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

 

아르노강()의 퇴적작용으로 인하여 현재의 해안선은 피사시()에서 서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항만도시로서의 의미는 지니지 못한다.

11세기 말에 제노바·베네치아와 대립하는 강력한 해상공화국으로서 번영하였다.

13세기에 이르러 제노바에 패하였으나 그 후에도 문예의 중심지로서 번창하여, 갈릴레이도 이곳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아르노강 하구 부근에 있는 오래된 도시로 도로·철도 등 교통의 요지이며

기계공업을 비롯한 많은 근대공업, 대리석 가공업 등이 성하다.

주변 농업지대에서는 포도·올리브·곡물 등의 재배와 목축이 활발하다.

피사 대성당에 부속된 사탑은 갈릴레이의 이름과 더불어 유명하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피사의 사탑

 

피사의 십자형 두오모는 그 원주형 캄파닐레(종탑)와 원형 세례당과 함께 세계에서도 가장 보기드문 건물군 중의 하나이다.

캄파닐레는 묘하게도 대성당의 앞편이 아닌 뒤편을 향한 위치인데, '기적의 들판'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볼 수 있다.

여덟 줄의 열주형 아치가 에워싸고 맨 꼭대기에는 종루를 올려놓은 대리석 석공술은 교회의 앱스와 그 테마 면에서 연결이 되어 있다.

이 종탑은 원래 수직으로 똑바로 서 있도록 설계되었으나, 착공 때부터 징크스에 걸려 있었던 것 같다.

진흙, 고운 모래, 조개껍데기 등으로 구성된 미끄러운 토대 위에 밑돌을 놓는 바람에 곧 눈에 띄게 함몰이 되었고,

1178년에는 겨우 세 층밖에 올리지 못한 상황에서 공사가 중지되었다.

기울어지는 각도가 점점 더 심해지면서 구조 자체가 그 축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 남쪽 부분이 표면을 향해 위로 쳐들리게 되었고,

1272년 경사의 장력을 상쇄시키기 위해 더 무거운 자재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1360년에는 종루로 올라가는 일곱 번째 코니스로부터 남쪽과 북쪽의 층계의 개수를 4개와 6개로 번갈아가며 바꿈으로써

중력에 저항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도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1838년 기단부 주위로 통로를 파는 바람에 홍수가 나서 더욱 심하게 기울어지는 역효과만 초래했다.

1173년 이래 이 '기울어지는 탑'은 세간의 화제였다.

1991년부터 2001년에 걸쳐 현대 기술이 허락하는 온갖 공학적 재주를 다 동원하여 기단부 재건 공사가 진행되었다.

전문가들은 이 탑을 후세에게 보전하기 위해 흙을 추출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사의 사탑 [Tower at Pisa]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2009. 1. 20., 마로니에북스)

 

 

 

 

 

 

 

 

 

 

 

 

 

 

 

 

 

 

 

 

 

피사 대성당

 

1063년 부스케투스의 설계로 착공, 1118년에 헌당식()을 올렸고,

1272년 이후에 라이날두스에 의해 회당부()가 서쪽으로 연장()되었다.

전체는 어느 것이나 바실리카풍의 단면()을 가진 5회랑식() 회당부와,

좌우의 익랑()으로 된 라틴 십자() 플랜을 나타내며, 교차부()에는 드물게 보이는 타원형의 원개()를 올려놓았다.

대리석의 가로무늬 모양의 석조물 배합이 선명한 외부는 전면에 장식적인 둥근지붕이 있는 복도와 측주()를 둘러쳤으며,

서쪽 정면()의 상부 4층은 개방된 열주()로 장식되었다.

대성당의 앞에 독립해서 세워진 세례당()은 디오티살비의 설계에 의해 1153년에 착공되었으며,

2층의 회랑을 가진 내부는 원추상()의 궁륭(窿)의 천장으로 덮이고, 이것을 외부의 원개가 싸안은 특수한 이중구조로 되었다.

고딕풍의 외관은 N.피사노도 협력했다고 전하는 13세기의 개장()에 의한 것이다.

대성당의 배후에는 ‘피사의 사탑’으로서 이름높은 종탑(:캄파닐레)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사대성당 [Duomo di Pisa, ─大聖堂] (두산백과)

 

 

 

 

 

 

 

 

 

 

 

 

 

 

 

 

 

 

 

 

 

 

 

 

 

 

 

 

 

 

 

 

 

 

 

 

 

 

 

 

 

 

 

 

 

 

 

 

 

 

 

 

 

 

 

 

피사모 두오모 광장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82356&cid=47318&categoryId=47318

 

 

 

 

 

 

Posted by landart
,

 

 

 

 

 

 

 

 

 

 

친퀘테레

 

5개 마을은 제노바에서 라 스페치아(La Spezia)로 향하는 중간에 있는 마을로

몬테로소 알 마레(Monterosso al Mare)와 베르나차(Vernazza), 코르닐리아(Corniglia), 마나롤라(Manarola), 리오마조레(Riomaggiore)이다.

20세기에 이탈리아의 지역 중 외국의 관광객에 의해서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곳으로 발견되었고

해안과 5개 마을, 주변의 언덕은 친퀘테레(Cinque Terre) 국립 공원으로 보호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18Km에 이르는 가파른 바위 해안을 따라 계단식의 언덕과 농장,

과수원이 있는 리비에라(Riviera) 해안에 위치하는 5개의 작은 마을을 연결한 관광노선을 의미한다.

바다 위 언덕에 있는 오래된 도보용 도로와 노새 길은 올리브 나무 숲과 포도 농장, 과수원, 밤나무 숲을 따라 지난다.

도보용 도로 중에서 리오메기오레(Riomaggiore)와 메네롤라(Manarola) 사이의 도로는 아름다운 경치와 걷기 쉬운 곳으로

‘연인의 길’이라는 의미를 지닌 ‘비아 델아모르(Via DellAmore: Lovers Walk)’라고 한다.

각 마을은 라 스페치아(La Spezia)에서 제노바로 향하는 기차로 연결되어 있고

몇 분의 거리에 있으며 리오메기오레(Riomaggiore)와 몬테로소(Monterosso) 사이의 철로는 터널로 연결되어 있다.

철도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친퀘테레 카드(Cinque Terre Card) 시스템이 있다.

마을 도로가 좁아 자동차를 이용하기 어렵고, 해안을 따라 각 마을을 운행하는 선박이 운항된다.

올리브 오일과 와인을 생산하고 포카치아(Focaccia)라는 지역 특산 빵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친퀘테레 [Cinque Terre] (두산백과)

 

 

 

 

 

 

 

 

 

 

 

 

 

 

 

 

 

 

 

 

 

 

 

 

 

 

 

 

리오마제래 마을

 

이탈리아 북부의 리구리아 주() 라스페치아(La Spezia)지방에 속하는 마을이다.

대서양에 면해있는 가파른 절벽 해안가 협곡에 위치하고 있다.

라스페치아에서 서쪽 대서양 절벽 협곡을 따라 북쪽으로 작은 어촌 마을들이 이어져 있는데

이들 어촌 마을 중 유명한 곳 다섯곳의 마을을 친퀘테레(Cineque Terre)라고 부른다.

리오마조레는 이들 다섯개의 마을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첫 번째 마을이다.

13세기초부터 이곳에 마을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전해지며 오래된 고성유적이 남아있다.

협곡의 비탈을 개간하여 포도를 재배하고 건조한 해풍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이 유명하다.

집들은 해안가 절벽 바위 위에 지어져 있고 연한 붉은색과 노란색, 분홍색 등 파스텔풍의 색채로 칠해져 있어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라스페치아에서 철로가 연결되며 라오마조레 역(train station)이 있다.

해안선을 따라 절벽에는 비탈진 길이 나 있는데

'사랑의 샛길'이라고 불리는 '델 아모레(dell'Amore)'는 친퀘테레 중 리오마조레와 마나롤라(Manarola)를 연결하고 있다. 

해안에는 방파제가 있고 관광유람선이 정박하며 370번 도로가 산길을 따라 정기 버스가 라스페치아로 연결된다. 

마을의 중심지인 콜롬보(Colombo) 거리에는 많은 음식점, 술집, 기념품 상점과 카페들이 줄지어 있다.

하지만 거리가 좁은 골목길이기 때문에 자동차 진입이 불가능하고 마을 입구에 작은 주차장이 있지만 성수기에는 주차가 불가능하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절벽을 내려가면 가갈밭 해변이 있어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붐빈다.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이자 마키아이올리파에 속해있었던 텔레마코 시뇨리니(Telemaco Signorini)가

리오마조레에서 예술적인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리오마조레 (두산백과)

 

 

 

 

 

 

 

 

 

 

 

 

 

 

 

 

 

 

 

 

 

 

 

 

 

 

 

 

 

 

 

 

 

 

 

 

 

 

 

 

 

 

 

 

 

 

 

 

 

 

 

 

 

 

 

 

 

 

 

 

 

 

 

 

 

 

Posted by landart
,

세관

 

 

 

 

 

산타마리아 살루떼 성당

 

 

 

 

 

 

 

 

 

 

 

 

 

 

 

 

 

 

 

 

 

 

 

 

 

 

리알토 다리

 

"베네치아에서는 리알토 다리(Rialto Bridge)를 보아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다리이다.

예전부터 리알토 다리 주변은 상권의 중심가였다.

12세기 경, 넘쳐나는 상품들과 한쪽 둑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요를 배가 감당하지 못하자

다리 건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16세기가 될 때까지 제대로 된 다리 없이 나무 다리를 임시로 사용하다가,

16세기 말 안토니오 다 폰테가 돌로 된 최초의 다리를 설계·건축하였는데 그 다리가 바로 리알토 다리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다리는 1854년 아카데미아 다리가 지어지기 전까지 대운하를 건너는 유일한 다리였다.

이 다리를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베네치아의 첫 번째 다리라는 사실,

아치 모양의 아름다움, 다리 위에 화려하게 장식된 아케이드 점포들이다.

대운하에서 곤돌라를 타고 보는 모습이 아름답고 계단식 다리 위는 귀금속과 가죽 제품 등을 파는 점포들과

그것을 구경하는 관광객,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항상 붐빈다. 

[네이버 지식백과] 리알토 다리 [Ponte di Rialto] (두산백과)

 

 

 

 

 

 

 

 

 

 

 

 

 

 

소방서

 

 

'알베르또' 모교

 

 

 

 

 

 

 

 

 

 

 

 

 

 

 

 

 

 

 

 

 

 

 

 

 

 

 

 

 

 

 

 

 

 

 

 

 

 

 

 

 

전세계 최초의 카지노

 

 

 

 

 

 

 

 

 

 

 

 

Posted by landart
,

 

곤돌라

 

곤돌라는 이탈리아말로 ‘흔들리다’라는 뜻을 가진다.

길이 10m 이내, 너비 1.2∼1.6m이다. 관광객 유람용으로 이용되는 곤돌라는 고대의 배 모양을 본떠 만들었는데,

선수()와 선미()가 휘어져 올라가 있다.

중앙의 지붕이 낮은 객실에 5∼6명을 태우고, 선수와 선미에서 두 사람의 뱃사공이 3m 정도의 긴 노를 젓는다.

베네치아시는 운하가 도로의 역할을 하는 수상도시이어서 곤돌라는 11세기경부터 시내의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사용되었다.

16세기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야채와 식료품 등도 운반하였으며, 그 수는 약 1만 척에 달하였다.

배의 색채는 1562년 베네치아 시령()에 따라 검은색으로 통일되었다.

오늘날은 모터 보트의 보급으로 겨우 수백 척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곤돌라 [gondola] (두산백과)

 

 

 

 

 

 

 

 

 

 

 

 

 

 

 

 

 

 

 

 

 

 

 

 

 

 

 

 

 

 

 

 

 

 

 

 

 

 

 

 

 

Posted by landart
,

 

베네치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1106&cid=40942&categoryId=34083

 

 

 

 

 

 

 

 

 

 

카사노바

 

1725년 4월 2일 베네치아에서 출생하였다.

‘생갈트의 기사(Chevalier de Seingalt)’라는 이름은 그가 자칭한 것이다.

처음에는 성직자·군인·바이올리니스트 등으로 입신하려 하였으나, 추문()으로 투옥되었다.

1756년 탈옥한 이후부터 생애의 3분의 2를 여행으로 유럽 전토를 편력하였다.

재치와 폭넓은 교양을 구사하여 외교관·재무관·스파이 등 여러 직업을 갖기도 하고, 감옥에 투옥당하는 등 그의 삶은 변화무쌍하였다.

그 동안 여러 계층의 사람들(·귀족·문학가·과학자·예술가·희극배우·귀부인·천민·사기꾼·방탕아)과 두루 사귀었고

계몽주의 사상에도 접하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그는 보헤미아 둑스의 성에서 발트슈타인 백작의 사서()로 쓸쓸히 죽었으나,

그의 저술가로서의 명성은 이 성에서 지루한 나날을 달래기 위해 쓴 《회상록 Histoire de ma vie》(12권, 1826∼1838) 때문이다.

이것은 18세기 유럽의 사회·풍속을 아는 데 귀중한 기록이 되었다.

또한 5부로 된 공상소설 《20일 이야기 Icosameron》(1888)는 쥘 베른의 《지저() 여행》의 선구적 작품이라 일컬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지아코모 카사노바 [Giacomo Girolamo Casanova] (두산백과)

 

 

 

영어로는 베니스(Venice)라고 한다.

베네치아만() 안쪽의 석호(:라군) 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물의 도시’라고 부른다.

대안의 메스테르와는 철교·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나, 철도역은 철교가 와 닿는 섬 어귀에 있고,

다리를 왕래하는 자동차도 시내에는 들어올 수 없다.

시가지는 본래 석호사주()였던 곳에 들어섰기 때문에 지반이 약하고,

따라서 근래 지반침하와 석호의 오염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베네치아의 역사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6세기 말에는 12개의 섬에 취락이 형성되어 리알토섬이 그 중심이 되고, 이후 리알토가 베네치아 번영의 심장부 구실을 하였다.

처음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고,

도시공화제() 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다.

10세기 말에는 동부지중해 지역과의 무역으로 얻은 경제적 번영으로 이탈리아의 자유도시들 중에서 가장 부강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S자형의 대운하가 시가지 중앙을 관통하고,

출구 쪽의 운하 기슭에 장대한 산마르코 광장()이 자리한 기본적인 도시형태는

산마르코 대성당을 비롯한 교회·궁전 등과 더불어 13세기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5개의 원형 지붕에서 볼 수 있듯이,

베네치아의 몇몇 건축물에서는 동방의 영향을 반영하는 비잔틴풍() 또는 오리엔트풍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베네치아는 십자군() 원정에 힘입어서 동방무역을 확대하고,

나아가서 현재 그리스의 여러 섬들을 비롯한 동부지중해 지역에 영토를 확대함으로써

14~15세기 초에 해상무역공화국으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 무렵의 베네치아 인구는 약 20만으로 추정된다. 공화국의 정치 중심이었던 두칼레 궁전이 완성된 것도 15세기였다.

16세기 이후, 투르크인에 의해 동부 지중해에서 세력이 약화되고,

따라서 베네치아는 점차 오늘날의 베네토주의 풍요한 농업지대의 중심 도시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도시경제의 쇠퇴와 페스트의 유행으로 16세기에는 인구가 10만으로 감소하였다.

1797년에는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점령되었고, 1866년에 이탈리아 왕국군에 점령되기까지 반 세기 이상은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 경제의 중심인 북부평야를 배후지로 하는 항구도시로 발전하였다.

상항()은 서부의 철도역에 인접한 스타치오네 마리티마이나,

20세기에 들어와 대안에 공업항()으로 마르게라가 건설됨으로써,

마르게라·메스트레 등 대안() 지역이 근대공업지대로 발전하였다.

대안의 공업지구는 현재 행정적으로는 베네치아시에 포함되어 있고,

유리세공업()으로 유명한 무라노섬, 국제영화제 개최지 및 해수욕장, 카지노 등으로 유명한 리도 등도 베네치아시에 포함된다.

베네치아의 구시가지는 지난날의 공화국 번영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고,

 산마르코대성당·두칼레궁전·아카데미아미술관 등은 미술·건축예술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베네치아는 로마·피렌체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중요한 관광지이다.

대학 및 시() 동부의 현대미술전시장에서의 국제비엔날레, 리도의 국제영화제, 페니체극장에서의 음악 등 문화활동도 활발하다.

그러나 구시가지는 면적이 한정되어 있고, 현대생활에는 편리한 환경이 될 수 없으므로 대안부의 도시화가 현저하다.

대안부의 공업은 화학·기계공업이 중심이며, 공업항을 포함한 베네치아항의 취급물량은 이탈리아 제3위를 차지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네치아 [Venice] (두산백과)

 

 

 

 

 

 

 

 

 

 

 

탄식의 다리

 

두칼레 궁전과 작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나 있는 감옥을 잇는 다리이다.

1600년부터 1603년까지 안토니 콘티노(Antoni Contino)의 설계로 만들어졌다. 

'10인의 평의회'에서 형을 받은 죄인은 누구나 이 다리를 지나 감옥으로 연행되었다.

죄인들은 이 다리의 창을 통해 밖을 보며 다시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탄식을 했다고 한다.

다리로 이어지는 감옥은 조반니 카사노바가 갇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탄식의 다리 [Ponte dei Sospiri] (두산백과)

 

 

 

 

 

 

 

 

 

 

 

 

 

 

 

 

 

 

 

 

 

 

 

 

 

 

 

 

 

 

 

 

 

 

 

 

 

 

 

 

 

 

 

 

 

 

 

 

 

 

 

 

 

 

 

 

 

 

 

 

 

 

 

 

 

 

 

 

 

 

 

 

 

 

 

 

 

 

 

 

 

 

 

 

 

 

 

 

 

 

 

 

 

두칼래 궁전

 

679년부터 1797년까지 1,100년 동안 베네치아를 다스린 120명에 이르는 베네치아 총독의 공식적인 주거지였다. 

9세기에 처음 건설되었고, 현재의 외관은 14~15세기에 형성되었다.

최초의 건물은 마치 요새 같은 고딕 양식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고딕 양식을 잘 나타내면서도 비잔틴,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복합된 모습이다.

북방의 고딕 양식과 베네치아의 동방적 양식와 장식이 어우러진 모습을 베네치아 고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궁전은 베네치아 고딕의 조형미가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건물은 흰색과 분홍빛의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회랑은 36개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칼레 궁전에는 두 개의 정문이 있는데,

산마르코 대성당에 면한 쪽의 '문서의 문(Porta della Carta)'은 옛날에 정부의 포고문이나 법령 등을 붙이던 곳이다.

문 위에 보이는 날개가 있는 사자는 베네치아의 상징이다.

내부에는 총독의 방과 접견실, 투표실, 재판실 등이 있다.

가장 볼 만한 곳은 재판을 담당하던 '10인 평의회의 방'이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 중 하나로 유명한 틴토레토의 대벽화 《천》,

베네치아의 주요 역사를 그린 그림, 76인 총독의 초상화 등이 있다.

또 궁전 재판실에서 소운하를 사이에 두고 '탄식의 다리'라고 불리는 다리를 건너면 감옥이 있는데,

이곳의 감옥은 카사노바가 갇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궁전에서 감옥으로 넘어가는 다리에 '탄식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다리에 난 창으로 죄수들이 감옥으로 옮겨지면서

다시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베네치아의 총독은 선출되기가 힘들었던 데 비해, 

평의회 의원의 참석 없이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고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의원이 동행해야만 베니치아를 벗어날 수 있었으며, 

그의 궁전에서 열리는 모든 공식적인 축제의 비용을 시의 도움 없이 혼자서 지불해야만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칼레 궁전 [Palazzo Ducale] (두산백과)

 

 

 

 

 

 

 

 

 

 

 

 

 

 

 

산 마르코 광장

 

베네치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열주로 가득한 건물이 광장을 'ㄷ'자로 둘러싸고 있어 광장은 하나의 거대한 홀처럼 보이며,

나폴레옹은 이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홀)이라 불렀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베네치아의 수호신인 날개 달린 사자상과 성테오도르상이 있고 동쪽으로 산 마르코 대성당, 두칼레 궁전이 있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은 16세기 경 정부청사로 건립된 것으로 나폴레옹의 날개(알라 나폴레오니카)라고도 불리며,

현재는 박물관을 비롯해 오래된 카페, 살롱들이 들어서 있다.

그중 1720년에 개업한 카페 플로리안은 과거 바이런, 괴테, 바그너 등이 자주 들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마르코 광장 [San Marco Piazza] (두산백과)

 

 

 

 

 

 

 

 

 

 

 

 

 

 

Posted by landart
,

 

베로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1177&cid=40942&categoryId=34083

 

브레네르 고개를 넘는 도로·철도가 이탈리아 북부의 평야에 들어서는 곳에 있으며,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 상업의 중심지로서 발달하였다.

로마 시대의 건조물로는 원형극장과 아디제강()의 다리 등이 남아 있다.

12∼13세기에는 롱고바르드(롬바르디아)의 지배하에 번영하였으며, 13∼14세기에는 겔프당()과 기벨린당 사이의 투쟁이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은 이 투쟁을 배경으로 한다.

15∼16세기에는 조콘도, 산미켈리, 비토리오·피사노·파올로·베로네세 등에 의해 회화()의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은 중요한 곡물시장이며, 기계·제지·인쇄 등의 공업 중심지이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로나 [Verona] (두산백과)

 

 

아디제 강

 

길이 410km. 유역면적 1만 2200km2. 스위스 산지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내려 알프스를 거친다.

다시 롬바르디아 평원의 포강() 북쪽에서 거의 포강과 나란히 동쪽으로 흘러 베네치아 남쪽에서 아드리아해()로 흘러들어간다.

산간 유역에는 트렌토, 산기슭 부근에는 베로나 등의 도시가 있으며,

산간의 골짜기 지대에는 이탈리아인()과 독일계 농민이 옥수수와 밀을 재배한다.

과거 수세기에 걸쳐 제방을 높이 쌓아올려 하류의 끝에서 80m 지점까지는 완전히 인공수로로 이루어졌다.

하구에서 270km까지는 소항()이 가능하며, 발전 ·수운 ·관개 등에 이용된다.

아디제강 본문 이미지 1 

[네이버 지식백과] 아디제강 [Adige R., ─江] (두산백과)

 

 

 

 

 

 

 

 

 

 

 

 

 

 

 

 

 

 

 

 

 

 

 

 

 

 

 

 

 

 

 

 

 

 

 

 

 

 

줄리엣의 발코니까지 완벽하게 갖춘, 『로미오와 줄리엣』 여주인공의 유명한 집

소박한 길거리에 베로나에서 가장 많은 이가 찾는 명소가 서 있다.

바로 줄리엣의 집(라 카사 데 줄리에타)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집이라 여겨지는 이곳은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연인들에게 사원과 같은 곳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상징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만큼 방문객은 벽에 낙서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오늘날 이 집은 건축학적, 역사적, 문학적 사연뿐만 아니라 끝없는 낙서로도 유명해졌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베로나를 방문했다는 증거는 없으나

그의 희곡은 서로 적대적인 두 가문에 대한 이탈리아 전설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그는 이 가문에 캐풀렛과 몬태규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실 현재 줄리엣의 집이라 알려진 이 저택은 한때 델 카펠로라는 이름의 가문의 소유였던 적이 있는데,

셰익스피어가 붙인 캐풀렛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왔을 법도 하다.

아치 꼭대기에 박힌 돌에서는 아직도 델 카펠로 가문의 문장을 볼 수 있다.

희곡의 등장인물들이 실제 인물에 근거한 것인지 여부는 열띤 논쟁의 대상이었지만,

로미오나 줄리엣이 정말 존재했든 아니었든,

그들의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쓰인 가장 훌륭한 러브 스토리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그렇기에 전설적인 기념물이 될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이 집에는 현재 아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해도 좋을 발코니가 있다.

이 발코니는, 로미오가 자신의 사랑을 털어놓는 순간 줄리엣이 서 있던 발코니라는 소문이 있지만

사실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살았다고 여겨지는 시대보다 몇 세기나 뒤에 이 집에 증축된 부분이다.

근처에 로미오의 집이 있으며, 줄리엣의 무덤이라 여겨지는 무덤이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안에 유골이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연극 속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은 함께 묻힌다).

오늘날 이 집은 작은 박물관이 되었으며, 계단을 타고 올라가 발코니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다.

20세기에 제작된 줄리엣의 청동상도 서 있는데,

조각상의 오른쪽 가슴을 어루만지면 사랑에 행운이 따른다는 관습 때문에 그녀의 오른쪽 가슴은 항상 반들반들 빛나고 있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장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여전히 그 향기는 달콤한 것을."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1596년경)

[네이버 지식백과] 줄리엣의 집 [Juliet’s House]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 1. 20., 마로니에북스)

 

 

 

 

 

 

 

 

절절한 사연들

 

 

쥴리엣의 집

 

 

로미오의 집

 

 

 

 

 

 

 

 

 

 

 

 

 

 

 

 

 

스칼라 가문의 묘

 

 

 

 

 

 

 

 

 

 

 

 

 

 

 

 

 

원형 극장 아레나

 

 

 

 

 

 

 

 

 

 

 

 

 

 

 

 

 

 

 

 

 

 

 

Posted by landar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