백과)

 

 

 

 

 

 

 

 

 

[파노라마] 협곡(와디무집)

 

 

베스트 샷

 

http://landart.tistory.com/863

Posted by landar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