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 18일


호텔에서 본 프라하 일출

프라하의 봄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 이 운동을 막기 위하여 불법침략한 소련군의 군사개입사건을 포함하여 ‘체코사태’라고도 한다. 1956년 소련 내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있은 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주의자 노보트니 정권의 보수정책이 계속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의 민주 ·자유화의 열망이 점차 고조되어 갔으나, 노보트니 정권은 이를 외면한 채 소련만을 추종하였다.

1960년대 이에 반발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식층이 중심이 되어 민주·자유화의 실현을 위한 조직적인 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 물결에 밀려 마침내, 1968년 1월 노보트니 당 제1서기가 물러나고, 개혁파의 둡체크가 당 제1서기를, 체르니크가 수상을, 온건파 스보보다가 대통령직을 각각 맡았다.

이들 개혁파는 1968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중앙위 총회에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즉 민주·자유화노선을 제창하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 내용은 재판의 독립, 견고한 의회제도의 확립, 사전검열제의 폐지, 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언론 ·출판·집회의 자유보장, 국외여행 및 이주의 자유보장, 경찰정치의 부활저지, 경제계획의 추진,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동등한 권리에서의 연방제로의 이행, 자주독립에 대한 대외정책 추진 등이다.

따라서 사실상 검열제가 폐지되고 많은 정당 ·정치단체가 부활되었으며, 의회는 활발한 논의와 비판의 광장이 되었다.

이러한 자유화를 위한 정책적 변화가 있자 온 국민은 ‘프라하의 봄’이라 하여 공산체제로부터의 탈바꿈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체코사태가 동유럽 공산국가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이 체제변화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불법으로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1968년 8월 20일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조약기구 5개국군 약 20만 명을 동원하여 침공함으로써, 이 자유화운동을 일시에 저지하고, 개혁파 주도자들을 숙청하였다. 1969년 4월 소련은 둡체크를 강제 해임시키고 후임 서기장에 후사크를 임명하였으며, 개혁파를 추종한 50여만 명의 당원을 제명 또는 숙청하였다.




요즘 출타중이신 각하도 그러시지만
외국에 나가면 가끔 으쓱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먼 이국에서 보는 우리 기업의 광고입니다.
이제는 구석, 한쪽이 아니라..
쎈터, 전면으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
광고을 전혀 허용치 않는 덴마크 여왕광장에도 유일하게 *성의 광고는 버티고 있고,
러시아에 중요 교량을 건설하고 광고로 활용 후 기부키로 한 *G...

여기는 프라하성을 오르는 길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오르는 길...
그길의 광고판 전부를 1년간 계약했다 합니다.
얼마전까지는 '세계의 *성'이라고 광고하는 통에 한국기업인 줄을 몰랐는 데
올립픽,월드컵을 거치며 '한국 *성'이라고 광고를 하여 이제는 많이 한국기업임을 안다 하더군요.
전자제품을 잘만드는 첨단을 걷는 나라 한국으로 이미지 매겨지고 있고
우리의 휴대폰은 고급이고 모두가 가지고 싶은 제품이라 합니다.

이제는 물건 하나만 좋으면 시장이 세계인 거 같습니다.
순식간에 '왕대박 !' 그런 가능성을 보고 조국의 희망이 보여 좋았습니다.



해그림/김명희 작




해그림/김명희작





프라하성

체코를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이자,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성이다. 9세기 말부터 건설되기 시작해 카를 4세 때인 14세기에 지금과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고, 이후에도 계속 여러 양식이 가미되면서복잡하고 정교한 모습으로 변화하다가 18세기 말에야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프라하 구시가지의 블타바강(江) 맞은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길이는 570m, 너비는 128m이며, 9세기 이후 통치자들의 궁전으로 사용된 로브코위츠 궁전 외에 성(聖)비투스대성당·성조지바실리카·성십자가교회 등 3개의 교회와 성조지수도원 등 다양한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건설될 당시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3세 중엽에 초기 고딕 양식이 첨가되고, 이어 14세기에는 프라하 출신인 카를 4세에 의해 왕궁과 성십자가교회 등이 고딕 양식으로 새롭게 건축되면서 이 때부터 체코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그 뒤 블라디슬라프 2세 때 후기 고딕 양식이 가미되고, 1526년 합스부르크왕가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다시 르네상스 양식이 도입되었다. 그러다 바로크시대인 1753년부터 1775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는데, 시작에서 완성될 때까지 900년이나 걸렸다.

1918년부터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면서 내부 장식과 정원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왕궁뿐 아니라 성 안에 있는 모든 건축물들이 정교한 조각과 높이 솟은 첨탑, 화려하고 다채로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어 유럽에서도 중요한 역사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프라하뿐 아니라 체코·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명소이며, 특히 성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성 비투스 성당(St Vitus Cathedral)

총길이 124m, 폭 60m, 천장 높이 33m, 탑높이 100m의 프라하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건축물중 하나로 현재 대통령궁으로 쓰이고 있는 프라하성곽안에 위치해 있다. 교회의 건축이 시작된 것은 600여년전인 1344년이나 증개축이 계속되어 체코 역사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29년이다. 또 성당이 완성되었을 때는 초기 비투스 성당의 최초 설립자이자 보헤미아의 수호성인인 웬체슬라스 왕자 사망 1,000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성당의 서쪽입구 청동문에 이 교회의 역사에 대해 묘사되어 있고, 오랜 세월에 걸쳐 건축되어서인지 건물은 중세의 고딕양식을 바탕으로 여러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며 점차적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것을 볼 수 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내부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천부적 재능의 체코 예술가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황금소로(Zlata ulicka)
16세기의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거리로 후기 고딕으로 지어진 프라하 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있는 좁은 길이다. 동화에 나올법한, 허리를 굽혀야 겨우 들어 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길인데, 원래 이곳은 성에서 일하던 집사와 하인들이 살던 곳이었으나 이후 연금술사들이 모여 살면서 황금 소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하지만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그 집들 사이에 있는 22번지가 실존주의의 대표적 작가인 카프카가 작품을 집필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벌써 500년 이상이 지났지만 이곳은 여전히 16C 옛날 모습 그대로의 거리 모습을 보전하고 있고, 이제는 서점, 레코드 가게, 기념품점과 같은 상점들이 들어서 있어 손님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프란츠 카프카

체코의 수도 프라하 출생. 부유한 유대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폐결핵으로 41세의 생애를 마쳤다. 평범한 지방 보험국 직원으로 근무하였으며, 카프카문학의 독자적인 세계도, 그가 죽기 직전 2개월간의 요양기간과 짧은 국외 여행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떠나지 않았던 프라하의 유대계 독일인이라는 특이한 환경의 소산이다. 독일계 고등학교를 거쳐 프라하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그 사이 훗날 카프카 전집의 편집자가 된 M.브로트를 알게 되어 문학에 대한 정열이 더욱 뜨거워져 단편 《어떤 싸움의 기록 Beschreibung eines Kampfs》(1905) 《시골의 결혼 준비 Hochzeitsvorbereitungen auf dem Lande》(1906) 등을 썼다.

1906년에 법학박사의 학위를 받았고 법률 실습 등을 거쳐, 1908년부터 노동자재해보험국에서 1922년 7월까지 근무하면서, 잡지 《휴페리온》에 8편의 산문을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1912년 초에 《실종자》(후에 《아메리카》로 改題, 1927년 간행)를 착수하였고, 9월에 《심판 Der Prozess》(1925년 간행), 연말에 《변신(變身) Die Verwandlung》(1916년 간행)을 써서, 이 해는 최초의 중요한 결실기가 되었다.

1914년에 《유형지에서 In der Strafkolonie》(1919년 간행)와 《실종자》를 완성하였고, 1916년에는 단편집 《시골 의사 Ein Landarzt》(1924년 간행)를 탈고하였다.

1917년 9월,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아, 여러 곳으로 정양을 겸하여 전전하였고, 그 동안에 장편소설 《성(城) Das Schloss》(1926년 간행) 《배고픈 예술가 Hunger Künstler》(1924년 간행)를 비롯한 단편을 많이 썼다. 1924년 4월 빈 교외의 킬링 요양원에 들어가, 6월 3일 그곳에서 죽었고, 1주일 후 프라하의 유대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은 카프카 문학의 의의 ·문제성은, 무엇보다도 인간 운명의 부조리성, 인간 존재의 불안과 무근저성을 날카롭게 통찰하여,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한 점이다

카프카가 집필했던 22번가









프라하성에서 내려 본 프라하시








'여행 > 동유럽_폴란드외 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체코_프라하 소경 -The end-  (0) 2006.09.15
체코_프라하 카를교  (0) 2006.09.14
체코_프라하 야경  (1) 2006.09.10
체코_체스키크롬로프2/2  (1) 2006.09.08
체코_체스키크롬로프1/2  (0) 2006.09.07
Posted by landart
,

2006년 8월 17일


동유럽의 파리, 프라하

체코의 수도이며, 수많은 역사를 간직한 신비스러운 고도이며, 작은 골목하나에도

중세의 향기가 배어있다. 또 시내 곳곳에는 로마네스크 양식, 고딕양식, 르네상스양식,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남아있다. 프라하에는 시대를 망라한 수많은 중요한 건축물들이

즐비할 뿐만 아니라 1992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과학 유산으로 지정된 역사적 유산이

있는 역사의 중심지이다. 프라하는 EU가 지정한 2000년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명명된

9개의 도시중 하나이기도 하다.


체코에는 또한 카프카와 쿤데라를 비롯한 위대한 작가들도 많이있다. 문화유산을 볼 때에도

드보르작과 스메타나를 비롯하여 수많은 작곡가를 낳은 나라 체코에는 지금도 음악이 번창

하여 체코인이라면 눈구나 음악가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다. 체코를 직접 여행하게 되면

한 번 정도는 직접 콘서트를 감상하면서 체코인들의 음악열기를 느껴보자.









프라하의 야경의 상징, 프라하 성(Prazsky Hrad)
프라하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프라하성은 9세기에 이미 교회가 있던 자리였다. 11-12세기에는 로마네스크 바실리카 교회가 성 비타 로툰다를 대체하기 위해세워졌고 이어 성 조지 교회가 재건되었다. 특히 같은 시기에 외각의 돌담이 축성되어 성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예전에 체코 왕이 살았던 곳으로 1918년 체코 대통령의 거주지가 되었다. 로얄 정원과 남쪽 정원, 갤러리, 앤 여왕의 여름 별장은 여름에 개방한다.










김미연 작


해그림/김명희 작



아름다운 프라하의 휴식처, 카를교(Karluv most)

프라하에 오는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유명 관광지로 12세기에 이미 목제교가 같은 위치에 있었으나 강이 번람할 때 붕괴되어 12세기 중엽에 석재교로 대체되었다.이 석재교 또한 강물로인해 붕괴되어 1357년 카를4세 때 교회 건축가인 피터 팔레지(Petr Parler)가 다시 건축하여 1402년 완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16m의 길이에 16개의 기둥과 3개의 브릿지 타워가 있다. 구시가지 브릿지 타워는 많은 조각상으로 인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브릿지 타워로 꼽히고 있다. 바로크 시대(18C)에 만들어진 30개의 조각상이 다리를 장식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가치있는 조각상은 Matyas Braun과 E. M. Brokoff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프라하 구시가의 상징과도 같은 구시청사의 천문시계
블타바 강 오른쪽 지구인 '구시가광장'에 있는 구시청사는 전형적인 고딕양식의 건물로, 건물벽에 붙어 있는 천문시계가 유명하다. 현재는 건물이 2차 세계대전때 파손되고 천문시계가 있는 70m의 탑만 남아있는데, 매 시간마다 정확히 울리는 천문시계는 천동설에 기초한 두개의 원이 나란히 돌아간다. 또 이곳 안에는 프라하시민들이 결혼식장으로 이용하는 작은 예배당과 탑내부에 후스파 사람들이 수용된 적이 있는 감옥도 있다.


매시각마다 한번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시간을 알리는 이 시계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끊이지 않고 몰리는데, 두개의 원반위에 있는 천사의 조각상 양 옆으로 창문이 열리고, 죽음의 신이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12제자가 창 안쪽으로 천천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시계의 위쪽에 있는 닭이 운다. 이 시계의 제작자에 대해서는 시계 제작의 거장이었던 미쿨라슈가 만들었다는 것과 15세기경 프라하의 천문학자이자 수학교수였던 하누슈가 만들었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누슈가 만들었다는 설에 대해서는 또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의 손재주를 시샘한 누군가가 그의 한쪽눈을 멀게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계를 지키다 쓸쓸히 병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한때 이 시계도 움직임을 멈췄는데, 이후 몇번의 수리와 1948년에 설치된 전동장치에 의해 지금까지 그 아름답고 신기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쌍둥이 첨탑이 인상적인 틴 교회(Tynsky Chram)
고딕 양식의 교회로 세 개의 측면 복도가 있으며 쌍둥이 첨탑의 높이는 80m이다. 교회안에는 16~17C에 프라하의 황제 루돌프 2세의 레지덴스에 머물렀던 덴마크 천문학자 Tycho de Brahe의 무덤이 있다.







김미연 작







체코

중세 유럽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 프라하에 대한 찬사는 무척 화려하다. ‘북방의 로마’·’유럽의 심장’·’흰 탑의 황금 도시’·’유럽의 음악원’ 등이 프라하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모차르트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다는 도시, 프란츠 카프카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는 마력의 도시 프라하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어느 시점에 시간이 멈춘 것 같다.

프라하는 천 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도시다. 역사가 길면 사연도 많은 법이다. 12세기에 이미 중부유럽 최대 도시의 하나로 성장했고,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된 14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15세기에는 후스전쟁의 싸움터가 되었고, 17세기에는 최대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이 이어졌다. 2차에 걸친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혁명,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1968년 자유주의운동과 구 소련군의 탱크 공세까지, 프라하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런 굴곡 많은 역사를 생각할 때 도시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들 한다. 오랜 세파를 이겨낸 프라하는 1989년 무혈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동유럽이 개방되자 유럽 최대의 관광도시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1992년에는 구시가를 중심으로 프라하 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프라하는 음악의 도시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음악가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이 프라하 출신이며, 모차르트는 자기 음악을 가장 잘 이해하는 곳이 프라하라고 말했다. 지금도 프라하 사람들의 음악사랑은 남다르다. 유명한 ‘프라하의 봄’은 사실 매년 5월~6월 사이에 열리는 체코 최대의 음악축제 이름이었다. 1968년 체코의 자유주의정권 시대를 이 음악축제에 빗대어 쓴 신문기사 덕분에 지금은 체코 자유주의 운동의 대명사가 되었다.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군이 수백 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진격해왔기 때문에 자유주의 정권은 불과 8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지금도 ‘프라하의 봄’ 축제는 계속되고 있으며, 봄이면 많은 이들이 이 축제를 보려고 프라하를 찾는다.

천년 고도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채워져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부터 초·중·후기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아르누보 양식까지 그야말로 건축양식의 역사를 보는 듯하다. 카프카의 소설 《성》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프라하 성은 궁과 교회, 성당 등이 어우러진 건물들의 집합체로 9세기경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매일 낮 12시에 열리는 위병 교대식과 장엄한 성 비투스 성당이 특히 시선을 끈다. 구시가 광장은 11세기 이래 시장이 들어섰던 삶의 터전이면서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화형, 1948년 공산주의 혁명의 발발 등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광장 주변에는 중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주거지와 구 시청, 틴 교회, 킨스키 궁전 등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많다. 특히 구 시청 건물의 천문시계가 유명한데, 매 시 정각이 되면 시계 위의 조그만 창문에서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여행 > 동유럽_폴란드외 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체코_프라하 카를교  (0) 2006.09.14
체코_프라하성, 황금소로 등  (0) 2006.09.13
체코_체스키크롬로프2/2  (1) 2006.09.08
체코_체스키크롬로프1/2  (0) 2006.09.07
오스트리아_미라벨정원  (0) 2006.09.06
Posted by landart
,

2006년 8월 17일


체스키 크룸로프 성(Zamek)

이 성은 체스키 크룸로프와 그 역사의 시작을 같이 한다. 13세기 중엽, 대지주였던 비텍(Vitek)가가 블타바 강이 내려다 보이는 돌산 위에 고딕 양식의 성을 건설함으로써 이 도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700년이 흐른 고도로서의 체스키 크룸로프를 상징하는 중요한 상징물이며, 이 도시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둥근 탑과 길다랗게 늘어져 있는 옛 건물들은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옛 왕궁으로 쓰였던 이 건물은 두터운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중세 귀족들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는 방과 식당, 창고, 부엌, 접견실 등에 각종 공예품과 그림,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보헤미아 성으로서는 프라하 성 다음으로 규모가 큰 것이며,


성을 건설한 비텍가 이후에 14세기에는 보헤미아의 대영주 로젬베륵(Rozmberk)에 의해 도시가 황금기를 누리게 되었고, 이 도시는 이후 루돌프(Rudolph) 2세와 에겐베르그(Eggenberg)를 거쳐 슈바르젠베르그(Schwarzenberg)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슈바르젠베르그스는 그들의 왕궁이었던 성을 포기했고, 1947년에 성은 슈바르젠베르그스가 재산의 잔재로서 공산 정부에 넘겨졌다. 이후 성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고 몇몇 지역이 복귀되기도 했다.


성은 4개의 정원을 통해 3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번째 정원이 있는 부분과 두번째 정원이 있는 부분, 세번째와 네번째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는 부분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성을 드나드는 나무문을 붉은 문(Cervena brana)이라고 하며, 그 문을 통과하여 안쪽 정원의 정면에 서 있는 건물(Hradek)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문화와 역사의 도시로 이름 높은 체스키 크롬로프는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남서쪽으로 300km 떨어진 곳에 있다. 건축된 지 700년이나 된 크롬로프 성을 비롯해 많은 건축물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과거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는 낙후된 도시에 불과했던 크롬로프는 동구권 개방 이후 얀 보드로슈 시장을 비롯한 시민 전체가 도시 복구와 홍보에 발벗고 나서 역사의 향기를 되찾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역사적인 고도 크롬로프가 베일을 벗고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2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부터이다. S자형으
로 흐르는 블타바 강 줄기 언덕에 세워진 이곳에는 문화유적으로 지정된 건축물이 300개 이상이나 있으며 가까운 곳에 있는 수도원과 고성까지 합하면 문화재 수는 거의 400개에 이른다. 크롬로프는 1253년 처음 도시로 형성되었으며 1302년 이곳을 다스리게 된 로젠베르크 가문이 교회와 수도원, 궁전과 학교 등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한 곳이다. 그 후 새로운 영주들이 이곳을 다스리는 동안 시대별로 다양한 건축물들이 들어섰으며 마치 동화 속의 도시처럼 이름난 곳이 되었다. 하지만 중세시대의 여러 전쟁의 와중에서 크롬로프는 파괴되었고, 무너진 건축물을 보수할 재력도 없어 그대로 방치한 것이 오늘날 옛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게 해 오히려 잘된 일이 되었다.

크롬로프 성에 들어서면 건축물 외벽을 다채롭게 장식한 것을 많이 보게 되는데 자세히 보면 손으로 그려진 것이 많다.

원래는 색깔 있는 돌로 꾸며져야 되는 것인데 돈이 없어 과거에 임시변통으로 이렇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워낙 잘 그려져 있어 멀리서 보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건축물 같다. 독일 남부의 뉘른베르크· 레겐스부르그·파사우, 오스트리아의 린츠 등은 과거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던 곳으로 라인강을 따라 황제와 제후들이 대관식 등의 행사를 위해 배를 타고 자 주 오갔던 곳이다.

오늘날에는 ‘황제와 제후의 가도(街道)’라는 여행코스가 만들어져 있으며 배를 타고 가다가 유서깊은 도시에 내려 많은 것을 볼 수가 있다. ‘황제와 제후의 가도’에 속하는 도시에는 으레 장려한 궁(宮)과 성(城), 그리고 커다란 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황제와 제후의 가도’의 종착지인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자동차로 국도를 따라 2시간 가량 달리면 크롬로프에 닿는다. 가는 길은 몰다우 강을 거슬러 강변을 끼고 달리는 도로로 넓은 강과 주변의 울창한 산림들, 자연보호구역, 국립공원 등이 연이어 나타나므로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필자가 방문했던 이 곳 날씨는 영상의 기온이었으나 거의 매일 구름과 짙은 안개가 끼고 해가 짧아 오후 4시 반이면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곤 했다. 가는 길에 해가 반짝하고 나타나 ‘내일은 멋진 풍광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겠구나’하고 즐거움을 떠올리는 순간 다시 구름과 안개가 끼어 실망에 빠지게 하던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크롬로프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였는데 도시 전체는 이미 어둠에 잠기고 가로등이 주변을 밝혀주고 있었다. 크롬로프에는 콘크리트로 지어진 초대형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중세시대 이래 세워진 건물들만 묵묵히 도시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옛 건물을 현대식으로 개조해 만든 작은 규모의 민박집에다 일행과 함께 짐을 풀었다. 민박집은 샤워시설과 난방시설을 잘 갖추고 있었는데 공산권에서 벗어나 개방된지 몇 해 안 된 때문인지 물가는 싼 편이었다. 크롬로프는 도시 전체가 걸어서 여행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짐을 풀고나서 즉시 카메라를 들고 야경 촬영을 시작했는데 우뚝 솟은 성당 탑에 조명을 해놓은 모습이 너무도 화려했다. 굽이굽이 강변을 끼고 빨간 지붕의 집들이 줄지어 있는가 하면, 몇 세기에 걸쳐 만든 궁전이 고즈넉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러 간 식당 역시 옛 건물을 개조해서 쓰고 있었다. 보수시에도 벽이나 문 등 한쪽 모서리는 그대로 두어서 과거 모습을 알아볼 수 있게 해두었다. 식당은 건물 1층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몇 개의 벽으로 나뉘어 있었다.

블타바 강은 물이 맑아 숭어가 잘 잡힌다고 한다. 그래서 숭어요리와 시원한 맥주로 느긋한 저녁시간을 보냈다. 체코사람들은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식사할 때 맥주를 많이 마신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크롬로프를 돌 아다녀보니 집들은 예상보다 컸지만 골목길은 좁은 편이었다. 담장 없는 집들이 길을 따라 길게 연결되어 있다. 궁전에서 바라보는 빨간 지붕의 집들은 맑고 푸르게 굽이치는 강물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크롬로프에는 골목마다 예쁘게 꾸민 집들과 토산품 가게가 들어서 있으며 좀 더 넓은 광장으로 가면 레스토랑과 카페, 그리고 전문 화랑과 골동품상, 고서점들이 자리한다. 골목길은 포장석으로 다듬어져 있고, 차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이 많아 역사여행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관광객을 위한 상점, 호텔, 레스토랑, 카페, 은행, 관광안내소 등은 시청사 앞 광장 주변에서 만날 수 있다.
크롬로프를 찾는 사람들은 해마다 늘고 있다. 특히 매년 6월이면 인구 1만 5000명의 시골 크롬로프는 시끌벅적해진다.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를 비롯해 스웨덴 국왕 카를 구스타프 16세, 영국의 찰스 왕세자 등 세계적 명사들이 찾아오는 음악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참석자들은 13세기초 건축된 크롬로프 성의 안마당에서 바로크 시대 악기로 연주되는 중세 음악에 귀를 기울이거나 18세기 실내장식이 그대로 남은 2층 가면의 방에서 열리는 귀족적인 가면무도회에 참석한다.

가파른 성벽 주변에는 계단식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서 해마다 여름에 세계적인 음악축제가 3주간 열린다. 바로 아래 강이 흐르고 건너편에 관중석이 있는 낭만적인 곳에서 신명난 축제가 열리는 것인데, 골목 몇 군데를 통제하고 곳곳에 의자를 놓으면 그 곳이 객석이 된다. 청아한 물소리와 시원한 강바람, 울려퍼지는 선율,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여름밤의 음악축제다.

베스트샷

http://landart.tistory.com/400

'여행 > 동유럽_폴란드외 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체코_프라하성, 황금소로 등  (0) 2006.09.13
체코_프라하 야경  (1) 2006.09.10
체코_체스키크롬로프1/2  (0) 2006.09.07
오스트리아_미라벨정원  (0) 2006.09.06
오스트리아_짤쯔부르그  (0) 2006.09.05
Posted by landart
,

2006년 8월 17일


호텔앞에서











QUALITY HOTEL POINT





블타바 강(Vltava River)

체코의 민족음악가라 칭송받는 <나의 조국>의 작곡가, 스메타나의 유명한 교향곡 중에 <몰다우>라는 곡이 있다. 몰다우라는 말은 블타바의 영문 이름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몰다우 강이 바로 이곳 체코에서는 블타바 강이라 불린다. 프라하 도시 한 가운데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는 이 강은 체스키 크룸로프를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바바리아를 서로 분리시키는 슈마바(Sumava) 산 아래에서 S자형으로 흐르고 있다.


불타바는 가장 긴 체코의 강으로서 그것의 주류는 Eerny potok라 불리며, 해발 1,172높이의 Eerna산 남동쪽 계곡에서 흘러온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이 강변을 따라 건설된 도시로서 중세의 아름다움을 지닌 이 도시의 모습을 지금까지 간직하게 해준 것이 블타바 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타바 강의 위쪽 끝에는 커다란 습지가 있고, 계곡이 좁아 차차 넓히고 있는 중이라 한다. 체스키 크룸로프를 흐르는 블타바 강은 총 144m 길이, 총 544.9km2 면적이다









망토다리

버스주차장에서 구시가지로 갈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곳으로 이곳을 통과해야 아름다운 도시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이 다니는 다리 아래 쪽 길은 처음에 해자였으며 다리는 서쪽 성을 연결하는 부분이다. 이 다리의 이름은 서쪽 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요새화 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3층으로 된 아치모양의 다리는 무거운 돌기둥이 버티고 있고, 낮은 통로는 극장 무도회 홀과 연결되어 있으며 가장 위쪽 통로는 성 정원이 있는 겔러리로 통한다. 연결된 복도를 통과하기 위해서 성의 지붕을 가로질러서 작은 수도원까지 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도원으로 가는 통로가 폐쇄되었다.
다리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15세기 문서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다리는 나무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합스브륵의 루돌프2세 황제 때는 이 다리를 들어올릴 수 있는 도개교(跳開橋)로 불렀다.
이 지역의 새로운 주인이 된 통치자 에겐버르그(Johan Christian I. von Eggenberg)는 1686년 윗쪽에 있는 정원과 연결 할 새로운 나무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복도를 덮은 부분의 첫 번째 나무다리는 1706년에 절반만이 만들어 졌다. 그 입구는 건물 2층 겔러리에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극장과 다리는 계단으로 연결되었다. 1707~1708년엔 낮은 복도를 만들었다. 이 복도는 무도회 홀과 극장의 로얄 박스와 연결되어 있다. 1741년 프랑스가 침공 했을 때 망토다리 위쪽 긴 복도가 내려 앉았다. 그리고 1748-1749에 더 높게 다시 만들었다. 1764년 장기간에 걸친 다리 재공사 계획을 새웠다. 동쪽과 서쪽성의 마당을 연결하는 주요 부분은 돌로 만들었으며 낮은 복도도 새로 만들었다. 1777년 다리가 완전히 완공되면서 지금까지 남아있다.









체스키의 중앙광장인 스보르노스티 광장(Svornosti Square)
16세기 이래로 시청사가 자리하고 있는 스보르노스티 Svornosti 광장은 이 도시의 중앙광장으로서 1993년 체스키 크룸로프가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에는 시청과 함께 이 도시의 상징으로 불리고 있다. 또 광장 한가운데는 1715년 추수감사절에 Matous Jackel에 의해 세워진 Marian Plague Column이라는 상징물이 자리하고 있다.








체코
동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체코는 늘 최고의 찬사를 받는다. 중세를 그대로 옮겨놓은듯한 작은 거리들과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프라하성은 우리를 중세로 초대한다. 음악과 인형극,낭만과 역사가 살아 숨쉬는 체코에서 중세의 숨결을 느껴보자.

◈국명 : 체코 공화국 (The Czech Republic)
(1993.1.1 체코슬로바키아연방은 체크 공화국과 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분리)
◈수도 : 프라하 (약1,161,938명, 2003.1.1 현재)
◈인구 : 10,219,000명(2003.9.30.현재)
◈면적 : 78,864㎢ (한반도의 약 1/3, 평지:산악=7:3)
◈주요도시 : 브르노(Brno), 오스트라바(Ostrava)
◈주요민족 : 체코인(Czech 94%), 슬로바키아인(Slovak 3%), 폴란드인, 독일인, 헝가리인 등
◈주요언어 : 체코어(Czech)
◈종교 : 로마 카톨릭(Roman Catholic 39%), 신교(Protestant 2%).


지리
총 면적 78,864㎢의 체코는 중부 유럽에 속해 있고 주위로 독일,오스트리아,폴란드,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1,000-1,600m의 산맥에 둘러싸인 보헤미아 분지와 모라비아로 나뉜다.

기후
이 나라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사정이 다른 2개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부의 보헤미아(수도 프라하가 있다.) 동부의 모라비아(중심지는 브르노)가 그것이다. 대체로 온화한 대륙성 기후로 나라의 대부분에 500mm 이상의 강우량이 있으며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온다. 대륙성기후와 해양성 기후의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다.

인구구성
총인구의 94%가 체코인이고 나머지 4%가 슬로바키아인이다. 폴란드와 경계지인 오스트라바에 소수의 폴라드인이 거주하고 있고,보헤미아에 약 6만의 독일인이 살고 있다.

언어
언어는 체코어, 외국어는 독일어가 가장 잘 통하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발음하기 어려운 언어로 체코어가 기네스북에 올라져 있다.

종교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깊은 연관을 가져왔으나,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종교가 사회주의 이념에 반한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아왔으며, 89.11 민주화 혁명 이후에 비로소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주변국가에 비해 종교적인 성향이 강하지 않은 바, 전체 인구의 약 40% 내외만이 종교를 갖고 있는 상태이며 전체인구의 종교 구성비 : 로마카톨릭(39%), 신교(2.5%), 후스파(1.7%) 로 이루어져 있다.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체스키 크룸로프

(Cesky Krumlov)

체코 공화국의 남동쪽에 자리한 중세의 성도시인 체스키 크룸로프는 인구 약 1만 5천의 작은 도시다. 체스키 부데요비체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져 있으며, 블타바 강변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강은 남쪽으로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바바리아를 서로 분리시키는 슈마바(Sumava) 산 아래에서 S자형으로 흐르고 있다. 13세기의 한 지주가 이곳에 성을 건설하면서 이 도시의 역사도 시작되었는데, 이미 700년의 역사가 흘렀으며 중세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겨져 있다. 붉은 기와지붕의 중세적인 건물들과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고딕양식의 성, 바로크와 르네상스 등 중세의 미술양식이 섞인 정원들 등이 그것이다.


이 도시가 가장 번성했던 때는 14세기 초에서 17세기 초까지의 기간이며, 그 후 18세기에 슈바르젠베르크(Schwarzenberg)의 소유를 마지막으로 공산정권하에 도시가 속하게 된다.


성아래로 구시가지가 발달해 있는데, 지금까지도 이 도시의 중심으로 각종 상점과 박물관 등이 늘어서 있으며 지금까지도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1992년에 프라하, 성 요한 네포묵 순례교회, 쿠트나 호라, 호란 비체 등과 함께 보헤미아 땅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여행 > 동유럽_폴란드외 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체코_프라하 야경  (1) 2006.09.10
체코_체스키크롬로프2/2  (1) 2006.09.08
오스트리아_미라벨정원  (0) 2006.09.06
오스트리아_짤쯔부르그  (0) 2006.09.05
오스트리아_짤즈감머굿 2/2  (0) 2006.09.04
Posted by landart
,

2006년 8월 16일



미라벨 정원

잘츠부르크 신시가지의 미라벨 궁전 앞에 펼쳐져 있는 정원으로, 중앙역에서 라이너슈트라세를 따라 조금만 내려오면 오른쪽에 있다. 미라벨 궁전은 1606년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를 위해 지었으며, 당시는 알트나우라고 불렀다. 후임자인 마르쿠스 시티쿠스 대주교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정원은 1690년 바로크 건축의 대가인 요한 피셔 폰 에를라흐(Johann Fischer von Erlach)가 조성하였고, 18세기에 건축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Johann Lukas von Hildebrandt)가 개조하였으나 1818년 화재로 파괴된 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예전에는 궁전에 속해 있어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었지만 지금은 완전 개방하고 있다.

전체적인 조화를 중시하여 조성하였으며, 분수와 연못, 대리석 조각물과 많은 꽃들로 잘 장식되어 있다. 중앙분수 주위에는 1690년 모스트(Most)가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을 조각한 작품이 늘어서 있고 그 옆에는 유럽의 많은 바로크 예술품들을 전시해 놓은 바로크 박물관이 있다.

정원 서쪽에는 1704~1718년에 만든 울타리로 주위를 두른 극장이 있고, 북쪽 문 앞에는 정교한 청동조각으로 꾸민 패가수스 분수가 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에서 여주인공 마리아가 아이들과 '도레미 송'을 불렀던 곳으로 더욱 널리 알려졌으며, 멀리 보이는 호헨잘츠부르크성(城)의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미라벨 궁전은 규모는 작아도 콘서트가 많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한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궁전 내 대리석 홀에서 대주교를 위해 연주를 하였으며, 지금도 실내악 연주회가 자주 열린다. 또 세계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결혼식이 열리는 식장으로도 인기 있는데, 결혼식이 끝나면 꽃 장식 마차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돈다. 미라벨 정원 맞은편의 미라벨 광장에는 교외로 나가는 많은 관광버스들이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호텔에서 비엔나 쪽으로

'여행 > 동유럽_폴란드외 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체코_체스키크롬로프2/2  (1) 2006.09.08
체코_체스키크롬로프1/2  (0) 2006.09.07
오스트리아_짤쯔부르그  (0) 2006.09.05
오스트리아_짤즈감머굿 2/2  (0) 2006.09.04
오스트리아_짤즈감머굿 1/2  (0) 2006.09.03
Posted by landart
,

2006년 8월 16일

오스트리아 짤즈부르그







오스트리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본 사람은 영화 속의 무대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의심했을 수도 있다. 중세의 건축물과 호수와 숲, 그리고 하얀 눈이 덮인 산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환상의 세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도시가 바로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이다.

빈에서 서쪽으로 300km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 잘츠부르크는 음악가 모차르트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특히 모차르트의 생가는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이다. 그곳에는 모차르트가 사용하던 바이올린과 자필 악보, 가족의 초상화,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매년 여름 그를 기리는 '잘츠부르크 음악제'가 열리면, 도시는 온통 관광객들로 북새통이 되곤 한다.

잘츠부르크로의 여행은 중세의 도시로 떠나는 역사여행이자 모차르트를 만나는 음악여행이며,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속으로 떠나는 시네마여행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중세유적과 호수와 숲, 알프스 산맥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1996년, 유네스코가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잘츠부르크는 '소금의 산'이라는 뜻이다. 7세기 후반만 해도 황량했던 도시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라이헨할 소금광산 덕택이다. 광산의 소금

으로 부를 쌓은 잘츠부르크는 1077년부터 묀히스베르크산 언덕에 호헨잘츠부르크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후 후기 고딕양식과 바로크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도시 여기저기에 들어서자, 이 도시는 '알프스의 북로마'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도시에서 주목할 것은 수도원과 대성당이다. 700년경에 세워진 베네딕트회의 성페터수도원과 논베르크는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다. 774년에 세워진 대성당, 800년경에 건축된 성미하엘성당, 카이에타나성당, 에어하르트성당, 대주교궁전, 미라벨궁 등은 잘츠부르크의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준다.






오늘은 모짜르트의 생가입니다.
외가는 오스트리아 짤즈 감머굿
여기는 짤쯔부르그입니다.

엄청난 인파에 배가 아플정도입니다.
분명 관광도 산업임을 보았습니다.

3백년이 넘었다는 카페에 선 돈내고 자리 잡으면 영광이고
가격이 엄청나는 수제 초코렛 가게에 선 물건을 사면 기쁨입니다.
그래도 거리에 넘처 흐르는 낭만에 절로 업되는 기분...그거,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모짜르트 생가

잘츠부르크의 가장 중요한 여행지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중심 쇼핑가인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에 있는 당시 중산층이 거주하던 황색 건물 3층에서 1759년에 태어나서 17세까지 살았다. 어릴 때의 작품은 거의 모두가 이곳에서 작곡되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층에는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침대, 모차르트가 쓰던 바이올린, 낡은 피아노, 필사본 악보 그리고 초상화,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모차르트와 그의 오페라, 3층에는 모차르트의 가족들, 4층에는 잘츠부르크에서의 모차르트의 생활상이 소개되어 있다. 이 곳은 전 세계의 많은 음악 애호가들이 생가를 방문하고 있다.







짤쯔부르크 대성당
짤츠부르크 대성당 내부
짤츠부르크 대성당 내부
위에서 본 짤츠부르크 대성당
짤츠부르크 대성당 전경
Salzburg´s Cathedral_3

잘츠부르크의 음악제가 처음 시작된 대성당 광장에 있는 대성당은 구시가의 중심에 있다. 이 곳에는 1771년에 제작된 마리아 상이 서 있다. 원래의 대성당은 8세기에 지어졌으나 화재로 파괴되었다. 현재의 돔은 17세기 초 40년에 걸쳐 완공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말기적 성격을 띠고 있는 바로크식 건축물로 이곳에서 1756년 모짜르트가 세례를 받았다.

입구에 들어서면 대리석 조각상인 베드로와 바울, 잘츠부르크의 수호 성인 들이 있다. 세계의 청동 대문은 믿음, 소망, 사랑을 상징한다. 안에는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데 6천가닥의 파이프가 사용되어졌고, 음색을 바꾸는 레지스터의 수도 101개나 된다고 한다. 또한 10000명을 수용할수 있는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큰 바로크 성당이다. 대성당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대성당의 보물, 그림, 시계, 가구등을 전시하고 있는 대성당 박물관이 있다.



레지덴츠 광장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넓은 광장으로 구시가의 중심 광장이다.

광장 중앙에는 1659-1661년에 만들어진 바로크 양식의 분수가 서 있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은

12세기에 시작하여 16,17,18세기 동안에 재건되어진 레지덴츠다. 레지덴츠는 역대 대주교들의 궁전으로

내부에는 사교의 방에는 사교들의 침실과 대사교의방, 도서관등이 있다. 또한 모차르트가 연주했던 홀을

비롯해 황제의 방, 프란치스카나 교회로 빠지는 숨겨진 문등이 있다.

레지덴츠 갤러리에는 렘브란트, 루벤스등 16-19세기에 이르는 유럽화가들의 그림인 회화가 약200여점이

소장되어 있다. 4마리의 말이 물을 내뿜는 레지던츠 분수는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레지던츠

광장의 종탑에서는 매일 07:00, 11:00, 18:00에 종이 울린다. 그냥 종소리가 아니라 35개의 크고 작은 종이

맑은 음색으로 모짜르트의 가극 "돈 죠반니"에 나오는 미뉴에트등을 연주한다.



호엔짤쯔부르크 성

호엔잘츠부르크 성은 원래 1077년에 게브하르트 대주교 지시하에 건축이 시작하여 17세기에 지어진 중세의 성으로 구시가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시내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잘츠부르크의 상징물이다. 동시에 중유럽에서 현재까지 파손되지 않고 보존된 성들 중 가장 큰 성으로서 웅장한 성의 그림자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이다.

이곳은 석회암 위에 세워졌는 잘츠흐강 보다 120m 높이로 세운 웅장한 대주교 성채이며 성 안에는 의식 홀과 황금홀, 1501년에 만든 고딕 앵식의 마 요르카구이 난로, 1501년에 만든 수동식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이 오르간은 하이든, 모차르트가 쓰던 것이다. 또한 건축물 내부에는 부르크 박물관이 있어 중세의 고문기구, 무기류, 공예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구경거리가 있어서 흥미 진지한 곳이다.


















후니쿨라 등반열차

거의 60도는 넘어 보이는 사각을 초고속으로 오르내렸다.








잘츠부르크 (Salzburg)

요약

오스트리아 중서부 잘츠부르크주(州)의 주도. 인구 14만 4692(1998).

설명

오스트리아 중서부 잘츠부르크주(州)의 주도. 인구 14만 4692(1998). 잘차흐강에 면해 있으며 해발고도 425m이다.
묀히스베르크산(542m) 위에 마을의 상징인 호엔잘츠부르크성(城)이 있으며 이곳에서 시가지와 주변의 산지를
전망할 수 있다. 독일 남부와 빈을 연결하는 고속도로와 철도가 통과하는 국내 교통의 요지이며 유럽 유수의 관광
도시이다. 로마시대에는 소금·광산물 교역의 중심지였고, 8세기 말에는 대주교관구 수도가 되어 가톨릭문화의 중
심도시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내에는 바로크양식·고딕양식 등 건조물이 많이 남아 있으며 종합대학이 있다.
W.A. 모차르트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며 모차르트의 생가(박물관), 모차르티움음악학교가 있다. 매년 여름 모차
르트 작품을 중심으로 한 잘츠부르크음악제가 열려 세계 각지에서 모차르트음악 애호가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역사
일찍이 고대로마의 도시가 이 지역에 소재하였지만 수도원과 대성당 건립으로 도시의 기초가 세워진 8세기 무렵
부더 상인들이 정착하여 996년 시장개설권(화폐주조권)을 획득하였다. 1077년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호엔잘츠부
르크성채를 구축하였고 12세기에는 시 구역을 잘차흐강 대안(對岸)까지 확대하였으며, 13세기 중엽에는 시벽(市
壁)을 구축하고 시참사회제도(市參事會制度)도 성립시켰다. 16세기 시민들은 대주교의 지배권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하였지만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 상업에 의한 경제적 번영을 이루는 한편 대주교의 보호 아래 바로크
문화가 융성하였으며, 1623년 대학도 개설되었다. 18세기에는 모차르트 부자(父子)가 대주교 궁정작곡가로 활동
하였다. 19세기초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어 대학도 폐교되었고(1964년 다시 개교), 정치적 중심지의 기능을 상실하
면서 쇠퇴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제1차세계대전 뒤 잘츠부르크음악제(1920년 이후)의 개최로 외국인 방문이 증가
하고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Posted by landar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