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 유럽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헝가리공화국. 면적 9만 3033㎢. 인구 1004만 5000명(2003). 동쪽으로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서쪽으로 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 남쪽으로 크로아티아와 유고슬라비아, 북쪽으로는 슬로바키아에 둘러싸인 내륙국가이다. 수도는 부다페스트.
헝가리의 자연·지지
신생대 제3기에 형성된 알프스·카르파티아·트란실바니아알프스 및 디나르알프스 등 여러 산맥에 둘러싸인 대규모 구조분지의 주요부분을 차지한다. 국토의 약 60%는 해발고도 200m 이하의 낮은 평야로 다뉴브강이 거의 중앙부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로지른다.
헝가리 국토 대부분은 대륙성기후에 속하지만 남서부 산지는 어느 정도 해양성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부다페스트의 연평균기온은 11.3℃, 연강수량 615.1㎜이다.
국토는 지형적 특색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뉜다.
척량산지(脊梁山地)
중앙산지 또는 북부중대(中帶)산지라고도 한다. 제3기에 형성된 습곡산맥의 한 지류로서 지질구조적으로는 연속해 있으나 그 뒤 국지적인 화산활동을 수반한 단층운동에 의해 분단되어 많은 지루산지(地壘山地)가 형성되었다. 또한 다뉴브강의 서안 트란스다뉴비아대지쪽에는 크고 작은 여러 형태의 산지가 알프스 동쪽 기슭에서 다뉴브강변까지 이어진다. 이들 중 바코뉘산지는 규모가 가장 큰 산지로서 아름다운 삼림으로 덮여 있으며, 그 주변지역에는 보크사이트가 매장되어 있다.
또한 바코뉘산지 남쪽 가장자리에는 단층운동에 의해 형성된 동유럽 최대의 발라톤호가 있다. 호숫가에는 유럽에서 흔치 않은 현무암의 바다초니산이 멀리 바라다보이며, 그 산기슭은 포도주의 명산지로 유명하다. 이 척량산지는 또다시 다뉴브강 동쪽으로 뻗어 베르소니·체르하트·마트라·뷔크·젬플렌 등의 산지군을 형성한다. 마트라산지의 케시산(1015m)은 헝가리 최고봉인데 그 주변은 석탄·갈탄 산지로 소규모의 철광석도 산출되며 그 중심지인 미슈콜츠는 인구 제2위의 공업도시이다. 그 북부에 펼쳐져 있는 돌로마이트(白雲岩)지역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를 가진 아그텔렉의 종유굴이 있어서 관광·휴양지로 유명하다.
소평원과 대평원
소평원은 알프스산맥·카르파티아산맥 및 척량산지로 둘러싸인 구조분지로서 다뉴브강 서안부를 차지하며 알프스에서 발원하는 라바강·라브카강 등이 이 지역을 동쪽으로 흐르며 다뉴브강 북쪽은 슬로바키아령이다. 대평원의 대부분은 낮고 편평한 티소강 유역에 걸치며 광대한 평원을 형성한다. 외견상으로는 토양의 질이 고른 단순한 평탄지처럼 보이지만 오랜 지질시대를 통하여 티소강과 그 지류인 쾨뢰시강은 이따금 범람하여 유로를 바꾸었기 때문에 자연제방 자리에는 사질토의 낮은 언덕을 형성하고 하천이 흐르던 자리에는 저습지 등이 복잡한 토양층을 형성하였다. 또한 바람의 작용에 의한 비사지(飛砂地)나 사구지 등이 평탄한 데 비하여 토양·수문조건이 비교적 복잡하게 되어 있다. 북부의 니르세그는 황토 및 사질토양이 풍부하여 양질의 감자·옥수수·담배 등을 생산한다. 중부의 다뉴브강과 티소강 사이의 지역은 북서에서 남동으로 이어진 사구열의 발달로 배수가 잘 되는 사질토양지대이므로 케치케메트를 중심으로 포도·살구·딸기·파프리카 등의 과수재배와 원예농업이 활발하다.
티소강 동부의 쾨뢰시강 하류역은 지하수위는 비교적 높지만 강수량에 비해 증발량이 많아 염분이 집적되기 쉬워 알칼리성 토양인 곳이 많다. 이 때문에 경지의 개발이 제한되어 자연발생한 초원은 예로부터 방목장으로 이용되어 목축업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스텝 모양의 초원을 푸스타(puszta)라고 하는데, 제2차세계대전 후 티소강 상류역에서의 댐 건설에 의한 발전과 관계용수의 확보, 하류역에서의 배수시설 건설로 푸스타는 차츰 경지로 변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후 제1차 5개년계획에 따라 포도산지로 유명한 토카이 남쪽 티소강에 티사루크댐과 관개용수로가 건설되었다.
트란스다뉴비아대지
황토로 덮인 광대한 대지로 서쪽으로 갈수록 완만하게 고도가 높아지면서 알프스 산기슭으로 이어진다. 많은 하천이 이 대지 위를 동쪽으로 가로질러 흐른다. 지하수위는 지표면 밑 20∼30m로 낮기 때문에 가뭄 때에는 한해(旱害)를 입기 쉽다.
메체크산지
트란스다뉴비아대지 남부에 고립해 있는 이 산지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지질구조적으로는 디나르알프스계에 이어져 있다. 산지 주변에 규모는 작지만 헝가리에서 가장 양질의 석탄을 생산하는 코믈로탄전 및 페치탄전이 있다. 이 나라를 관류하는 다뉴브강은 유럽 중·동부 최대의 국제하천이며 항공로의 발달로 그 가치가 떨어졌다고 하지만 지금도 중요한 교역교통로의 하나이다. 부다페스트는 중요한 국제하항 중 하나로 매일 다뉴브강의 하황정보(河況情報)를 연안에 있는 여러 하항으로 발신한다.
주별 면적·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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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면적(㎢) |
인구(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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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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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다페스트 |
525 |
1,775,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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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코마롬에스테르곰 |
2,265 |
316,7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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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바니오 |
3.소볼치소트마르베레그 |
5,937 |
582,795 |
|
니레지하조 |
4.졸로 |
3,784 |
298,056 |
|
졸로에게르세그 |
5.지외르쇼프론 |
4,089 |
434,956 |
|
지외르 |
6.소모지 |
6,036 |
335,463 |
|
코포슈바르 |
7.야사나기쿤솔노크 |
5,582 |
415,819 |
|
솔노크 |
8.촌그라드 |
4,263 |
433,388 |
|
세게드 |
9.톨노 |
3,703 |
250,062 |
|
섹사르드 |
10.노그라드 |
2,544 |
220,576 |
|
솔고타랸 |
11.호지두비호르 |
6,211 |
553,043 |
|
데브레첸 |
12.보시 |
3,336 |
268,653 |
|
솜바트헤이 |
13.바치키슈쿤 |
8,445 |
546,753 |
|
케치케메트 |
14.보로니오 |
4,430 |
408,019 |
|
페치 |
15.폐예르 |
4,359 |
434,547 |
|
세케슈페헤르바르 |
16.베케시 |
5,631 |
397,074 |
|
베케슈초보 |
17.페슈트 |
6,393 |
1,080,759 |
|
부다페스트 |
18.베스프렘 |
4,613 |
374,346 |
|
베스프렘 |
19.헤베시 |
3,637 |
325,6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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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르 |
20.보르쇼드오보우이젬플텐 |
7,247 |
745,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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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슈콜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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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
93,030 |
10,197,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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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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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브리태니커 연감(2003) |
헝가리의 역사
BC 10세기 마자르족은 조상 대대로 살던 땅 우랄을 출발한 뒤 터키계의 여러 민족과 접촉하다가 895년 카르파티아분지로 침입·정착하였다. 마자르 7부족은 이 땅에 연합국가를 세우고 이중수장제(二重首長制)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차츰 유목·기마생활에서 정주·농경으로 생활양식이 변화하자 씨족적 지배체제도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10세기 말에는 게자와 이스트반 1세 부자에 의해 국가통일이 이루어져 초대왕조인 아르파드왕조가 성립되었다. 동시에 그리스도교로의 귀의도 진척되어 1000년 이스트반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국왕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스트반 지배 아래서는 왕성주제(王城州制)가 실시되었고 봉건적 주종관계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국내에서는 이교반란과 지방영주층이 대두하였고, 대외적으로도 발칸반도 등을 둘러싸고 로마·비잔틴제국에 대립하여 지배체제가 동요하였다. 12세기 말부터는 왕령지(王領地)의 분해가 진행되어 대호족이 할거하였다. 1222년 대호족에 대항하여 귀족의 여러 가지 특권을 인정하는 금인헌장(金印憲章)이 국왕에 의해 공포되었다. 1241년 몽골 침입 후 벨라 4세는 여러 민족의 식민에 의한 국토의 재건을 시도하였고, 또한 13세기 말에는 농민이 이동의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조건은 대호족을 이롭게 만들어 군웅할거시대를 초래하였다. 국토가 영방(領邦)으로 분열되는 것은 소영주·귀족과 국왕과의 동맹으로 모면하였으나 분권화의 경향은 계속되어 대귀족과 중소귀족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14세기 중엽 이후 대외적으로는 세력이 확장되었으나, 국내적으로 대귀족의 강대화가 추진되어 15세기 전반에 이르러 국토의 약 40%를 60여 대귀족이 차지하게 되었다. 1458년 마티아스 1세가 중·소 귀족의 지지를 얻어 국왕이 되자 대귀족을 억누르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어 중부유럽에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국내는 또다시 혼란해졌으며 1514년 대(對)오스만 십자군 모병을 계기로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에 패한 농민은 이동의 자유를 빼앗겼고 부역을 강요당하였다. 혼란 속에 약체화된 헝가리군은 1526년 모하치전투에서 오스만제국군에게 패한 뒤 17세기 말까지 중앙헝가리는 오스만제국의 점령 아래 있었고 헝가리 서부는 합스부르크가의 세력 아래 들어갔다.
한편 동부의 트란실바니아는 오스만제국의 보호 아래 있으면서도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30년전쟁에서는 트란실바니아공 베틀렌이 이끄는 군대가 대합스부르크동부전선을 형성하였다. 또한 18세기 초에는 라코치 피렌체 2세가 대합스부르크독립전쟁을 지휘하였다. 종교적으로도 트란실바니아는 신교의 요새로 존속하였다. 독립전쟁에서 패배한 뒤 헝가리는 합스부르크가의 세습왕제를 인정하였고, 제1차세계대전까지 지배를 받으며 독일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발전하여 18세기말 농민은 다시 이동의 자유를 얻었다. 19세기에 나폴레옹전쟁과 서유럽의 여러 개혁의 영향으로 중류귀족의 지지를 받은 혁명가 L. 코슈트의 지도로 1848년 민족독립을 목표로 한 혁명이 일어나 농노해방을 실현시켰다. 혁명이 진압되고 합스부르크절대주의가 부활되었으나 1867년 안팎으로 위기에 빠진 오스트리아와의 사이에 아우스글라이히(和協)가 성립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왕국이 탄생하였다. 이 체제 속에서 헝가리는 경제적인 번영을 이룩하였다.
제1차세계대전말 이중왕국 붕괴와 함께 혁명이 발발하여 M. 카로이 내각이 탄생하였으며 1918년 11월 공산당이 창건되어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듬해 3월 외교정책에서 실패한 카로이에 이어 B. 쿤이 이끄는 소비에트공화국이 성립되었으나, 국제적 반혁명과 국내정책의 실패로 약 4개월만에 무너지고 M. 호르티 데 노지바냐에 의한 권위주의적 지배체제가 들어섰다. 호르티 데 노지바냐체제에서는 경제가 침체되었고 몰락 중류귀족층이 기반이 되어 파시즘화가 진행되었다. 외교정책에서도 친이탈리아·친독일파가 실지회복운동(失地回復運動)과 결부되어 우위를 차지하였으며 제2차세계대전에서는 추축국쪽에 참전하였다. 전쟁 후 소련군의 점령 밑에서 여러 가지 개혁이 이루어졌고 1948년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합동하여 공장 등의 국유화를 이루었으며, 농업의 집단화도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되었다. 그 뒤 헝가리사건 등 1950년대 정치적 변동과 1960년대말 이래의 여러 차례에 걸친 경제개혁을 거쳐 안정된 사회발전의 길을 걸었다.
동구권 가운데 가장 활발한 개혁을 추진해온 헝가리는 1989년 1월 동구권 최초로 복수정당제를 도입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공산당)은 1989년 10월 당대회에서 공산당을 공식해체, 사회당(HSP)으로 변신해 다당제·시장경제 도입 등을 포함한 신강령을 채택했다. 10월 다당제와 대통령제의 개헌안이 통과, 국명도 인민공화국에서 공화국으로 바꿨다. 1990년 5월 비공산연립정부가 수립된 이래 2003년 현재까지 비슷한 골격을 유지해 오고 있다.
헝가리의 정치·외교·군사
헝가리의 정치
1990년 3월과 4월 전후 최초로 실시된 자유총선거에서 온건중도우파인 민주포럼(HDF)이 총 386석중 165석을 차지, 집권 사회당은 제4당으로 전락했다. 같은 해 5월 HDF를 주축으로 독립소지주당·기민당이 참여하는 비공산연정이 공식출범하고 민주포럼의 안탈 의장이 총리에 취임했다. 1994년 5월 총선 1·2차투표에서 줄라 호른 전외무장관의 사회당이 총 386석중 209석을 차지, 정국주도세력으로 부상했다. HDF는 경제정책 실패와 내분으로 참패했다. HSP는 제2당인 자유민주동맹(AFD)과 연정을 구성키로 합의, 7월 HSP의 줄라 호른을 새 총리로 하는 동구권 최초의 좌우파 대연립정부가 출범했다. 1995년 6월 곤츠 대통령은 의회의 대통령선출투표에서 재선되었고 2000년 대선에서는 페렌츠 마들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2년 총선에서는 사회당과 자유민주동맹의 좌파연합이 승리했다.
헝가리의 외교
공산정권 붕괴후 서방과의 관계개선을 적극 추진, 중유럽 국가들의 역내협력 강화도 중시했다. 1992년 EU준회원국, 1994년 4월 가입신청서를 제출, 1999년중 EU가입을 목표로 외교역량을 동원했다. 1994년 2월 나토의 평화동반자계획(PFP)협정에 서명, 5월 서구동맹(WEU) 준회원국 지위를 확보했다.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총리가 1994년 3월 헝가리를 방문, 채무상환문제에 관한 협정에 조인했다. 러시아는 헝가리에 대한 10억 달러의 채무를 기계와 설비 수출로 1998년까지 변제할 의사를 밝혔다. 1990년 6월 바르샤바조약기구를 탈퇴했다. 호른 총리는 동구권 주변국과의 선린관계를 적극 추진하여, 루마니아내 헝가리계 소수민족문제로 마찰을 빚던 루마니아와의 긴장도 다소 완화되었다. 1995년 4월 중유럽 8개국 정상회담을 개최했으며, 7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슬로바키아 3개국 정상은 경제협력을 강화키로 합의했다. 슬로바키아와는 1977년부터 <다뉴브강 댐건설>을 둘러싸고 오랜 분쟁을 계속, 1997년 10월 국제사법재판소는 이 분쟁과 관련하여, 양국 모두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1997년 7월과 12월 각각 나토 및 유럽연합(EU) 가입우선협상대상국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2002년 EU 정상회담에서 신규 회원국으로 인정되어 2004년 5월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헝가리의 군사
1955년 창군 이래 바르샤바조약기구에, 1969년 주네브군축위원회에 가입하였으나 1990년 6월 26일 헝가리 의회는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를 만장일치로 승인, 이 기구 해체를 선도한 결과가 되었다. 1991년 6월 헝가리 주둔 소련군이 완전히 철수하였다. 1999년 NATO에 가입하였다. 복무기간 1년의 징병제를 실시한다. 국방비 지출액은 1985년 35억 1700만 달러(GDP의 7.2%)에서 2002년 1억 840만 달러로 크게 낮아졌다. 총병력은 육군 2만 3600명, 공군 7700명(2002) 등이다.
헝가리의 경제·산업
19세기 중반 헝가리는 합스부르크제국 내의 낙후된 농업지대였다. 아우스글라이히 이후 오스트리아 등 서유럽자본의 영향 아래 공업화가 진행되어 전통적으로 융성한 식품공업 외에 광산·기계 등의 부문도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제1·2차세계대전 동안 섬유공업의 확충 및 중공업도 진전하였다. 이 기간에도 기본적으로는 농업이 주산업이었고 1941년 농업인구는 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전후 토지개혁으로 대토지소유가 해체되고 소농이 지배적인 농업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950년대 농업집단화, 1960년대 집단화농장의 합동운영을 거쳐 오늘날에는 대규모 협동조합농장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이 운영되고 있다.
한편 낙후된 공업은 기업의 국유화, 1950년대 전반의 급격한 중공업화, 1960년대부터 공업진흥정책 등으로 공업의 중심이 중화학부문으로 옮겨졌다. 1956년 헝가리 사건을 계기로 종래의 과도한 중앙집권적인 계획경제를 고치기 위해 <경제개혁>이 여러 형태로 추진되고 있다. 경제개혁안은 1966년 결정되었으며 1968년 이후 기업에 활동의 결정권을 대폭 인정하고 이윤추구를 용인하는 시장기구를 도입하는 등 종래의 사회주의경제의 틀을 넘어 개혁이 실시되어왔다.
1980년대 들어 다시 경쟁원리의 명확화와 저수익 부문의 파산선고에 따른 정리 등 제2단계 개혁이 진행되었으며, 개인의 경영 능력에 기초를 두는 실질적 합명회사·합자회사 등의 새로운 기업형태의 도입도 실시되었다. 또한 지방자치단체나 공단의 채권발행, 파산법 시행, 공개증권거래소의 개설계획 등 대폭적인 개혁이 추진되어 왔다. 1989년 사기업 육성과 외국인에 대한 투자규제를 완화하는 신회사법을 제정하였으며 1990년 들어서는 민영화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어 국영기업의 민영화 및 중소기업 육성노력에 박차를 가하였다.
1990년부터 정부는 가격자유화·임금통제·정부보조금 삭감 및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한 긴축정책 수행 등 포괄적 경제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경제개혁에 따른 과도기적 혼란과 IMF 경제안정화계획에 부응한 긴축정책 등의 부작용, 에너지부족, 가격자유화에 따른 인플레, 구코메콘 해체로 인한 수출시장 상실 및 과도한 외채부담 등으로 1990~1993년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했다. 1993년 이후 경제안정화조치에 따른 시장혼란의 진정, 경제개혁성과의 가시화, 공업생산 및 투자증가, EU 등 서방국과의 관계강화로 1994~1995년 2% 이상, 1996~1997년 3~4%의 성장을 달성했다. 최근 경제개혁인 보클리스정책 시행에 따라 안정된 경제성장을 유지하고 있다. 1996년 5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2002년 국내총생산은 1340억 달러, 1인당 국내총생산은 1만 3300달러를 기록하였다.
농업·임업·수산업
농업형태는 혼합적이며 주요 작물로는 옥수수·밀 등이 있고 사과·포도 등 여러 과일류도 생산된다. 축산으로는 돼지가 가장 많고 경주마의 생산으로 유명하다. 수산업에서는 하천·호소에서 잉어·농어 등의 민물고기를 연간 약 4만t 정도 어획한다. 삼림자원은 많지 않은 편으로 산림은 국토의 18% 정도를 차지하며 졸참나무·아카시아·너도밤나무·삼나무를 중심으로 연간 500만∼600만㎥의 목재를 생산한다
광공업
광물자원은 빈약하여 철광석 20%, 석유 10% 정도를 자급하고 있다. 다만 보크사이트는 연간 약 300만t을 생산하며 수출도 하고 있다. 그 밖에 천연가스의 60%, 석탄(약 75%가 갈탄)의 90% 이상이 자체공급되어 에너지 자급률은 전체적으로 50%에 가깝다. 이러한 에너지 기반의 취약성도 작용하여 공업은 자원이 절약되고 특히 가공도가 높은 제품의 생산이 두드러진다. 또 소비생산으로의 일관된 중시정책에 의해 공업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소비재의 생산비중이 매우 높으며 이것은 동유럽 여러 나라 중 뚜렷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공업생산의 주력은 기계·금속가공·화학·식품가공 등이다. 공업생산에서의 기계·화학 공업부문 비중이 계속 확대되고 식품생산이 재검토되는 반면 연료·철강·비철금속·건재의 여러 부문이 감소하는 경향이다. 또 소비재 중에서도 유리·도자기 공업의 생산수준은 유지되고 있으나 섬유·봉제품의 생산비중은 감소하였다.
무역
무역의존도가 높은 편으로 국내최종생산물의 30%가 수출되는데, 특히 수출의 80%를 차지하는 광공업부문에서는 최종생산물의 50%가 수출된다. 수입은 총지출의 15%를 차지한다. 무역품목은 선진자본주의 국가에 반가공품·완성품을 수입하고 반가공품·식료품을 수출하며 개발도상국에는 원재료·식료품을 수입해서 반가공품·완성품을 수출한다. 주요 수출품은 기계·차량·의약품·섬유류·곡물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석유·기계·자동차·화학품·철강·섬유원료 등이다.
무역수지는 개발도상국과의 무역을 제외하고는 적자였으나, 1980년 전반에는 수입억제와 환율저하 효과에 의해 흑자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전반 행해진 경제개혁의 진전으로 비국영부문에서의 투자수요가 급속히 높아졌으며 서방측 자본의 유입과 맞물려 수입이 급증함에 따라 1985년 이후 적자가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서방측과의 교역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제도적으로도 1972년 서방측 출자비율 49% 이내의 합병병기업 설립이 인가되어 1979년 이탈리아·프랑스·오스트리아·서독·일본과의 공동출자에 의한 중부유럽국제은행이 설립되었다. 2002년 수출액은 314억 달러, 수입액은 339억 달러이다.
헝가리의 사회
주민·언어
국민의 84.4%는 헝가리인이고 소수민족으로 독일인 2.4%, 슬로바키아인 0.9%, 루마니아인 1.0% 외에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집시·유대인 등이 있다. 외국에도 헝가리인이 살고 있는데 인근 여러 나라와 북아메리카에 약 450만 명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루마니아에는 약 170만 명, 체코와 슬로바키아에 60만 명이 살고 있으며, 유고슬라비아·오스트리아·러시아에도 많이 있다. 따라서 이들 여러 나라에서의 헝가리인 처우문제가 상호 외교관계에 미묘한 영향을 끼친다. 또한 미국의 200만 명, 캐나다의 14만 명의 헝가리인은 대부분이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유럽 전역에서 이주한 사람들과 그 자손들이지만, 제2차세계대전 후의 이민·망명자도 많다.
도시와 농촌의 인구비는 도시쪽이 약간 많은데 도시인구의 대부분은 수도 부다페스트에 집중해 있다. 인구의 자연증가율은 세계대전 후 계속 내려가 동유럽권에서는 유일하게 증가율이 감소하는 나라이다.
공용어는 헝가리어이며 러시아어는 의무교육기간인 8년간 교육되지만 전혀 보급되어 있지 않다. 청년·지식인층에는 영어가, 제2차세계대전 이전 세대인 장년층에는 독일어가 비교적 많이 사용되나 다른 나라에 비해 외국어의 보급률은 높지 않다. 소수민족의 언어는 지역적으로 의무교육 단계에서 보장되고 있다. 한편 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에는 각기 헝가리어 출판국이 있어서 헝가리어 서적이 발행되고 있다.
국민생활
근로자의 지위별 인구구성비는 소득 종사자 약 494만 명 중 노동자 55.7%, 사무직 26.3%, 농업생산협동조합원 14%, 자영업자 4%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취업인구가 감소하여 노동력 부족을 나타내고 있다. 근로시간은 1971년 7월부터 주 5일 42시간제를 단계적으로 채용하여 1982년 1월부터는 전국적으로 채택되었다. 1984년부터 주 40시간제가 받아들여졌다. 유급휴가는 연 15~24일이며 근속연수에 따라 늘어난다. 출산휴가는 3개월 유급이며 산전·산후 3년간은 일정액의 유급으로 육아휴가가 보장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여성도 취업하고 있어 한 가정의 월수입은 평균임금의 거의 2배가 된다.
정신근로자에 비해 육체노동자의 임금은 20% 정도 높다. 의료는 원칙적으로 무료이지만, 실제로는 진료 때 사례가 필요하며 상당한 비용을 강요받는다. 연금생활자가 해마다 증가하여 장래의 노인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혼자 사는 노인의 경우 연금만으로는 충분히 생활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한편 자녀를 둔 부인에게는 아동 수에 따라 아동수당이 지급된다.
교육·종교
초등학교는 8년제(6~14세)로 의무교육이며 무상이다. 중등교육은 4년제로 일반중학교 외에 직업중학교와 공업중학교가 있다. 일반중학교의 취학률은 69.1%, 직업중학교는 16.6%(1988)이다. 종합대학은 부다페스트·페치·세게드·데브레첸에 각각 1개교씩 있고 그 밖에 공과대학 6개교, 의과대학 4개교, 예술대학 3개교, 경제대학 1개교가 있다.
교회의 사회적인 영향력은 제2차세계대전 후 약화되었으나 1957년 종교의 자유와 교회의 권리가 재확인되었으며 1971년 정부와 로마교황청과의 관계도 정상화되었다. 국민의 57.8%가 가톨릭, 20%가 프로테스탄트이고 그 밖에 그리스정교도·유니테어리언·유대교도 등이 있다.
헝가리의 문화
국민문화의 개화
헝가리 국민문학의 시초는 16·17세기 2대 시인 B. 발라시·M. 즈리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국민문화가 꽃핀 것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반의 민족주의 고양기로 학사원·민족박물관·민족극장 등의 창설이 잇따랐으며, 시인 M. 초코나이 비테즈·M. 뵈뢰슈마르티, 독립전쟁에서 죽은 사랑과 혁명의 시인 S. 페퇴피, 극작가 K. 키슈팔루디, 사극 《뱅크밴(1821)》의 J. 카토나와 E. 시글리게티 등이 잇따라 나왔다.
음악에서도 민족적 격정을 상징하는 베르붕코슈양식의 발달과 독일음악의 영향을 받아 서유럽에서 널리 활동한 F. 리스트와 민족오페라 확립자 F. 에르켈이 나타났다. 학술분야에서는 비교언어학의 S. 자르마티, 티베트학의 S. 쾨뢰시 초마, 수학의 J. 볼리아이 등이 활동하였다. 이 국민문화의 개화는 독립전쟁 패배 후의 염세주의가 팽배한 가운데에서도 시인 J. 아라니와 시극 《인간의 비극》의 I. 마다치에게 계승되어 1867년 이중왕국 성립과 함께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부다페스트에는 오페라하우스를 비롯하여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서 세기전환기에 걸쳐 독특하고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였다.
미술에서는 역사화의 마다라스·B. 세케이, 벽화의 로츠, 사실파의 M. 문카치, 풍경화의 L. 파르·N. 페렌치, 천재화가 촌트바리, 인상파의 P. 시녜이 메르세 등이 등장하였으며 특히 공예미술은 조르나이의 아르누보 양식의 도자기가 유명하다. 문학에서는 M. 요카이와 헝가리 리얼리즘의 선구자 K. 미크사트, 과학에서는 산욕열을 연구한 I.P. 제멜바이스, 물리학의 L. 외트뵈시, 전기기관차의 칸도 등이 국제적으로 유명하다.
발전기
20세기에 접어들자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전통적인 국민주의를 뛰어넘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상징주의 시인 E. 아디를 중심으로 서유럽 문예사조의 영향을 받은 신세대그룹의 잡지 《뉴가트(西方)》가 1908년 창간되어 문단에 충격을 주었고, 이 파에서 M. 바비치, D. 코스톨라니, E. 모리츠 등이 배출되었다. 이 밖에 희곡 《릴리옴(1909)》의 F. 몰나르, 전위적 풍자의 F. 카린티 등의 도회파(都會派), 문학적 농촌사회지를 만든 민중파, V. 마야코프스키와 대비되는 요절시인 A. 요제프 등이 활동하였다. 시인으로는 L. 나지와 베레슈가 뛰어났다. 2002년에는 I. 케르테스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음악에서는 주로 빈에서 활동한 오페레타의 F. 레하르와 T. 가르만, 그리고 민요의 채록을 통하여 혁명적인 현대음악의 지평을 개척한 B. 바르토크와 E. 코다이 등의 작곡가가 활동하였다.
미술에서는 분리파와 연결되는 리프로나이, 전위파의 L. 카샤크, <노르차크(8인회)>의 주도자 케른슈토크와 델코비치의 표현주의가 꽃피었다.
학술에서는, 철학의 G. 루카치, 사회사상의 D. 사보, 생화학의 A. 센트죄르지, 국외로 나간 사회학의 O. 야시와 경제학의 K. 폴라니 등이 있다.
1910년대에 본격화된 영화계에서는 A. 코르다나 G.H. 커티스·페예슈·산타, 루마니아 국적의 쉬테 등 국외에도 널리 알려진 작가가 많이 있다. 영화계는 망명에서 귀국한 영화이론가 B. 발라즈가 제작한 《유럽의 어디에서(1947)》 이후 한때 침체하였으나 파브리·얀초에 이어 실험 그룹 <발라즈 스튜디오>에서 배출한 카보르·코샤·D. 사보, 단편·기록영화의 후사리크·호모키나지 등이 차례로 국제영화상을 받아 성황을 보이고 있다.
미술에서는 도예의 코바치가 유명하다. 음악에서는 지휘의 E. 오르만디·A. 도라티·G. 숄티와 첼로의 J. 슈타르케르, 바이올린의 J. 시게티 등 많은 거장을 낳은 나라이기도 하다. 특히 피아노의 랑키를 비롯한 국제적인 신예를 배출해내고 있으며, Z. 코다이의 음악교육이론은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도입하고 있다.
헝가리와 한국과의 관계
헝가리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북한과는 1948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정치·경제·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한국과는 1987년 8월 상호무역사무소 개설에 합의, 12월 부다페스트에 무역사무소를 개설하였으며 헝가리도 1988년 3월 서울에 상공회의소 사무실을 상주시켰다. 1988년 9월 양국은 준대사급 상주대표부를 교환하였으며 1989년 2월 21일 정식 수교하였다. 같은 해 2월 문화협정, 3월 이중과세방지협정 및 과학기술협력협정, 11월 항공협정 및 관광협정, 1991년 3월 일반여권 사증면제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통상은 2002년 대한수입 3억 6352만 달러, 대한수출 1531만 달러이다. 2003년 교민수는 32명이고, 체류자수는 427명이다.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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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
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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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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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르족 우랄지방에서 이주 시작. 로마인, 지금의 헝가리 서부지역을 정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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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
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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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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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르족의 자립화와 서방으로의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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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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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파티아분지 정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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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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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본격적인 포교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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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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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반 1세(아르파드家) 대관, 초대 국왕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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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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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타의 이교도 반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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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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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대영주층 대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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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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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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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라시 2세, 십자군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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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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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인헌장(金印憲章) 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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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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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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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타타르)의 침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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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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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파드가 단절. 바츨라프 3세(프셰미슬)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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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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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요수대왕(앙주가)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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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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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귀족의 법적 권리 확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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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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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1세(야겔로가)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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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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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야디의 대(對)터키전쟁(~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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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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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스 1세(훈야디가)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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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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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농민전쟁. 삼부법전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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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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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치의 싸움. 3분할시대(~1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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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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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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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코치의 대(對)합스부르크독립전쟁, 사투마레의 화약(1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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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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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의 토지대장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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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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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어의 공용어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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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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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회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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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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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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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적 개혁과 독립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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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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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절대주의의 도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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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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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 성립(아우스글라이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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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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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타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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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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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의원 제1회총선거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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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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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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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내각 시대(~1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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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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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사회민주당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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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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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혁명, 카로이내각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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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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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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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
~ |
호르티 데 노지바냐 반혁명정권(~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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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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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가의 왕위 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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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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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협정 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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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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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헝가리를 독일군으로부터 해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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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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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인민공화국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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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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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합동(社共合同), 공산당정권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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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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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사건, 카다르정권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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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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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개혁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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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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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선거의 복수후보자제도 도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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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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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르 물러나고 그로스가 대신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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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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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해체, 사회당으로 변신. 다당제와 대통령제 개헌. 국호를 헝가리공화국으로 개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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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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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총선거. 민주포럼 압승. 대통령간선제 개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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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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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거에서 승리한 사회당과 우파인 자유민주동맹의 연합정권 발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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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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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바키아 헝가리계 국민에게 일정한 자치권 부여하는 조약 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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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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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헝가리계 주민의 지위와 국경보전관련조약 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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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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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오르반 총리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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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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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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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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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페렌츠 마들 대통령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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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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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제쉬 총리 취임, I. 케르테스 노벨문학상 수상.
부다페스트 (Budapest)
요약
설명
헝가리 수도. 면적 525㎢. 인구 182만 1552명(2000). 중북부의 헝가리분지에 있으며, 다뉴브강이 시내를 가로질러서 흐른다. 중부 유럽 최대의 도시로서 헝가리의 정치·문화·산업·교통의 중심지이다. 이 나라 전인구의 약 20%가 집중되어 있다. 지금의 부다페스트는 하나의 행정단위로서 통합되어 있으나, 다뉴브강 오른쪽 연안인 부다지구(地區)와 왼쪽 연안인 페스트지구는 오랜 동안 서로가 독립된 쌍둥이도시로 발전해 왔다. 부다는 역사가 오래되어 고대 로마제국 때에 이미 성채가 축조되었다. 이에 반해 페스트는 다뉴브강의 범람원이었던 저평지(低平地)로서 홍수 등의 수해를 입어 개발이 늦어졌다. 한편 부다에는 산이 많아 토지이용의 여지가 없고 동서남북의 교통의 요지라는 점 때문에 상업도시로서 급격히 발전했다. 1873년 두 도시는 합병에 조인하고, 도시 이름을 부다페스트라고 하였다. 부다는 강 연안 가까이까지 산이 바싹 닿아 있고, 기복이 심한 도시로서, 바르헤지 성산(城山)이라고 불리는 언덕에는 형가리왕조의 왕궁과 마티아시교회 등 역사적 건물이 많이 있다. 한편, 페스트에는 국회의사당·과학아카데미·국립박물관·국립오페라극장·페스트콘서트홀 등 현대적 정치·과학·문학·예술의 중추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부다페스트는 헝가리 최대의 공업도시로서, 전국 공업생산의 약 50%, 공업종사자수의 약 26%를 차지한다. 이 도시의 중요한 공업지역은 남부의 체펠과 북쪽 근교에 새로 개발된 위페스트이다. 체펠은 다뉴브강 가운데 있는 섬에 건설된 공업지역으로서 공업용수를 얻는 데 알맞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제품은 철도·선박·버스 등의 수송기계, 전기기계·공작기계 등 기계공업의 제품인데, 그중에서도 간츠 마바크회사의 전기기관차, 이카루스회사의 버스는 외국에도 수출되고 있다. 부다페스트의 역사
1873년에 부다 및 오부다(옛 부다)와 페스트지구가 합병하였으며, 초대시장은 K. 카메르마예르이다. 부다는 타타르(Tatar;몽골)의 습격을 받은 후인 13세기 중엽에 벨라 4세가 이곳에 왕궁을 지음으로써 그 발전의 기초를 닦았으며, 그 후 일관해서 국가의 군사적·정치적 요지였다. 오부다는 로마제국령 파노니아시대에는 아퀸쿰(Aquincum)으로 불렸으며, 또한 헝가리왕가인 아르파드가의 연고지이기도 했다. 한편 페스트의 도시적 기초는 11세기에 불가르족이 구축했다. 페스트는 부다와 함께 왕국특권도시로 번영했으며, 특히 요제프 2세 시대(1765~1790) 이후에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 19세기 전반의 개혁기에는 자유주의파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이 개혁기에 부다와 페스트가 다리로 이어졌으며, 1849년 민족독립을 목표로 한 혁명중 한 때 합병이 이루어졌으나, 혁명실패 후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부다페스트는 중부유럽의 요지였으므로 예로부터 다른 민족의 점령대상지, 또는 망명처가 되기도 했다. 특히 부다지구의 민족구성은 다양한데, 오늘날에도 터키계 주민지역 등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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