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하는 모습도 아름답다.

 

 

 

 

 

 

 

 

 

 

 

 

 

 

 

포지타노

 

아말피 해변의 11개 마을 주의 하나인 포지타노는 전형적인 지중해의 풍경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흰색 집들과 비취색 바다가 한 데 어우러져 아름 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포지타노는

척박한 지형을 예술적인 건축물로 더욱 아름답게 승화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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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피아 가도

 

이탈리아 중부,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향한 가도.

[다른 이름] 애피언가도 Appian Way(영국). 길이 약 590km.

고대 로마 최초의 군사 도로. 기원전 312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건설. 돌로 포장된 연도엔 카타콤바 등 분묘와 옛 터가 많이 있음.

[네이버 지식백과] 아피아 가도 [Appia, Via] (세계인문지리사전, 2009. 3. 25., 한국어문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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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화산 폭발로 멸망한 도시

79년 8월 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검은 구름이 분출되면서 화산이 분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산은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암을 뿜어내면서 인근 도시로 쏟아져내렸다.

나폴리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폼페이는 이 화산 폭발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소멸한 도시 중 하나다. 하늘에서 비오듯 쏟아져내리는 엄청난 양의 흙과 돌은 순식간에 폼페이를 뒤덮어버렸다. 운 좋게 도망친 사람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늦은 사람들은 지상을 뒤덮은 고온 가스와 열구름에 질식하거나 뜨거운 열에 타 죽었다. 이 폭발로 당시 폼페이 인구의 약 10퍼센트인 약 2,000명이 도시와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당시 폼페이는 B.C. 89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였으며, 로마의 상류계급이 별장을 건설했던 휴양지이기도 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인 63년 2월에 대지진이 일어났지만 도시는 착실하게 재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6년 뒤 도시 전체는 화산재 밑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폼페이 멸망의 참극에 대해서는 당시 로마의 정치가 소()플리니우스1)가 역사가 타키투스2)에서 보낸 편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소플리니우스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나폴리만 입구 미네눔에 머물고 있었다. 폭발 당일 소플리니우스의 어머니가 베수비오 화산 상공에 이상한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소플리니우스에게 알려주었다. 소플리니우스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재빨리 어머니와 함께 먼 곳으로 피난을 떠났다. 후에 그는 편지 속에서 그때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그의 숙부인 대플리니우스3)는 당시 함대의 선장으로 배를 타고 나가 구조 활동을 펼쳤지만 독성이 강한 화산 가스에 질식해 그만 죽고 말았다.

당시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 참극에 대해 보고를 받고 곧바로 구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피해가 너무나 커서 화산 분출물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로마 황제까지 나서서 폼페이의 몰락을 막아보려 했지만 폼페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폼페이

잠에서 깨어난 로마의 도시

역사에 퇴장했던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592년이었다.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우연한 계기로 폼페이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748년에는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4)가 독점 사업으로 폼페이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굴은 약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름다운 출토품만이 중요하게 취급될 뿐 나머지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또 모자이크나 벽화 같은 미술품들도 충분한 조사도 없이 모조리 프랑스 왕궁으로 실려가버렸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폼페이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유적에 대한 구획 정리와 함께 본격적인 수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굴단은 유적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넣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후에도 폼페이 발굴은 계속되어 현재는 도시의 약 5분의 4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이다. 이곳에서 많은 출토품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발굴조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폼페이는 당시 로마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유적이었다. 화산 폭발로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도시는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폼페이는 한 변이 약 2킬로미터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도시 서쪽에는 포럼이라 불리는 광장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신전과 시장, 시청 등이 모여 있었다. 조사를 통해 바로 이 지역이 폼페이의 종교·정치·경제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도시 곳곳을 이어주는 도로들은 모두 포장되어 있었으며, 차도와 보도로 구분되어 있었다. 또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사거리에서는 공동 수도와 각 가정으로 물을 보내기 위한 수도관 시설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밖에 공중 목욕탕과 체육관, 두 개의 극장, 1만 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도 발굴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발견한 빵집과 술집에서는 화산 폭발이 갑자기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남아 있었다. 화덕에 그대로 남아 있는 불에 구운 빵과 술집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잔 등이 바로 그 증거다. 한가로운 일상을 한순간에 참극으로 몰아넣은 급작스런 화산 폭발과 그로 인한 도시의 파괴가 단지 이야기만이 아니라 사실이었음을 폼페이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폼페이 [pompeii] (고대유적, 2007. 6. 4., 도서출판 들녘)

 

 

 

 

 

 

 

 

 

 

 

 

 

 

 

 

 

베수비오산

 

높이 1,281m. 나폴리 동쪽 12km 지점에 있는 현무암질의 2중식 활화산이다.

일반적으로 영어명의 베수비어스산(Vesuvius Mt.)으로 널리 알려졌다.

유럽대륙 유일의 활화산으로 산꼭대기에는 지름 500m, 깊이 250m의 화구가 있고, 그 안에 중앙화구구()가 있다.

소마산(1,132m)이라고 부르는 외륜산()과 중앙화구구와의 사이에는 아트리오라는 길이 약 5km, 너비 600m의 초승달 모양의 화구원()이 펼쳐진다.

베수비오산은 BC 8세기에 분화()했다고 하며, 63년의 지진으로 산기슭 일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79년 8월의 대분화로 폼페이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삽시간에 죽음의 도시로 변하고 지하에 매몰되는 대참사가 있었는데 이 참사는 영국의 작가 E.G.리턴이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 잘 묘사하였다.

그 대분화 이후에도 수십 회에 걸쳐 산꼭대기와 산허리에서 폭발하여 용암이 흘러내렸다.

1631년에는 약 반 년에 걸친 진동 후 폭발하여 주변의 주민 1만 8000명이 희생되었고,

그 후에도 끊임없이 진동이 계속되어 산의 모습이 달라지고 분화구의 중앙에서 좀 남쪽에 화산구()가 생겼다.

1944년에는 대용암류로 등산전차가 황폐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자동차 리프트로 산꼭대기에 오를 수 있고,

둘레 72km에 이르는 화산 기슭을 둘러싸고 관광철도가 달리고 있다.

높이 600m 이하의 비옥한 화산 비탈면에서는 포도 ·오렌지류 ·호두 등의 재배와, 가축 사육이 활발하다.

산중턱의 서쪽 높이 약 600m 지점에는 1845년 세계에서 최초로 건설된 화산관측소가 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분화는 1973 ·1979년이며, 베수비오산은 나폴리 풍경의 상징으로 많은 노래와 회화, 문학작품에 인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수비오산 [Vesuvio Mt., ─山]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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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

 

피렌체의 남쪽 약 50km 지점, 옴브로네강()의 지류 사이에 끼어 있는 해발고도 320m의 구릉에 위치한다.

포도주 산지로서 이름높은 키안티 산지에 위치하여 포도주 ·대리석 ·농기구 등을 생산한다.

시()는 에트루리아인()이 건설하여, 로마인의 식민시()가 되었으나, 현재 고대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벽돌과 석재로 축조된 중세의 시가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중세에서 근세에 걸쳐 피렌체 ·아레초 등의 도시와 교황세력, 에스파냐 세력이 시에나의 지배를 둘러싸고 서로 다툼으로써 침략당하기도 했다. 1559년 이후에는 토스카나 공국()에 병합되어 이탈리아 통일에 이르렀다.

시에나의 르네상스는 14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특히 회화에서는 14세기 전반에 시에나파()가 성립되었다.

카시아 가도()에 위치하고 있으나 간선철도에서 떨어져 있으므로 근대도시로서의 발전은 별로 없고, 옛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이탈리아 고딕양식의 대표로 알려진 시에나 대성당, 코르사델팔리오(중세풍의 경마)가 해마다 열리는 캄포 광장, 만자탑()이 있는 시청사 등이 있다.

그 밖에 13세기에 창건한 대학, 음악 아카데미 등이 있으며, 이들 건축물과 풍부한 르네상스 미술 작품에 의해서 중부 이탈리아의 중요한 관광도시이다.

 

 

 

 

 

 

 

 

 

 

 

 

 

 

 

 

 

 

 

 

 

 

 

푸블리코 궁전

 

캄포 광장에 우뚝 서 있다. 

1297년에서 1342년 사이에 지어진 토스카나 지방의 대표적인 고딕식 건물로 현재 1층은 시청사이고, 2~3층은 시립 미술관이다.

건물 왼쪽의 만자탑(Torre di Mangia)은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높은 탑으로 약 102m, 505개 계단을 통해서 정상까지 오르면 온통 붉은 벽돌과 진흙으로 이루어진 중세의 시가지 모습과 토스카나 지방의 농촌 풍경 파노라마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 바로 밑의 조개 껍데기 모양의 캄포 광장의 모습도 한눈에 들어온다.

건물 오른쪽은 시청사(City Hall)로 사용되고 있는데, 프레스코화가 많이 소장되어 있다.

피에트로의 《마리아의 대관》, 소()도마의 《부활》, 마르티니의 《마에스타》 등 유명한 작품들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푸블리코 궁전 [Palazzo Pubblico] (두산백과)

 

 

 

 

 

 

 

 

 

 

 

 

 

 

 

 

 

 

 

 

 

 

 

 

 

 

 

 

 

 

 

 

캄포광장

 

시에나의 중심지이자 시에나 초기 역사의 중심지이다.

특이한 구조로 유명한데 광장은 매우 넓으며 전체적인 모양이 마치 조개 껍데기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또한 하얀 돌로 9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것은 중세시대 때의 9개 의회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광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만자탑 (Torre di Mangia)은 길이 102m의 오르막 계단을 올라가면 시에나의 멋진 시가지 전경을 즐길 수 있고, 탑 옆에는 푸블리코 궁전이 있다. 광장 중앙에는 조각가 야코포 델라 퀘르치아 작품의 《가이아의 분수》 복제품이 있는데, 진품은 시립박물관에 있다.

평소에 눕거나 앉아 마시고 떠들며 이탈리아의 태양을 만끽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7~8월에는 시에나의 전통 축제인 팔리오가 열려 더욱 활기차다.

[네이버 지식백과] 캄포 광장 [Piazza del Campo] (두산백과)

 

 

 

 

 

 

 

 

 

시에나 대성당

 

고딕 양식을 이탈리아적인 모습으로 가장 잘 정리한 건물로 알려졌다.

1229년에 착공, 1259년에는 회당부(), 1317년에는 원개()를 떠받치는 6각형의 기부()와 내진부()의 건설이 끝났으나, 전면적인 확장계획이 실시되어 1340년경부터 새로운 구상으로 제2기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8년 후에 페스트가 도시를 휩쓰는 바람에 대규모의 개조는 중단되고 결국 당초의 계획이 바뀌어 1380년에 겨우 완성되었다.

교차궁륭(窿)으로 덮인 회당부를 비롯하여 성당()의 본체()는 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깝고 구성에 있어서도 불규칙적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을 유명하게 한 것은 좌우 대칭으로 배치된 3쌍의 3각 박공()으로 된 고딕풍의 화려한 서쪽 정면이다.

니콜라 피사노가 설계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 실제로 공사를 지휘한 것은 아들 조반니였다.

박공 양옆의 소첨탑() 중앙의 장미창, 입구의 구성과 조각 등 고딕 양식의 격식은 일단 갖추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고딕 본래의 수직성보다도 계산된 명쾌한 균형이 주는 안정감이 강한 편이어서 색대리석을 사용한 색채설계와 함께 오히려 이탈리아 특유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채색() 수법은 측면 ·내부 ·종탑(14세기 말)에서도 볼 수 있으며, 검은 색과 흰색의 아름다운 줄무늬는 전체적으로 훌륭한 시각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에나대성당 [Duomo di Siena, ─大聖堂]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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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역사 지구

 

피렌체는 14~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걸작이 곳곳에 남아 있는 도시이다.

피렌체 역사 지구에는 피렌체의 상징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과 단테의 생가,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 미켈란젤로 광장 등이 있으며 메디치 가문이 기증한 우피치 미술관도 만날 수 있다.

우피치 미술관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 등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뿐 아니라 바로크, 로코코 시대의 주요 작품까지 소장하고 있어 이탈리아 최고의 미술관으로 손꼽힌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렌체 역사 지구 [Historic Centre of Firenze] (이탈리아에서 보물찾기 1, 2, 2011., 아이세움)

 

 

 

 

 

 

 

 

 

 

 

 

 

 

 

단테의 생가

 

이탈리아 중세를 대표하는 시인 단테(1265~1321)가 태어난 집이다.

단테 알리기에리 거리(Via. Dante Alighieri)에 있으며, 내부에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13세기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개장시간: 10:00~17:00

[네이버 지식백과] 단테의 생가 [Dante's Birthplace]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시공사)

 

 

 

 

 

 

 

 

 

 

 

 

베키오 궁전

 

1298년에 착공하여 몇 번에 걸친 개조 공사를 통해 16세기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1540년에 코시모 공작 1세의 명으로 바사리가 내부를 개조했다.

일찍이 피렌체 공화국(토스카나 공화국)의 청사였던 건물로, 현재도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궁전 오른쪽 입구로 계단을 올라가면 대청으로 들어서게 되며, 대청 양쪽 벽면에는 바사리와 그 일파가 그린 메디치의 전투장면이 있다.

3층에는 기를란다요의 로마 영웅들을 표현한 프레스코화가 있으며 그밖에도 마키아벨리 초상화, 프란체스코 1세의 방, 지구의 방 등 옛날 피렌체의 부와 힘을 느끼게 하는 유물들이 많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키오 궁전 [Palazzo Vecchio] (두산백과)

 

 

시뇨리아 광장

 

수세기 동안 피렌체의 정치·사회적 중심지였으며, 현재는 카페 테라스가 있는 휴게장소이다.

광장 부근 베키오 궁전에 있는 종루의 종은 시민들을 공공집회에 불러모으는 데 사용되었다.

광장에는 피렌체를 일으킨 코지모 데 메디치의 동상이 있고,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동상 《다비드》의 모조품과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의 청동상인 《첼리니의 페르세우스》, 잠볼로냐의 《사빈 여인의 강간》 등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 모조품들이 있다.

광장 중앙에는 한때 피렌체를 지배했던 수도승 사보나롤라의 처형지임을 알리는 화강암이 서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뇨리아 광장 [Piazza della Signoria] (두산백과)

 

 

 

 

 

 

 

 

 

 

 

 

 

 

 

 

 

 

 

 

 

 

 

 

 

 

 

 

 

 

 

 

 

 

 

 

 

 

 

 

 

 

 

 

 

 

 

 

 

 

 

 

 

 

 

 

 

 

 

 

 

 

 

베키오 다리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아르노강 위에 세워진 다리로 14세기에 건설되었다.

강 양쪽으로 귀금속 세공소와 보석상이 즐비하다. 본래 푸줏간이 있던 자리였는데, 페르디난도 1세가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로 철거시킨 후 금은 세공품 상점이 들어섰다. 베키오 다리는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난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된 이 다리에서 피렌체의 연인들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그 증표로 자물쇠를 채운 뒤 열쇠를 강물에 버리거나 다리에 자물쇠를 달곤 했다.

현재는 피렌체 시에서 다리가 손상될 것을 우려해 이와 같은 행위를 금지하고 어길 시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베키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아르노강의 풍경도 아름답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키오 다리 [Ponte Vecchio]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시공사)

 

 

 

 

 

 

 

 

 

 

 

 

 

 

 

 

 

 

 

 

 

 

 

 

우피치 미술관

 

고대 그리스의 미술 작품에서 렘브란트의 작품까지 소장품은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르네상스 회화의 걸작들을 다량 보유하고 있어서 세계 굴지의 미술관으로 손꼽힌다. 우피치(Uffizi)는 이탈리아어로 '집무실'을 뜻하며 미술관 건물은 본래 피렌체 공화국의 행정국이었다. 1560년경 초대 토스카나 대공인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가 피렌체의 행정·사법기관을 한곳에 모으기 위한 건물 건립을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에게 명령하면서 착공되었다.

우피치 미술관의 역사는 바사리가 이 건물을 완성한 1560~1574년에 시작되지만, 미술품이 수집된 것은 이보다 이른 시기인 15세기 전반부터 피렌체를 다스린 코시모 일 베키오(1389~1465)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디치가는 이곳을 통치하던 200년 동안 예술가들에게 미술품 제작을 의뢰하고 작품을 수집했다. 코시모 1세 때부터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메디치가의 미술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1737년 메디치가의 마지막 후손으로 우피치 궁의 미술품을 물려받은 안나 마리아 로도비카가 토스카나 대공국에 기증했고 그녀의 뜻에 따라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우피치 미술관에는 14~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뿐 아니라 17~18세기 바로크와 로코코의 화가, 독일과 프랑스 르네상스 화가들의 중요한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장품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봄의 향연>,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조토의 <마돈나>, 다빈치의 <수태고지>, 미켈란젤로의 <성가족>, 라파엘로의 <어린 요한과 함께 있는 예수와 성모>, 카라바조의 <바쿠스> 등이다.

무려 2,500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소장품을 보려면 적어도 한나절은 필요하다. 유명 회화 작품들이 몰려 있는 3층부터 관람하는 것이 좋다. 2층은 소묘와 판화 전시실이며 1층에는 고문서류도 있다. 미술관 한 모퉁이에는 '바사리의 회랑'이라는 긴 복도 모양의 건물이 베키오 다리로 이어져 있다. 베키오 궁전과 아르노 강 건너편의 피티 궁전을 연결하는 이 회랑은 길이가 약 1km에 이르며 세계 최대의 초상화 전시로 유명하다.

우피치 미술관은 1993년 테러리스트가 폭탄을 던져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나 그 후 중요한 부분을 개조했다. 워낙 관람객이 많아 몇 십 명 단위로 입장을 허용하니 관람하려면 일찍 가는 것이 좋다. 피렌체는 우피치, 아카데미아, 바르젤로, 산 마르코 미술관 입장권 예매를 실시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피치 미술관 [Galleria degli Uffizi]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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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두오모 대성당)

 

브루넬레스키의 유명한 돔 지붕이 얹혀 있는, 한때는 세계 최대였던 성당

두오모, 혹은 피렌체 대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바실리카는 현재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에 뒤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다.

그러나 이 바실리카가 처음 지어졌을 때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3만 명의 신도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 피렌체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배력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성당을 짓는 작업은 1296년에 시작되었으나, 축성을 받은 것은 1436년에 이르러서였다.

이 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화려한 녹색과 붉은색, 흰색의 대리석 파사드, 르네상스 거장들 그림과 조각 작품 컬렉션,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돔 덕분에 명성이 높다.

이곳은 또한 1439년부터 피렌체 의회가 있었으며,

종교 개혁가이자 '허영의 소각'(죄가 된다고 여겼던 사치품과 이교도적인 미술품, 책 등을 공개적으로 불태운 사건)의 주동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설교를 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 성당에서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적도 있다. 1478년 피렌체의 공동 통치자였던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가 라이벌인 피사의 대주교와 교황 식스토 4세가 보낸 이들에게 찔려 숨졌던 것이다.

그의 형이자 공동 통치자였던 '위대한 로렌초' 역시 칼에 찔렸으나, 무사히 몸을 피했고 이후에는 대주교를 목매달아 죽여 버렸다.

오래된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있던 부지에 세워진 이 성당의 건축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로 시작하여 여러 건축가들이 맡아 보았다.

1331년 작업을 총괄하기 위한 협회가 창설되었고,

1334년에는 화가이자 건축가인 조토가 총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건축가 안드레아 피사노가 조수를 맡았다.

1337년 조토의 사망 후 여러 명의 건축가가 감독을 맡았으며, 원래의 계획을 확장하고 돔을 짓는 쪽으로 설계했다.

1418년 돔을 건축할 디자이너를 찾기 위한 공모전이 열렸다.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선발되었다.

그의 혁신적인 설계는 발판이 필요 없이 스스로 지탱되는 돔을 낳았다. 돔은 1436년에 완공되어, 독창적인 걸작으로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렌체 대성당 [Florence Cathedral]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 1. 20., 마로니에북스)

 

 

 

 

 

 

 

 

 

 

 

 

산 조반니 세례당

 

두오모 옆에 위치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팔각형 건물로,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건축물이다.

4세기경에 세워진 소성당을 11세기에 재건한 것으로, 피렌체의 수호 성인 산 조반니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례당 자체보다 부조가 새겨진 3개의 청동 문이 더 유명하다.

특히 로렌초 기베르티가 제작한 동쪽 출입문은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답다'고 극찬했다고 전해진다.

심판자 그리스도의 모습, 천체도, 성서 에피소드 등이 그려진 천장의 모자이크도 볼거리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 조반니 세례당 [Battistero di San Giovanni]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시공사)

 

 

 

 

 

 

 

 

 

 

 

 

조토의 종탑

 

피렌체 출신 화가 조토와 그의 제자 피사노가 함께 작업해 14세기 말에 완성한 종탑이다.

두오모와 마찬가지로 외관은 장미색, 흰색, 녹색의 3색 대리석을 이용해 정교하게 만들었다.

종탑 최하단에 장식되어 있는 붉은색 패널 안에 있는 부조는 안드레아 피사노의 작품이다.

현재 종탑에 장식되어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원작은 두오모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414개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 높이 84m의 꼭대기에 도달하면 두오모의 웅장한 모습과 피렌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개장시간: 8:30~19:30

[네이버 지식백과] 조토의 종탑 [Campanile di Giotto]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시공사)

 

 

 

 

 

 

 

 

 

 

 

 

 

 

 

 

 

 

 

 

 

 

 

 

 

 

 

 

 

 

 

 

 

 

 

 

 

 

 

 

 

 

 

 

 

Posted by land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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